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존감이 낮은 당신을 위한 뮤지컬 넘버 [공연예술]

시라노, 존 도우, 헤드윅
글 입력 2018.12.15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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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 하나 있다면, 자존감을 지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지"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높은 자존감의 방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뿐, 타인과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자존감은 곧장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유난히 바빴던 올해 이 순환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자존감은 어느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나를 잠식하는 감정으로부터의 회복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자신감이 넘칠 수는 없다. 따라서 어느 순간 낮아진 자존감으로부터 얼마나 빠르게 회복하느냐가 내 삶의 질을 결정한다. 내 경우에는 공연이 도움이 됐다. 부정적 감정들이 나를 잠식하려고 할 때면, 잠시 눈앞에서 펼쳐지는 서사의 흐름에 모든 생각을 맡겨 두었다. 그러다 보면 어떤 공연은 잠시 수많은 감정들을 잊게 해주었고 어떤 공연은 밀어 두었던 감정들을 증폭시켜 주기도 했다.


소용돌이치는 복잡한 감정을 잠시 잠재우고 싶은 사람과, 올해의 나처럼 낮은 자존감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내게 도움이 되었던 뮤지컬 넘버 세 가지를 추천하려고 한다.




#1. 뮤지컬 <시라노>, 거인을 데려와



 



자유로운 불꽃처럼

독수리 날갯짓처럼

위대한 거인들과 맞서리라



뮤지컬 ‘시라노’는 추한 큰 코 때문에 사랑하는 이 앞에 당당히 설 수 없었던 시라노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시라노는 사랑하는 록산 앞에 당당히 서지 못한 채로, 록산을 사랑하는 크리스티앙의 편지를 대필해 주며 둘의 사랑이 커지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한다.


언뜻 보면 시라노는 자신감 없고 소극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정의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오만한 시인이자 검객이다. 정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칼부터 빼 들고, 그 상대가 거인일지라도 불꽃처럼 맞설 것이라고 노래한다. ‘튀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치부하던 나에게 거인을 데려오라며 당당히 노래하는 시라노의 태도는 조금 이질적이고 낯설게 다가왔다. ‘전형적인 서양 고전 속 주인공’ 같다고 느낀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던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이 이질감이 싫지 않았다는 것이다. 굽히고 참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내게 시라노의 노래는 가끔은 오만해져도 된다고, 당당하게 용기를 내라고 격려해주는 것 같았다.


시라노의 말처럼 ‘승리도 패배도 다 내 몫이니’, 굽히고 눈치 보는 것 보다는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존감을 지켜내는 것이 내게 더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2. 뮤지컬 <존 도우>, 연설





세상은 우리들에게 말하죠

너는 나약한 사람일뿐

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하지만 이 세상은 이름 없는

존도우들이 이뤄낸 기적이죠

우리들이 해냈죠



이 작품은 경제 대공황이 벌어져 수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고 거리에 나앉은 1930년대 뉴욕에서, 한 존 도우의 연설이 불러일으킨 기적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전직 야구선수 윌러비는 세상의 수많은 존 도우들을 대표하여, 사회가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불의에 항거하라는 내용의 연설을 한다. 존 도우를 가장한 윌러비의 연설 이후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사회 구조에 분노하고, 서로 다른 존 도우들의 진짜 이름을 부르며 연대한다.


이 작품에서 ‘존 도우’는 주인공의 이름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철수’와 ‘영희’처럼 흔한 이름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름 없는 존 도우들이 분노하고 연대하는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다. 지금도 사회 구조의 부조리함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힘없는 개인의 능력을 탓하기보다는, 그 개개인이 다 같이 연대하고 일어서는 이 작품 속의 수많은 ‘존 도우’들을 보며,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던 과거의 나에게 ‘네 탓이 아니야’ 라는 뻔한 위로를 건네고 싶어졌다.




#3. 뮤지컬 <헤드윅>, Midnight Radio





넌 하늘 저편 밝은 별

들려오는 소리 Midnight Radio

넌 외로운 세상 지친 영혼

지지 말아 포기 말아

그래서 우린 Rock & Rollers



뮤지컬 ‘헤드윅’은 성전환 수술의 실패 후, 남자도 여자도 아닌 상태에 있게 된 헤드윅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그리고 이 ‘Midnight Radio’라는 넘버는, 헤드윅이 혐오스럽다고 느꼈던 자신의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후 본모습을 가리고 있었던 모든 겉치장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부르는 이 작품의 마지막 넘버이다.


어떤 겉치장도 없는 내면의 초라한 모습을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외부의 어떤 기준에도 속하지 않는 나의 맨몸을 세상에 드러낸다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이겨낸 헤드윅의 ‘Midnight Radio’에는 유독 특별한 울림이 있다. 생각과 감정이 많아지는 밤이면, 이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Rock & Rollers’에게 전하는 헤드윅의 ‘Midnight Radio’를 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황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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