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질투는 나의 힘 [기타]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글 입력 2018.12.15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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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가씨> 속 히데코는 숙희를 가리켜 말한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스크린이 올라간 뒤에도 이 문장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영화 속 두 사람의 관계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수식어가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문득 픽 웃음이 났다. 나에게도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너 때문에 모든 게 어긋나버렸어, 싶다가도 너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할 수가 없는 그런 존재 말이다. 나를 가장 웃게 하는 동시에 가장 울리는, 나를 힘없이 나풀대는 설렁줄로 만들어 버리는 그 존재의 이름은 '질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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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내 질투심은 역사가 길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나를 지배하고 조종해왔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리기 시작한 이래로 내 머릿속 사령탑의 주인은 질투심이었다. 기억하는 최초의 질투 대상은 남동생이다. 한자도 내가 더 많이 알고, 말도 내가 더 잘 듣는데 할아버지는 늘 남동생을 더 예뻐했다. 할아버지가 시킨 대로 한문을 쓰고, 하모니카를 불던 것은 나였지만, 육포라든가 가래떡 같은 간식은 모두 남동생의 몫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내가 남동생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승패가 뻔한 게임.


그때서부터였을까? 나는 조금이라도 넘볼 수 있는 대상을 만나면 무조건 이겨먹으려고 들었다. 나한테 없는 좋아 보이는 것들은 모두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더 똑똑하고 싶고, 더 성적을 잘 받고 싶고, 더 예쁘고 싶고, 더 잘 놀고 싶고, 더 재밌고 싶고, 더 착하고 싶고, 더 잘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을 하나하나 줄을 세운 다음, 마치 흡혈귀가 피 빨아먹듯 그 애들의 강점을 흡수해나갔다. 다 빨아먹은 뒤 패배자들의 시체를 회전 초밥 빈 접시처럼 쌓아올릴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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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그 줄의 기준은 얼마나 잘 노느냐였다. 소심하고 간이 작은 나는 저 앞줄의 애들은 질투하지도 못했다. 그저 나보다 몇 발자국 더 앞서 나가있는 애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처음으로 교복을 줄여보고, 머리에 고데기를 하고, 틴트를 샀다. 노는 애들하고 친구가 되겠다고 없는 공통 관심사도 만들어내며 계획적으로 접근했다. "내가 쟤보다 더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데 왜 내가 아니라 쟤네를 선택해?" 이 마음 하나면 난 만들어내지 못할 게 없었다. 공통 관심사는 식은 죽 먹기요, 깡에 거짓말에, 나중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지경에 이르니 조물주 부러울 게 없었다. 나는 결국 내가 원하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고, '강자'라는 자리가 주는 즐거움에 취해있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가서는 그 줄의 기준이 '성적'으로 바뀌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좋은 성적'이 주는 권력은 엄청났다. 우리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사람은 선생님들이었고 선생님들의 잣대는 오로지 '성적'이었다.  똑같이 지각해도, 똑같이 숙제를 안 해와도, 똑같이 수업 시간에 잠을 자도, 누구는 예쁨 받는 아이가 누구는 미움받는 아이가 될 수 있었다. 고등학교의 메커니즘을 일찌감치 깨달은 나의 질투심은 채찍을 휘두르며 나를 몰아붙였다. 마치 영화 <위플래쉬> 속 플렛처 교수처럼 말이다. 최고의 드러머를 키우기 위해 학생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플렛처 교수의 지독한 교육 방식을 쏙 빼닮았다. 나는 채찍질 당하며 한 칸 한 칸 사다리를 밟고 올라갔다. 반 20등에서 11등, 1등, 그리고 전교 2등까지.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은 내 질투심의 높은 콧대를 꺾어 완전히 때려눕힌 뒤 조용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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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열아홉 살, 그러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다. 당시의 나는 반에서 따놓은 1등이었다. 그리고 나의 친구 K는 참 열심히 하는, 하지만 늘 순위권 밖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였다. 당연히 K는 나의 질투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K와 잘 지냈다. 좋은 친구 사이였다. 함께 독서실에서 새벽 2시까지 자리를 지키며, 졸면 깨워주고 맛있는 것을 나눠 먹는 좋은 공부 메이트. 하지만 사건은 5월 사설 모의고사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여전히 1등이었다. 하지만 K의 등수가 바뀌어 있었다. 15등 언저리를 맴돌던 그 애는 3등을 했다. 3등. 나는 그 숫자를 오랫동안 곱씹었다.


그리고 다가온 6월 모의고사. 시험 전날 우리는 독서실에서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는 학생이었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2시가 되었고 총무는 이제 그만 나오라며 방문을 두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K는 자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깊이. 나는 몇 번 K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애는 미동도 않고 잤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나를 그대로 발걸음을 돌리게 만든 건 '질투'였다. K의 성적표에 찍혀있던 3등. 나와 K를 동시에 교무실로 불러낸 담임 선생님. 그는 나더러 자극 좀 받아야겠다며 나무랐고, 한참이나 K를 칭찬했다. 다음엔 1등 해라. K의 어깨를 두드리던 담임 선생님의 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손은 내 등을 떠밀었다. 그대로 나가라고, 잠든 K를 두고 그냥 집에 가버리라고. 그렇게만 하면 내일 6월 모의고사는 걱정 없을 거라고. 나는 가방을 챙겨 독서실을 그대로 빠져나갔다. 총무에게는 남아있는 학생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잠들 수 없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갈 때까지도 내 머릿속은 온통 K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집에 갔을까. 어떻게 됐을까. 학교에 올까? 갇혔으면 어떡하지. 두려움과 죄책감에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교실문을 열기가 무서웠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나를 반긴 건 평소와 다름없는 K의 뒤통수. K는 "나 어제 큰일 날 뻔했어" 호들갑을 떨면서 나에게 달려왔다. 그 애의 얼굴을 보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다행이다'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난 수능을 망쳤다. 그간의 부정적인 마음을 되돌려 받기라도 하듯이, 정말 보란 듯 미끄러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나에게 좋은 대학에 갔다며 어깨를 두드려줬지만, 나는 그때마다 부끄러웠다. 나보다 성적이 낮았던 친구들이 논술로 더 좋은 대학에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속이 타들어갔다. 그건 비유가 아니라 묘사였다. 속이 뒤집히고 온몸이 아팠다. 질투가 나를 죽여가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질투에 잠식당한 영혼은 자기 자신을 뜯어먹고 결국 파멸로 이끈다. 질투심은 그 숙주의 불행과 열등함을 영양분 삼아 자라나기 때문이다.
       


오 나의 군주시어 질투를 조심하소서!

자신이 먹고사는 고기를 조롱하는

초록 눈의 괴물일지니...


- 셰익스피어 오셀로 中



난 아프고 있었다. 질투가 세워놓은 링 위에서 나는 두드려 맞고 온몸에 멍이 들어 아파하고 있었다. 난 생존을 위해서라도 질투를 죽여야만 했다. 질투를 거둬서 그 높은 콧대를 부러트리고 밟아줘야 했다. 그래야 숨을 쉴 수 있으니까.


대학 생활을 하고 숨통이 조금 트일 무렵, 난 생각했다. 내가 손에 쥔 것들은 정말로 보잘 것이 없을까? 난 정말로 내가 가진 것들을 마음에 안 들어 할까? 답은 '아니오'였다. 난 내 대학을 사랑했다. 아름다운 캠퍼스에, 인문학을 중시하는 교풍 덕에 많은 고전을 접할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좋은 교수님을 만나 스무 살인 내가 에세이를 자가출판하는 경험도 할 수 있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도 했다. 막상 대학에 들어오니 내가 그토록 신성시하던 대학 서열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난 도대체 무엇을 선망하고 무엇을 좇았던 걸까. 난 내 손에 쥔 것들은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고,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며 점수를 매겨왔다. 마치 내가 가진 것들을 싫어해야만, 미워해야만 발전하고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듯이. 그렇게 계속해서 나 자신을 깎아내리고 헐뜯고 미워하고 싫어했다. 기형도 시인의 말대로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 그 못난 질투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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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질투는 마냥 나쁜 것은 아니다. 피카소가 마티스를 질투하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서로를 시기하며 계속해서 발전하고 나아갔듯이, 질투가 있었기에 나는 계속해서 내 열등한 부분을 키우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엄마보다 더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친구처럼 많은 영화를 본 사람이 되고 싶어서 영화에 취미를 붙였고, 일기를 쓰는 누군가의 모습이 멋져 보여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있다. 부정적인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 늘 평화로운 친구의 사교성이 부러워서 그 애를 흉내 내다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살아보기도 했다. 질투가 모는 대로 달리며 내가 얻은 것들은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되었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그의 지독한 교수법에 의해 얻게 된 것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질투는 나를 파괴했고 동시에 나를 살게 했다. 내가 나 자신을 증오하도록 만들었으며 동시에 나 자신을 사랑하게 한다.


나는 여전히 질투심이 많다. 애써 잠재워 놓았을 뿐 언제 다시 터져 나올지 모르는 휴화산이다. 나는 여전히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어 하며, 가장 예쁘고 싶고, 더 깊이 있고 섬세한 감정들을 느끼고 싶어 한다. 더욱 많이, 더욱 깊이 이해하고 싶다. 글을 잘 쓰고 싶다. 매력적이고 싶다. 욕망의 전차는 여전히 달리는 중이다. 속도가 느려졌을 뿐.


아마 나는 계속해서 이 질투를 떠안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경쟁하고, 비교하고, 나의 열등한 부분을 찾아내고. 하지만 순기능이 발휘되는 그 적정 지점을 찾아낸다면, 그래서 그 선로만을 달린다면 내 욕망의 전차는 무사히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줄지도 모른다. 나조차 이름을 모르는 그 알 수 없는 목적지로 나는 여전히 달려가는 중이다. 이 징글징글한 구원자, 나를 언제 물어뜯을지 모르는 이 충성스럽고 사나운 개와 함께 나는 여전히 불편한 동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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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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