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감기에 걸렸습니다. [기타]

글 입력 2018.12.19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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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이 났다. 달아오른 얼굴은 붉은빛이 연연했고 이마엔 송골 땀이 맺혔다. 기침이 났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고 항상 목이 메었다. 몸은 지쳤고 마음은 아팠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도 아니었고 갑작스러운 소낙비를 흠뻑 뒤집어쓴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2년을 앓았다.

C를 처음 만난 건 나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 때였다. 특별한 약속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방안에만 있고 싶진 않아 밖을 나섰다. 1년 늦은 복학 덕에 아는 얼굴 없는 대학 풍경은 생각보다 더욱 낯설었다. 생소한 이들이 가득한 공간은 내가 알던 곳과는 쉬이 달라 보였다. 주위를 한참 둘러본 후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에 자리 잡아 앞으로의 대학생활을 위한 스케치를 구상하던 중이었다.

"Y!"

낯섬 가득한 곳에서 간간이 알아본 익숙함 만큼이나 반가운 것은 없다. 작년에 먼저 복학한 동기였다. 그 반가움 옆에는 또 다른 반가움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여자였으나 이유 모를 익숙함이 있었다. 그는 그녀를 동아리 후배라고 소개했다. 나는 인사하는 그녀의 웃는 얼굴에서 왜인지 모를 그늘을 보았다. 그 어두움을 보듬고 싶었고 그 친숙함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C는 그렇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나는 어떤 대비도 없이 마음 한편에 그녀를 들여야만 했다. 우연히도 C는 같은 학년에 같은 수업을 들었다.

매일이면 C를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관심 표현이 서툰 건 여전했기에 그녀에게 다가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딴의 노력이라고는 자연스러운 마주침을 가장하여  눈에 자주 띄려 했던 것이 전부였다. 어쩌다 용기를 낸 날은 실없는 농담을 건네는 정도였다. 애써 드러내지도 않았지만 꼭꼭 감추지도 않았던 두어 달의 시간이 흘러 C와는 어느 정도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비밀리에 연애 중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흔한 이야기이다.

방학이 끝난 후, C가 헤어졌단 소식을 들었을 때 외면해오던 마음속 그녀가 뻔뻔이 다시 눈길을 끈 것은 뻔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오크통 속에 머문 와인 마냥 다시 돌아온 그녀는 더 깊고 뚜렷해져 있었다. 한주 내내 그녀의 꿈을 꾼 적도 있었다. 더는 주저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면서 자연스레 단둘이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는 일도 생겼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호수공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호수 반대편으로 넘어간 해는 드넓은 하늘을 붉게 칠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우리는 그 일련의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러 호숫물까지 붉노란 빛을 감돌 무렵 한 중년 부부가 사진을 부탁했다. 노을을 배경으로 나란히 선 부부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역광이라 얼굴이 나오지 않아요!"
"괜찮아요. 그냥 찍어주세요."

진한 석양을 뒤로한 검은 실루엣이 작은 카메라 안에 담겼다. 나는 잠시 동안 그 두 실루엣이 나와 그녀로 채워질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흔한 이야기의 흔한 결말답게 나의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날이 지난 얼마 후 고백을 했고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의 대학생활은 그녀로 가득 칠해졌지만, 그녀를 나로 하여금 물들게 하진 못했다.

평온한 나날에 충동적으로 다가온, 지긋지긋했으나 강렬했던 그날들. 꿈같은 첫사랑이었고, 지독한 짝사랑이었다. 어찌 됐건 나는 그녀를 사랑으로 기억하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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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진의 '편지',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 '잊어야한다는 마음으로'와 같은 노래들을 애써 따라 부르며 혼자만의 이별을 다졌다. 무엇보다 도움이 되었던 건 그녀와 2년간 나눈 문자메시지를 정독했던 것이다. 주저함이 묻어난 첫 문자부터 마음을 정리하는 순간까지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아플 땐 미처 제대로 보지 못했던 나의 모습이, 그녀의 입장이 다시 보였다. 납득이 갔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다. 나의 첫사랑은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관심 가는 이들은 있었으나 사랑이라고까지 부를 만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이때 이후로 한 사람의 꿈을 일주일 내내 꾼다면 그건 사랑이라고 믿기로 했다) 어쩌면 살면서 가장 심하게 앓았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물론 이제는 덤덤히 그날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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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들어 오랜만에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 몸살이 심해 직장도 하루 쉬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수시로 깨어나기 일쑤였다. 온갖 약을 먹고 병원도 다녔지만 아직까지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수십 번이나 기침을 하고 있다.

"서울에는 각종 병균이 많아 면역력이 길러지는 반면에 지방은 그렇지 않아서 바이러스의 침투가 쉬운 게 아닐까요? 마치 유기농 채소에 벌레가 많이 꼬이는 거처럼."

지방생활을 하는 나에게 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엉뚱하다고 여겼지만 어쩌면 일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친구의 말마따나 이 감기를 버티고 나면 나는 더 튼튼한 유기농으로 거듭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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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동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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