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목적 없는 휴식 - 『하와이언 레시피』 [영화]

나의 시골과 휴식 그리고 할머니
글 입력 2018.12.24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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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렌트한 오픈카가 불안하게 코너를 돌더니 겨우 멈춰 선다. "나를 사랑해?" 여자는 남자에게 묻는다. 이어서 나오는 목소리도 여자다. "자기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금방 입을 다물지." 남자는 길을 물어보고 온다며 황급히 일어선다. 대화의 분위기는 이별을 암시한다. 그가 들어간 건물은 'HONOKAA PEOPLE'S THEATRE'. 짧은 하와이 여행이 끝난 후 그들은 바로 헤어졌다. 그리고 그는 1년간 이 HONOKAA라는 동네에 머물기로 한다. 영화는 그가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그다지 상처받지도 않았다. 실제로 그녀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본 내용은 주인공이 이 조용한 동네에서 주민들의 삶의 방식에 녹아들어 함께 생활하는 이야기다.

이 동네에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산다. 주인공 레오는 HONOKAA PEOPLE'S THEATRE에서 영사기 돌리는 일을 하며 같은 건물에 방을 얻어 살게 된다. 동네 주민들은 대부분 나이 든 노인이다. 이 해맑은 청년은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고, 천천히 마음의 경계를 허물어간다. 물건을 옮겨주러 간 비 할머니의 집에서, 레오는 만들어놓은 고양이 밥을 집어먹는데, 이를 목격한 비는 내일도 밥 먹으러 오라는 어색한 초대를 하고, 다음날부터 계속 레오는 그녀의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가게 된다. 비는 탁월한 요리 실력으로 자신만의 요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레오는 저녁을 먹기 전에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음식 사진을 찍는다. 사진이 하나씩 레오의 방 벽에 붙기 시작하고, 휑하던 벽은 어느새 예쁘고 따스한 음식 사진들로 가득 메워진다. 비와 레오와 동네 주민들. 영화는 이들의 조용한 일상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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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언 레시피>는 예전에 본 영화 <리틀 포레트스>(한국)보다 훨씬 더 고요하고 평온했다. 둘 다 20대 청년이 시골에 내려와 1년 동안 조용한 시간을 보낸다는 이야기는 같지만, 두 영화가 집중하는 대상은 다르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시골집은 주인공 혜원이 지쳤을 때 찾아와 편안히 쉬어가고, 재기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혜원은 든든한 보금자리에서 보낸 1년으로, 다시 힘내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러나 <하와이언 레시피>는 주인공의 이야기보다는 그 HONOKAA라는 '동네의 조용한 삶' 자체에 더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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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휴학 중이다. 올해 2학기를 휴학한 채 보냈다. 나는 휴학하자마자 할머니 댁이 있는 동해로 떠났고, 짧고도 긴 두 달을 할머니와 둘이 보냈다. 그리고 할머니 댁에 온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봤다. 그리고 할머니 댁을 떠나고 두 달이 지난 지금 <하와이언 레시피>를 봤다. 두 영화는 모두 동해에서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나서 작성한 글을 다시 읽어봤다. 그때 나는 한창 이 '쉼'에 대해서 의미 부여를 해야 했다. 휴학하고 시간 낭비만 한다면 부모님과 할머니 그리고 모든 주변 사람들이 나의 휴학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휴학 전에 아빠는 '나는 니가 아까운 20대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 같다.'라는 이야기를 했고, 알바하던 리조트의 팀장님도 내게 똑같은 조언을 해주셨다. 그리고 스스로도 정체되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 말을 받아들였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알바하고 대외활동을 찾고, 계속해서 일정과 계획을 만들었다. '뭔가 해야만 한다'라는 불안은 언제나 내 머릿속 한구석을 차지했다.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서도 내가 얻은 결론은 '나도 여기서 정비하고 곧 현실로 돌아가야겠다.'였다.

동해에서 스스로 할 일을 계획하고 시간을 알차게 보낸 것은 잘한 일 같다. 휴학 중인데도 생활에 활력이 있었고, 목적을 달성하는 성취감도 맛봤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때의 <리틀 포레스트> 감상을 돌아보니 한편으로 나는 '의미 형성'에 너무 얽매여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삶은 의미 있게 만들어가야 하는 게 맞지만 그것의 형성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당시의 희로애락을 온전히 즐기기 어려울 수 있다. 아무래도 그때의 '뭔가 해야 한다'라는 강박은 내 시골에서의 삶을 좀 방해했던 것 같다. 두 영화의 주인공과 내가 달랐던 점은 '신경 쓰는 휴식시간'을 보냈다는 거다. 결국엔 완벽한 '쉼'을 하지 못한 것 같아서 좀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동해에서의 시간은 내게 정말로 의미 있었다. 뭔가 해내서가 아니라, 할머니와 더욱 돈독해지며 정말 평온하고 차분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사실 동해에 내려와서 이렇게 안정적인 환경에 있게 될 줄은 몰랐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준비해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시골 아침밥을 먹고서 아침 햇볕을 맞아 찬란한 노란빛이 나는 밭의 농작물들을 지나쳐 출근한다. 근무지에 가서는 같은 햇볕을 받아 빛나는 파도와 수평선을 볼 수 있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자기 전까지의 아까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한다. 할머니와 함께 간식을 먹으며 이불 속에서 티비를 봐도 좋고, 방에서 책을 읽어도 좋고, 혼자 미드를 봐도 좋다. 책을 읽다가 방이 답답하면 밤공기를 쐬며 앉아있을 수 있는 바깥 마루로 장소를 옮기면 된다."


- 2018.10.13 [작은 숲]



약간의 강박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래도 올해 가을은 분명히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기였다. 내리쬐는 가을볕 아래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다. 밭일도 조금씩 돕고, 할머니와 매일 대화했다. 같이 목욕탕에 갔다가 전천강을 따라 걸으며 돌아오는 길에 동네 할머니들을 만나 벤치에 앉아있기도 했고, 어느 날 밤에는 저녁을 먹고 있는데 '펑'하는 소리가 나서 밖에 나가보니 화려한 불꽃이 하늘을 수놓고 있는 영화 같은 순간을 만나기도 했다. 그 장소와 계절과 할머니라는 존재가 함께 만들어냈던 정조는 마법처럼 나를 감싸 안았다.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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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언 레시피>에서 비가 레오를 만나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것을 보며 나는 우리 할머니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레오와 비 그리고 나와 할머니는 참 닮았다. 나는 분위기를 활기차게 만들거나 시끌벅적하게 하는 것엔 재능이 없다. 조용한 집을 변화시키진 못하지만, 할머니에게 나도 레오와 마찬가지로 조금씩 말을 걸며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도 듣고 할 뿐이다. 레오는 종이컵 전화기를 비의 방에 설치하고, 나는 할머니 방에 '만수무강' 붓글씨를 걸어놓는다. 나는 할머니와 많이 가까워졌고 서로가 더욱 소중해졌다. 그래서 영화에서 비가 남몰래 하는 가슴 앓이는 내게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비처럼 혼자 계신 할머니는 마음 아프지만 묵묵히 나를 떠나보내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는 우리 할머니와 너무 닮았다. 내가 또 할머니 댁에서 둘이 사는 날이 있을까.

언제라도 동해에서의 두 달을 기억하고 싶어지면 나는 아마 <하와이언 레시피>를 다시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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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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