[Opinion] '나'를 찾아줘 [영화]

<나를 찾아줘>라는 책과 영화를 읽다.
글 입력 2018.12.12 13:1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책 vs 영화



151.jpg


길리언 플린의 장편소설 <나를 찾아줘>는 2012년 출간부터 현재까지 사랑받는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2014년에 개봉한 영화 <나를 찾아줘>는 북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다. 개인적으로 스릴러 장르를 싫어하는 탓에 책을 찾아볼 생각이 없었는데 우연히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감상평을 보게 되었다. 그 게시물은 책 <나를 찾아줘>를 '비혼을 결심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정의했다. 그 한 줄이 다음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게 만들었다.


'나를 찾아줘'라는 제목과 'Gone girl'이라는 부제를 통해 알 수 있듯, 소재는 '사라진 아내'이다. 결혼 5주년 당일에 갑자기 사라진 아내 에이미는, 국민 동화책 <어메이징 에이미>의 그 '에이미'로, 막대한 유산과 아름다운 미모, 하버드 출신의 지성까지 갖춘 완벽한 여자이다.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아내를 찾기 위해 남편 닉은 경찰 수사에 협조하며 방송을 타게 되는데 수사가 진행될수록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모든 상황은 에이미가 꾸민 치밀한 계획이었다.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였던 남편 닉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살해된 아내 흉내를 낸 것이다. 억울한 누명에 쓰인 닉은 아내가 남긴 단서, 편지를 찾아 '보물찾기'를 하게 되는데, 책에서는 줄곧 닉과 에이미의 상황이 대조되어 서술된다.

무려 637페이지나 되는 장편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영화를 봐야겠다 생각했다. 긴 이야기 흐름 속에 짜인 치밀한 감정 변화를 과연 영화에서 제대로 풀어냈을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덮자마자 영화를 찾아 보았다. 영화의 각색 작가가 원작의 저자 길리언 플린이라는 것에 약간은 안도하며.



1311.jpg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은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심리가 촘촘히 설명되는 소설이라는 장르와 달리 영화는 모두 설명할 수 없다. 때문에 원작 소설에선 에이미의 과거-현재, 닉의 현재를 교차해서 서술하지만, 영화는 에이미의 내레이션으로 대신한다.
  
그러나 작품의 첫 분위기는 책과 영화가 조금 다르다. 먼저 원작소설, 에이미의 일기를 바탕으로 진행되는 시점 속 닉과의 첫 만남을 기록한 에이미는 천진난만하지만, 어딘가 냉소적인 아가씨이다. 그에 비해 영화 속 에이미는 날 때부터 고상하고 지적인 인물로 보인다. 물론 두 에이미 모두 극이 진행될수록 서늘한 인물로 변해간다.

에이미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에는 책이 우세하다. 에이미의 삶이 압축된 영화는 그녀의 행동을 납득시키지 못한다. 영화에선 에이미의 범행 동기를 단지 남편의 외도로 대표하여 에이미가 갑자기 분노하고 돌변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또한 닉의 감정 변화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의 닉은 자신을 모함에 빠뜨린 에이미를 저주하며 죽이고자 한다. 그런 닉의 폭력성은 형사 앞에서 물컵을 던져 부쉰다거나, 에이미를 밀치는 과거로 나타나는데, 에이미에게 퍼붓는 저주와 살인 충동은 그에게서 동정을 앗아간다. 그러나 영화는 이 부분을 삭제하고 에이미의 계획의 피해자로, 한심한 남편으로만 등장시킨다. 에이미의 편에 서게 만드는 주요한 지점이었는데 말이다.
 
에이미의 분노는 갑자기 폭발한 것이 아니다. 에이미의 열등감은 태어난 순간부터 차곡차곡 쌓여왔다. 자신을 소재로 한 <어메이징 에이미>로 평생 정체성 혼란을 겪고, 항상 남들이 원하는 에이미가 되어야 했으며, 자신의 전 재산을 부모와 남편을 위해 주고,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억지로 친구 한 명 없는 시골로 내려가며 그곳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한 채 전업주부로 살게 된다. 엎친 데 덮쳐서 닉의 외도까지 알게 된 에이미의 분노가 극에 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정을 위해 헌신했던 에이미가 틀에 맞춰진 자신을 깨닫고 진정한 운명이라 생각했던 닉마저 자신을 대상화된 '쿨한 여자'로 여긴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은 책과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남자들은 그걸 최고의 칭찬이랍시고 말하곤 하지 않아? 걘 '쿨한여자'야. '쿨한여자'라는 건 내가 풋볼, 포커, 음담패설과 트림을 좋아하는 섹시하고, 똑똑하고, 쾌활한 여자면서 비디오게임과 싸구려 맥주, 스리섬과 애널 섹스를 좋아하며, 마치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음식 윤간 쇼라도 개최한 듯 핫도그와 햄버거를 입속에다 쑤셔 박고서도 어떻게든 44사이즈를 유지하는 여자다. 무엇보다도 '쿨한 여자'는 섹시해야 하니까. 섹시하면서도 이해심도 많은 여자. '쿨한 여자'는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다. 대신 화가 나도 사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자기 남자가 뭐든 자기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둔다. 마음대로 해, 난 신경 안 써, 나는 쿨한 여자니까.


남자들은'쿨한 여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줄 안다. 어쩌면 너무 많은 여자들이 기꺼이 그런 여자인 척 하므로 속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쿨한 여자'에 분노했다. 난 내 주변 남자들 (친구들, 직장동료들, 낯선 사람들 등등)이 그 끔찍하고 가식적인 여자들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남자를 앉혀놓고 차분하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만나고 있는 건 여자가 아니다, "넌 여자를 사귀는 게 아니야. 당신이 만나고 있는 건 그런 여자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자기한테 키스해줄 거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찌질한 남자들이 각본을 쓴 영화를 지나치게 많이 본 여자다. (중략)


훨씬 더 한심한 건 '쿨한 여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되고 싶은 여자를 연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남자들이 바라는 여자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나는 참을성 있게 -몇 년을-기다렸다. 추세가 역전되어 남자들이 제인 오스틴을 읽기 시작하고, 뜨개질을 배우며, <코스모폴리탄>을 즐겨 읽는 척하고 파티를 주최해 자기들끼리 잘 지내는 동안, 우리 여자들이 음흉하게 지켜보다 '그래, 그는 쿨한 남자야'라고 말하는 날이 오기를.


- 소설 <나를 찾아줘> 中 342~343p



'쿨한 여자'. 남자들은 그걸 최고의 칭찬이랍시고 말하지 않아? "쟤는 쿨한 여자야." '쿨한여자'는 섹시해. '쿨한 여자'는 잘 맞춰줘. '쿨한 여자'는 재미있어. '쿨한 여자'는 자기 남자에게 절대 화내지 않아. 그저 유감스럽지만 사랑스럽다는 듯 미소 짓고 남자 성기를 빨아주지. 내 음모를 죄다 왁싱했어. 아담 샌들러 영화들을 보면서 캔맥주를 깠어. 식은 피자를 먹으면서 44사이즈를 유지했어. 거의 정기적으로 오럴도 해줬어. 그 순간에 충실했지. X나 맞춰줬어.


(중략)


하지만 닉이 게을러졌어. 내가 결혼하길 원했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닉은 실제로 내가 그를 무조건 사랑해주기를 바랐어. 그러고선 땡전 한 푼도 없이 나를 이 촌구석으로 끌고 와놓고선 새로운 젊고 발랄한 "쿨한 여자"와 바람을 피웠어.


- 영화 <나를 찾아줘> 中 에이미 내레이션

 




의도된 페미니즘



수정됨_7.jpg
 

책과 영화 속 에이미가 말하는 '쿨한 여자'는 남자들의 틀에 맞춰진 여자이다. 책에선 10포인트의 빼곡한 글씨로 두 페이지가 넘게 서술되지만, 영화에서는 단 몇 줄의 내레이션으로 채워진다. 다만 다수의 여성을 향한 외침이었던 에이미의 고백이 영화에선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며 운전하는 여성들을 추측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순간 제 옆을 스치는 모든 여성이 학습된 '쿨한 여자'이자 여성 혐오의 피해자인 것이다. 언제나 헌신적이고 아름답길 바라는 뿌리 깊은 여성 혐오 말이다. 에이미는 아름답고 친절하게 꾸며진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줄곧 부모의 <어메이징에이미>와 비교당하며 원치 않게 본인을 소비시켜 왔고 사회적인 아름다움을 찬양받으며 자신을 쿨한 여자로 가두어 온 에이미에게 이미지를 꾸며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게다가 사회가 원하는 아름다운 여성상의 최상인 어머니라는 사회적 지위도 꾸며 냈다. 에이미는 사이코패스 따위가 아닌 사회가 만든 여성 혐오의 피해자였다.


영화 속에는 곳곳에 사회전반에 깔린 여성 혐오를 보여준다. 에이미의 악랄함을 전 애인의 넥타이까지 통제한 전적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본다면 어떨까,


1.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의 짧은 치마 길이를 지적한다.

2. 가슴이 깊이 파인 옷을 입지 말라고 한다.

3. 다른 남자가 쳐다보니 질투가 나기 때문이란다.

4. 그는 독한 남자일까?


행위의 주체만 바꾸었을 뿐인데 한순간에 독한 여자에서 질투하는 남자친구가 된다. 이 생각을 염두에 두고 영화로 돌아와도, 넥타이로 전 애인을 통제한 에이미는 여전히 독한 여자이다. 남자친구의 옷차림을 통제할 만큼 드센 여성, 기가 센 여성이 에이미라는 것을 넥타이 하나로 이해시킨다. 아무리 인식이 바뀌었대도 무의식 속 차별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이것이 바로 개인의 가치관을 떠나 사회적으로 세뇌당한 여성 혐오이다.




뒤바뀐 권력


수정됨_4.jpg
  

<나를 찾아줘>의 주요 직책, 권력을 잡은 인물은 대게 여성이다. 에이미는 물론, 사건 수사 주도권을 쥔 형사도, 닉을 곤란하게 만드는 주위 여성들과, 내연녀 앤디, 언론인들까지 모두 여성이다. 심지어 에이미의 돈을 강탈한 여자마저 남자에게서 주도권을 쥔 쪽이다. 굉장히 판타지 같지만, 한편으론 현실적이다. 주도권을 쥔 쪽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젠더권력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 예로 위 사진의 남성 부하직원은 자신의 여성 상사에게 용의자한테 이성적인 감정을 느껴 편파 수사하는 것 아니냐는 무례한 질문을 한다. 이 맥락 없이 희롱하는 질문은 상사와 부하로 권력 계층이 나뉘었음에도 휘두를 수 있는 남성의 젠더권력을 보여준다. 에이미의 마지막 동앗줄, 전 애인 데시 콜링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에이미가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준 것처럼 보이던 관계도 사실은 자신의 욕구에 맞춰 감금하고 다이어트 시키며 권력을 휘두른 것이었다. 결국 에이미는 그를 처단하고, 자신을 휘두를 수 없는 약점을 잡힌 닉에게 돌아가고자 마음먹는다.


수정됨_6.jpg
 


에이미가 돌아오자, 드디어 모든 권력이 뒤바뀐다. 에이미 배속의 아들은 닉의 아버지 콤플렉스를 불러일으키고 끝내 자신의 처지에 순응한다. 이러나 저러나 닉이 가장 자신다워지는 순간은 바로 아내 에이미와 있을 때뿐이기 때문에 그녀를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잠든 사이 에이미가 일을 꾸미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편히 잠들지 못한다. 언제나 몇 발 앞서가는 아내가 자신을 나락 끝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닉에게 너를 해지진 않는다는 에이미의 말은 뒤바뀐 권력과 힘을 느끼게 한다. 이로써 에이미의 불면증은 닉에게로, 닉의 모든 권력은 에이미에게로 옮겨간다.

 

 


'나'를 찾아줘



에이미를 지켜보는 관객인 우리도 '진짜' 에이미를 알 수 없다. 에이미가 꾸며낸 7년간의 일기장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닉이 정말 에이미를 밀친 것인지, 에이미가 꾸며낸 망상인지 그것도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에이미의 치밀한 계획은 독자와 관객까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영화를 지배하는 에이미의 내레이션은 내내 진실이라는 신뢰감을 주었지만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기준이 불분명해지면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게 된다.



"우리가 지금껏 했던 거라고는

서로에게 분노하고,

서로를 조종하려 하고,

서로에게 상처줬던 게 전부잖아." - 닉


"그게 결혼이야." - 에이미



사실 에이미는 순간마다 닉에게 기회를 주었다. 결혼 후 5년 동안 보물 찾기라는 방식을 통해 남편인 닉에게 보물, 즉 진정한 '나'를 찾아달라고 외쳤지만 돌아온 것은 남편의 무관심과 외도였다. 그녀가 진실로 찾기 바랐던 것은 쪽지 따위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사랑과 '자아'였을 것이다. 그러다 사랑에 회의를 느끼고 각성한 에이미가 저지른 일 속에서 그녀의 '자아'가 발현된다. 바로 수동적이고 쿨한 아내에서 벗어난 주체적이고 똑똑한 '에이미'였다. 그것은 너무 날것이라 살인도 서슴지 않지만, 처음으로 만끽하는 자아  실현 앞에선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자아는 결국 가정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한다. 자살을 해 닉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은 더 이상 의미 없는 도피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회 속으로 다시 발을 들이는 에이미는 더 없이 이성적인 인물이다. 영화의 단면만 본 사람들은 단순히 '정신 나간 와이프의 막장 치정극'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균등하지 않았던 부부의 위치는 에이미가 살인까지 저지른 후에야 움직였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다면 이 작품은 더없이 현실적이고 냉랭하다.

'나'를 찾겠다는 에이미의 외침은 누군가에겐 공포로, 사이다로, 현실로 비친다. 아니면 이전에 보았던 누군가의 감상평처럼 -어떤 의미로든- 비혼을 다짐할 수 있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더 이상 순종적이길 거부하고 사회가 정한 틀을 깨려는, 여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행 중에 <나를 찾아줘>는 꽤 도움이 될 같다. 모든 여성이 진짜 '나'를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나를 찾아줘."



[장재이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