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살인자 부모와 피해자 부모가 떠난 기묘여행

강력 스포가 있습니다.
글 입력 2018.12.17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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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에 대한

강력 스포가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일본과 중국을 무시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우스갯소리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연극 <기묘여행>을 보고 일본의 수준 높은 스토리텔링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콘텐츠가 많지만, 일본 원작 연극의 <기묘여행>은 정말 입이 벌어지게 만드는 콘텐츠였다. 재밌고, 몰입도 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순식간에 90분이 흘러갔고, 커튼콜이 시작되고 나서야 앞으로 잔뜩 숙였던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아주 기묘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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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여행>은 살인자 부모(아쯔시 부모)와 피해자 부모(카오루 부모)가 함께 사형이 확정된 아쯔시를 면회하기 위해 기묘한 여행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다. 그들을 이끄는 가이드 같은 존재는 전 교도관 테라하라와 의견 조율의 역할을 하는 가쯔라기. 그리고 이 기묘한 여행을 더욱 기묘하게 만드는 이유는, 살해 당한 카오루도 함께 여행을 떠나기 때문이다.(강력 스포)

 

처음엔 카오루가 아빠에게만 보이는 유령 같은 존재인 줄 몰랐다. 그냥 죽은 카오루의 동생이겠지, 싶었다. 그런데 자꾸 아빠의 행동을 반복하고, 아빠하고만 대화하는 게 수상해질 찰나, 그녀의 이름이 카오루임이 드러난다. <기묘여행>에서 카오루는 카오루 아빠의 심리를 대변하는 인물로 활약함과 동시에 살해 당한 사람의 아픔을 현실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에겐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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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여행> 속 등장인물 모두에게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아쯔시 부모도, 카오루 부모도, 테라하라씨도, 가쯔라기씨도. 우유부단한 듯 희망을 품으려고 하는 아쯔시의 아빠도, 불안해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아쯔시의 엄마도, 카오루의 복수를 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망설이게 되는 카오루의 아빠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하지만 결국 터져버리고 마는 카오루의 엄마도 모두 이해가 된다.


그들의 감정선은 초반부에 열심히 깔아둔 복선 덕분에 물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교도관으로써 사람을 죽여본 경험 때문에 충격을 받고 사형제도의 반대 편에 선 테라하라나, 수감자였던 사람에게 살해당한 어머니를 보고 대화로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가쯔라기도 그럴 듯 했다. 아무래도 작가의 사상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인물이 테라하라같은데,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내 권리는 어디 있느냐’고 외치던 그에게서 간절함을 엿볼 수 있었다. 가해자인 아쯔시 역시 잠깐이지만 엄청난 존재감으로 그의 혼란스러움, 죄책감, 두려움 등의 감정을 확실히 드러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 스스로 외쳐야 했던 “나는 너무 불쌍해”



단 한 명, 직접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소리칠 수 없었던 등장인물이 있다. 극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카오루. 그녀는 아쯔시에게 살해당한 아픔과 억울함, 슬픔, 분노를 그대로 분출한다. 하지만 그것은 카오루의 아빠 외에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대신 복수를 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아빠는 결국 마지막 순간에 아쯔시를 살해하는 것을 포기한다. 카오루는 결국 스스로가 너무 불쌍하다고 소리치며 감정을 폭발시킨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말이 있다. 만약 죽은 자가 말을 할 수 있다면 가해자에 대해, 자기가 죽은 순간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를 현실적으로 표현해냈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가끔 현실 살인 사건에서 피해자 부모가 가해자를 용서하며 말한다. “죽은 우리 00도 너를 용서했을 거야.”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내가 피해자였다면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았을 텐데. 이런 현실적인 생각이 카오루를 통해 드러남으로써 더욱 균형 잡힌 스토리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카오루 배우 분이 연기를 너무 잘하셔서 소름 돋았다. 다른 배우 분들도 물론 너무너무 잘하셨지만.


 

 

그들의 여행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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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아쯔시의 살해에 실패하고 카오루가 아빠 곁을 떠나며 말한다. “그럼 이번 여행은 여기서 끝이네. 다음에 또 같이 여행 가자.” 피해자 가족의 여행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이고 반복될 것이다. 몇 번이고 아쯔시를 죽이고 싶고, 하지만 죽일 수 없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또 딸 카오루가 생각나면 찢어지는 분노와 아픔에 아쯔시에게 복수하고 싶을 것이다. 결론이 어떻게 날 지는 모른다. 아쯔시가 사형당할 수도 있고, 카오루의 아빠가 아쯔시에게 복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지금은, 등장인물 모두 ‘사는 쪽’을 택했다.

 

<기묘여행>은 이처럼 피해자, 가해자, 피해자 부모, 가해자 부모,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인물 등 다양한 측의 입장을 균형 있게 드러내며 사형은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철학을 조심스럽게 내비친다. 아쯔시의 엄마는 사형선고를 받아들이려는 아쯔시에게 눈물로 항소를 권유하며 말한다. ‘죽으면 속죄를 할 수 없으니 죽어서는 안된다’고.


*


갈라진 길처럼 연출한 무대 배경, 소름 돋을 정도로 무서웠던 몇 장면, 그럼에도 중간중간 넘쳤던 위트와 에너지, 분위기를 반전시키던 음악과 조명 등 모든 요소가 거의 완벽하게 배치된 연극이었다. 극장을 나오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좋은 연극을 봤다는 만족감보다 많은 생각에 복잡해진 심란함이 엿보였다. 그래서 <기묘여행>은 더 좋은 연극이었다.



[김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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