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잠들지 못하는 밤, 일어나지 못하는 밤의 여행 [공연예술]

글 입력 2018.12.17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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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기묘여행.



1.



살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가 살인범을 면회하기 위해 떠나는 1박 2일의 여행을 그린 연극이다. 여행의 참여자는 15살에 명을 달리 한 카오루의 부모와 살인범 아쯔시의 부모, 보호감찰 중이던 살인범에게 어머니를 잃은 자원봉사자와 이 여행을 기획한 사형집행인 출신의 테라하라 씨, 총 6인으로 이루어진다. 사건 속 인과관계와 과실책임 등을 모두 떠나, 이 여섯 명은 모두 살인이라는 행위가 불러온 상처를 안고 있다. 카오루의 죽음 이후 가정은 파탄이 났고, 카오루의 아버지는 아쯔시를 죽여 딸의 원한을 갚고자 한다.


어려운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보고 난 뒤에도 여전히 고민이 많은 이야기다. 분명히 연극의 첫장면부터 끝장면까지, 거의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로 누구보다 몰입해서 봤건만, 알 수 없는 이 찝찝함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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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극은 살인이란 사건에서 뻗어나가는 화살표를 한데 묶어 얽어놓는다. 이 연극이 궁금했던 이유는, 가해자의 부모와 피해자의 부모 사이에는 어떠한 직접적인 책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서는 화살표의 시작과 끝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법적, 도의적 계산이 끝난 이후의 그들의 삶, 살인이 할퀴고 간 상처를 하나 하나 꿰매어 봉합하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회복의 과정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피해자 카오루와 가해자 아쯔시는 다르다. 그들은 각각 화살표의 시작과 끝에 서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 사이 화살표는 결코 어정버정 흐려져서는 안 된다.

 

카오루가 아쯔시를 생각할 때, 그리고 결국 살인에 실패한 아버지를 비난할 때, 카오루는 죽음의 고통과 공포심, 증오, 놓지 못하는 삶에 대한 미련에 몸부림친다. 관객들은 당연히 카오루의 아픔에 공감하며 눈물짓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순간 순간 땀에 젖어 벌벌 떨고, 피해자의 부모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아쯔시, 죄송하다고 외치는 아쯔시의 모습 역시 연민을 자아낸다. 관객이 아니라면 최소한 카오루의 부모에게만큼은 그렇다.


아마 연극의 하이라이트일 두 번쨰 면회 장면에서 주제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카오루의 부모, 아쯔시의 어머니, 아쯔시, 이렇게 4명이 대면하는 장면이다. 땀을 흘리며 떨던 인간 아쯔시의 모습을 기억하고 차마 아쯔시의 인형도 찌르지 못하던 카오루의 어머니는 아쯔시에게 울며 외친다. 카오루를 돌려주세요, 라고.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과 분노, 살인범인 자식의 사형을 앞둔 부모의 처절함과 죄책감, 자신의 행위가 불러온 현실을 피부로 느끼는 고통. 모두가 오열하고 소리친다. 이 혼파망 속에서만큼은 우리는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이 거대한 슬픔에 함께 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울면서도 회의적인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왜 이런 장면을 연출한 걸까.

 

카오루가 죽을 당시의 감정은 생생하게, 당사자의 입으로 서술된다. 그러나 아쯔시가 살인을, 왜, 어떤 경위로 저질렀는지는 서술되지 않는다. 극 중에서 범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살인이라는 범죄 자체가 어떤 변명을 하든간에 옹호될 수 없는 범죄임을 시사하는 장치일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 본다.   살인사건이 연일 보도되는 요즘은 살인이 조금 무거운 가쉽 정도로 치부되기 쉬우니 말이다.

 

아쯔시는 살인을 했다.


카오루의 대사로 미루어보건대, 아마도 칼로 찔러 죽였을 것이다.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흉기의 종류와 크기, 공격당한 신체 부위, 흘린 피의 양, 상처를 입고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기까지 흐르는 시간, 심지어는 사건 당시의 날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수에 따라 피해자는 살 수 있을 수많은 가능성을 스쳐지나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공격이라 하더라도 죽음에 이르게 하려면, 다량의 출혈 뿐만 아니라 주요 장기에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심각한 손상을 입힐 만큼 깊숙히 찔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두 번, 세 번, 혹은 그보다 더 많이••• 이미 피는 웅덩이를 이루고 피해자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 이르러도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발작을 계속한다. 그러나 멈추지 말고 찔러야 한다. 이게 바로 아쯔시가 카오루에게 한 짓이다.

 

살인은 실제로 '성공'하기도 어렵지만,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도 어려운 범죄다. 일생 동안 수많은 생명을 도륙하며 우리는 살아가지만, 인간을 살해하는 행위는 유달리도 큰 범죄로 여겨진다. 도덕이라든가 우월한 만물의 영장 어쩌고 하는 것보다는, 공동체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기적 이타심의 결과일 것이다.


연극을 관람하기 전, 프리뷰를 쓸 때 주변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한 적이 있다. 법은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가,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후자라고 답했다.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고민해보아도 역시 기본적인 도덕에 반하는 중범죄의 경우 정서적인 부분을 배제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법의 목적이 교화보다는 처벌에 있다고 가정하고, 당신이 사형집행인이며 곧 사형을 앞둔 죄수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악한 사람이라면(예시로는 우리 세대 때 가장 유명한 아동성폭행범을 들었다) 당신은 사형을 집행할 수 있을까? 앞서 사형제도의 존치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람들까지도 이 질문에는 망설이며 못할 것이라고 답했다. 아무리 '죽일 만한' 사람이어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이토록 어려운 살인을 저지르고 난 가해자마저도 살인이라는 행위가 가져온 상처 아래 하나가 되는 모습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어렵다기보다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화살표의 시작과 끝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매듭을 풀기는 커녕 얽힌 매듭을 붙잡고 한탄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무대 위에 등장시켜놓고 살인이 불러온 상처만을 붙잡고 한데서 울고 있는 것은 내게는 어떤 의미로 살인에 대한 '낭만적인' 감상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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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느 정도 예상한 대로, 연극 속에서 더 이상의 살인은 없었다. 극 중 카오루의 아버지는 아쯔시의 인형을 망설임없이 찌르고, 내내 슬픔과 분노와 그리고 살의를 내비치지만 결국 아쯔시를 마주했을 때, 그를 죽이지 못한다. 면회실 내에 무기를 들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리라. 여행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잠들지 못하는 밤과 살의로 들썩이는 슬픔을 안고 있으면서도 아버지는 카오루를 보내주며 아빠는 할 수 없다고 울고야 만다. 그가 아쯔시를 용서한 것도 역시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살인을 저지를 수 없었다. 아쯔시를 직접 본 순간 벌벌 떨고 눈물 짓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에 순간 연민을 느꼈을 수도 있고, 재판 후 살인을 준비하던 3년의 기간동안 쌓아온 살인귀, 악마 아쯔시의 이미지와 인간 아쯔시의 실제 모습 간의 간극에 허탈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복수만을 바라며 하루 하루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것대로 두고, 벌어진 상처를 하나 하나 꿰매 가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의지.

 

어렸을 때, <오두막>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주인공은 그다지 독실하지는 않지만 모태 크리스천인 아내를 따라 주말마다 교회를 가기는 하는 평범한 가장. 그러나 평범한 그들의 삶에, 카오루의 가정에서처럼 비일상이 끼어들고야 만다. 막내딸이 연쇄아동강간살해범에게 납치돼, 한 오두막에서 피에 젖은 원피스만을 남긴 채 살해당한 것이다. 신이 있다면 우리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는가? 주인공은 어느 겨울 밤 오두막에서 딸을 따라 죽기로 한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쓰러진 다음 날 아침, 성부, 성자, 성령이 예상 외의 모습을 한 채 그에게 찾아온다. 잘생긴 백인 남성이 아니라 흑인 아주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과 함께 일주일을 보내며, 그는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


용서라는 것은 내가 미워하는 그의 모든 죄가 사라지고, 그의 자식과 나의 자식이 한 데 모여 뛰놀아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그의 목을 조르고 있는 나의 손을 풀어, 내 숨통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용서는 나약함의 표상이 아니라, 나를 가득 채운 분노와 증오마저도 풀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삶에 대한 의지라는 것. 카오루의 아버지가 아쯔시를 용서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는 살인을 거부함으로써 생을 포기한 아쯔시와는 다른 길을 택한다. 연극이 아쯔시를 죽이지 못하는 카오루의 부모를 통해, 살인이라는 범죄가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그래서 오히려 아쯔시의 생명까지도 존엄한 하나의 생명이므로 살인을 거부한다고 이야기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만, 나는 생명 자체에 대해서보다는 삶에 대한 의지가 더욱 숭고하게 다가왔다.

 

잠들지 못하는 아빠보다, 일어나지 못하는 내가 더 불쌍하다는 카오루. 아마 카오루는 아버지의 환상일 것이다. 살의를 끊임없이 일깨우는 존재. 카오루가 하는 이야기는 결국 아버지의 목소리겠지. 카오루가 더 불쌍하고 가슴이 아프고 여전히 분노로 잠 못 이루면서도, 살인하지 못하는 카오루의 아버지는 가엾기보다도 대단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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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나 이쯤에서 또 한 가지 나를 삐딱하게 만든 것은, 이야기가 편향적이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어떤 집단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면 그 집단의 가장 끔찍한 인간마저도 우리는 포함해야만 한다. 가령,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 피해자가 선한 인물이든, 악한 인물이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녀든,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타락한' 여자든지간에 상관없이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가해자가 악마가 아니라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입각해서, 그의 생명을 우리 인간의 손으로 끊어낼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면, 그 대상집단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 비교적 양심적으로 보이는 죄수 뿐만 아니라 중범죄자 중에서도 가장 역겨운 부류까지도 모두 포함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납득할 만한 가정사나 불우한 어린시절 따위의, 우리 모두의 사회적 책임 없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가장 악랄한 사람까지도 말이다.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절대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살인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감정선을 따라가게 하기 위해서, 무대 위에 등장하는 가해자는 아버지가, 그리고 우리가 비교적 동정하기 쉬운 인물로서 그려진다. 물론 살인범이 모두 악귀의 모습은 아니겠지만, 어쩐지 연극이 편법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땀에 흠뻑 젖어 사죄하며 죽기만을 바라는 비쩍 마른 청년을 보면, 사죄할 줄도 모르는 악랄한 살인범이었다면 어떻게 할 건데? 라는 삐닥한 물음이 떠오르고 만다.


연극은 우리에게 잊혀진 인생을 보여주겠다고 했지, 정답을 알려주겠다고 한 적은 없다. 물론 나 역시 정답을 기대한 적도 없다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위해서 일부러 논쟁거리가 될 만한 지점은 시작부터 외면하는 것 같아 흐름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5.



아쉬운 점만을 길게 늘어놓았지만, 사실 연극은 전반적으로 정말 마음에 들었다.


무대를 끌고 가는 배우들의 힘도 그렇거니와, 종이 벽을 통해 살인이 할퀴고 간 상처를 표현한다든가, 카오루와 아버지의 감정이 극대화되는 순간 흩날리는 붉은 종이꽃잎들 등, 단순한 무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연출도 기억에 강하게 남는다. 코러스 배우들의 인상적인 연기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는데, 사실 코러스 배우들의 장면을 다시 보기 위해 한 번 더 관람할 예정이다. 기대에 어긋나 아쉬운 부분이 많았지만, 기대한 바가 있었던 만큼 실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 더 떠나게 될 기묘한 여행은 어떨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생각해 볼 지점들을 제시해주어 고맙고 인상적인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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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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