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죽일 수 없는 마음에 대하여

연극 '기묘여행' 리뷰
글 입력 2018.12.19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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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한 부부는 딸이 살해당하면서 피해자의 가족이 되었고, 다른 부부는 아들이 살인자가 되며 가해자의 가족이 되었다. 당연한 듯 그들을 지탱해오던 것이 무너지고, 깊이를 모르는 고통 속에 빠진 네 사람은 기묘한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의 목적지는 같지만, 그 속마음은 저마다 다르다. 한 사람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하고, 다른 한 사람은 살리고 싶어한다. 관객은 그 상반된 목적을 알면서부터 마음이 불편해진다. 게다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가 함께 교도소에 있는 가해자를 면회하러 '여행'을 떠난다는 상황설정 자체가 다분히 일본스러운 정서라서 몰입도를 떨어뜨릴 법도 하다. 모든 불편함과 낯섦을 메꾸며 무대 위 이야기를 납득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훌륭한 연출이다. 연극은 인물들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보다 그들이 겪는 고통 자체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며 사건의 앞뒤 맥락을 따지기보다는 사건의 결과로 남겨진 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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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루를 잃은 부모의 슬픔은 과장된 감정표현으로 나타나는 대신 노래를 부르다가, 여행 짐을 싸다가 일상적인 순간에 덤덤하게 드러난다. 심각한 장면에서 카오루는 그들 곁에 머물며 농담을 던지지만 카오루의 어머니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카오루는 늘 무대에 있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카오루의 부모가 느끼는 부재는 관객에게 더 크게 다가온다. 불편한 사실이지만, 고통을 겪는 건 아츠시의 부모도 마찬가지다. 아츠시 어머니는 시종일관 불안한 정신상태를 보낸다. 반면 상대적으로 차분한 아츠시 아버지의 모습에서 관객은 본인 아들이 저지른 일에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는지 의문이 생기고 심지어는 반감도 든다. 그 의문은 아츠시가 범행을 저지르기 1년 전쯤 아츠시의 새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해소된다. 그 역시 어떤 면에서는 아무런 예고를 받지 못한채 사건에 휘말린 사람이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 물론 가해자의 가족이 겪는 고통이 불편하지 않게 다가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이 겪을 고통에 대해서도 한번 더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무대 배경으로 있던 종이는 극 초반부 카오루의 아버지가 여행 짐으로 각종 연장을 챙기는 장면에서 섬뜩한 소리와 함께 찢어져버린다. 그리고 이 찢어진 배경은 극이 끝날 때까지 한번도 원래대로 돌아가거나 다른 것으로 교체되지 않는다. 이 배경은 네 명의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영영 돌이킬 수 없음을. 어떤 것은 찢어진 채 영원히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객은 연극을 보는 내내 피해자와 가해자의 고통을 저울질하며 고통의 정당성을 의심하지만 끝을 향할수록 그 저울질은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고통이 정당하든 그렇지 않든 틀림없이 존재하며, 그로 인한 상처가 무대 배경처럼 다시는 원상복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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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찢어진 것 앞에서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게임에서는 무찔러야 할 '최종보스'가 존재한다. 그를 물리치면 게임 속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때로는 가장 쉬운 길이 최선의 길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 쉽게 생각하자면 사람을 죽인 사람은 그 죗값으로 목숨을 잃는다 해도 억울할 게 없다. 게임에서는 무찔러야 할 '최종보스'가 존재한다. 그를 물리치면 게임 속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가해자가 인간이 아니라 악마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그를 죽임으로써 모든 게 끝날 수 있다면 모든 일이 참 간단하고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가해자인 아츠시는 뇌 속에 든 것은 다를지 몰라도 같은 살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도 불구하고 죽지만은 않기를 바라는 어머니가 있다. 적을 죽이면 모든 게 원상복구되고 행복이 찾아드는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는 되찾는 것 없이 잃어버리는 것만 늘어난다. 누군가의 죽음은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죽음 뒤에 이어질 타인의 더 거대한 절망과 슬픔이 존재할 뿐이다. 카오루의 아버지가 그를 죽일 수 없었던 까닭은 그가 충분히 나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를 찌르면 흘러나올 피가 카오루의 그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피가 카오루를 부활시킬 수 있다면 카오루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그를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음을 그도 이미 안다. 아츠시를 죽이는 상상 속에서 딸의 얼굴을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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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감히 피해자에게 가해자도 사람이라는 걸 이해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고 품으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 평생 메꾸어지지 않을 구멍이 난 사람에게 그런 요구는 폭력이다. 아츠시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든, 얼마나 많이 '죄송합니다'를 외치든 그가 살인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변해서도 안 된다. 이 연극은 속죄와 용서에 대한 게 아니다. 만약 카오루의 아버지가 정말로 아츠시를 죽였다 해도 관객은 기꺼이 그의 편에 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살의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끝내 아츠시를 죽일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그 마음은 카오루의 아버지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절망이다. 잠들지 못하는 아빠보다 일어나지 못하는 자신이 훨씬 더 불쌍하다고 절규하며 떠나가는 딸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의 슬픔과 나약함이다.


그러나 그 나약함에서 어떤 희망을 보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빠는 사람을 죽일 수 없어' 라는 고백은 마음이 아프지만 동시에 그 고백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본다. 타인을 죽이기까지 100의 마음이 필요하다면 99인 상태에서 실행을 가로막는 1만큼의 마음. 이 나약함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이 나약함은 희망이나 사랑처럼 인간을 이루는 것들 중 위쪽에 쌓여 있던 것들이 모두 사라진 후 가장 밑바닥에 남아 있을 것이다. 네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연극도 말하지 않고 관객도 대답할 수 없다. 다만 비극이 네 사람, 특히 카오루의 가족을 휩쓸고 난 후에도 그들이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무리 죽이고 싶어도 끝내 타인을 죽일 수는 없는 나약함이라고, 나는 믿는다.







기    간 : 2018년 12월 6일(목) ~2018년 12월 30일(일)

시    간 : 평일 오후 8시 / 주말, 공휴일 오후 4시
월요일 공연 없음

장    소 : 동양예술 극장 3관

주최, 제작 : 극단 산수유

후    원 : 문화체육관광부,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관람연령 : 만 15세 이상

러닝타임 : 90분

관 람 료 : 30,000원

작    가 : 토 시노부

번    역 : 박희찬

연    출 : 류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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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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