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각자의 입장 <이매진 존 레논 展>

존 레논과 오노 요코, 그리고..
글 입력 2018.12.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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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한국을 퀸의 열풍으로 물들였다. 영화를 보기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퀸과 프레디 머큐리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각종 SNS에는 퀸을 모르는데도 영화가 재미있냐는 질문이 올라왔다. 또한 내게도 퀸은 낯선 뮤지션이라 영화관 좌석에 앉을 때까지도 그들의 음악이 어떻게 다가올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자 그 걱정은 오산이 되었다. 두 번 발을 구르고 손뼉을 한 번 치자, 심장이 뛰었고 저절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위-윌 위-윌 락 유!”


음악의 힘은 무척 대단하다. 지나간 음악가를 모른다고 생각해도 이미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그들의 음악을 들어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퀸보다 앞선 비틀즈의 시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전시를 보러 가기 전부터 노래를 찾아 들었다. ‘Let It Be’, ‘All You Need Is Love’, ‘Hey Jude’ 수많은 명곡을 들으면서 역시나 비틀즈를 모른다 단정할 순 없었다.

 



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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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이매진 존 레논 展>은 1980년 충격적인 존 레논의 피살로 시작한다. 안타까운 죽음과 함께 세월을 거슬러 그의 탄생부터 비틀즈로의 생활, 사랑, 사회운동을 총망라한다. 이 전시에서 가장 눈여겨보았던 것은 '음악을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였다. 음악가의 비중이 큰 존 레논이라는 예술가를 어떻게, 어떤 비중으로 다룰 것인지가 무엇보다도 궁금했다.


그에 대한 해답으로, 이동 동선과 각 파트별 분위기에 맞춰 존 레논의 음악과 영상이 재생되었다. 더불어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노래 가사는 글자를 해석하며 느끼는 시적인 감성을 불러일으켰다. 전시 파티션별로 나뉜 공간들은 존 레논의 삶의 흐름과 변화들을 잘 보여주었고 함께 흘러나오는 그의 음악은 서사를 한층 깊게 만들었다. 비틀즈의 음악에서부터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노래 ‘Woman’, ‘love’, 평화를 위한 ‘Imagine’, 그리고 남겨진 이를 위한 ‘Hey Jude’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예술의 영역 안에서 음악과 미술을 구분 짓기는 싫지만, 이 전시 안에서만큼은 그 둘의 조화가 중요했다. 자칫 음악가로의 존 레논 쪽으로 기운다면 추모전으로 둔갑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전한 평화, 페미니즘, 차별반대를 위한 노력을 좀 더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는 미술 활동의 비중이 무척 컸다. 그런 면에서 전시는 존 레논의 음악과 미술이 조화롭게 배분되어 있었다. 특히 음악가로의 존 레논이 아닌, 사회운동가로서 존이 오노 요코와 함께 한 행위예술을 자세히 조명했다.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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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은 오노 요코를 만나 음악에서 더 확장된 영역으로 넓혀 갔다. 그들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흰 풍선이 가득 찬 방안이나, 남산타워가 보이는 창을 배경으로 둔 침대, 배기즘(BAGISM)의 흰 자루를 통해 전달되었다. 전시장 곳곳에 그가 그린 드로잉과 판화, 실제로 착용했던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은 관객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침대나 자루와 같은 설치물을 통해 참여하게 만든 구성은 관람객의 흥미를 돋운다. 나를 비롯한 관객들은 흰 풍선으로 가득한 방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침대에 앉아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존과 요코가 말한 평화를 위한 방식이다. 관객과의 소통은 꾸며진 공간을 관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체험하며 의도를 생각하는 것에서 더욱더 깊어진다.


미술 작품을 보면서 참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일부러 직접 만지고 느끼도록 의도된 공간에서, 사진을 찍고 SNS에 업로드 하는 것 모두 전시에 참여한 것이다. 배기즘이라 쓰인 흰 자루에 들어가 존과 요코의 의도를 한 번 더 되새겨 보는 것, 그리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떠올려 보는 것으로 관객과 존, 요코는 소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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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비틀즈 모임의 컬렉션
- 비틀즈와 존 레논의 LP앨범들


전시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참여는 대구 비틀즈 모임의 컬렉션으로 꾸려진 비틀즈와 존 레논의 LP 앨범 공간이었다. 이 공간은 신기함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전시를 위해 자신의 보물 같은 앨범들을 넘겨준 그들의 공유 정신과 구김 한 점 없이 보관된 앨범 상태는 팬들의 순정을 느끼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최상의 전시 형식이라 생각한다. 소중하게 간직해온 ‘나만의 것’을 전시를 위해 내어주고 이름 모를 관객과 공유하며 같은 추억을 나눈다는 것은 어떤 행위보다도 대단하다. 특별한 퍼포먼스도 아니고 꼭 그 순간 직접 행동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누군가의 소유물을 내놓고 그것에 영감을 받는 것만으로도 유대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비틀즈 시대의, 혹은 비틀즈의 팬이었다면 이 공간만큼 뭉클한 곳이 또 있을까.
     


평화



갑자기 호텔 방에 찾아온 14살 아이와 존 레논의 대화에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히틀러와 예수가 같이 있다.”는 존의 말이 인상 깊었다. 폭력은 폭력을 불러올 뿐이기에 비폭력적인 시위를 해야 한다는 평화적인 메시지와 함께. 평화적인 시위는 누군가에게 지어주는 한 번의 미소일 수도 있고 글로 쓰는 것일 수도 있으며, 존처럼 노래하고 행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존에겐 자신의 삶을 쓴 모든 음악이 의미 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은 오노 요코를 만나고 더욱 다양해졌다. 당시 오노 요코는 동양계 여성으로 최전방에 선 예술가였지만, 존과 재혼했다는 이유로 비틀즈 해체의 주범이자 존을 빼앗아간 동양인 마녀로 비틀즈 팬들과 대중의 총알받이가 되었다. 요코를 만나 페미니스트가 되는 등 많은 영향을 받은 존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이루자고 외쳤지만 그와 상반되게 매서운 증오와 저주가 요코를 따라다녔다. 그 때문에 이번 전시가 오노 요코의 악명을 떨칠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리고 이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듯 보인다. 그녀에게 씌워진 끔찍한 오명과 비난은 전시장에 걸린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모두 느꼈다. 아래 사진 속 오노 요코는 당시 마약을 소지한 혐의로 법정 공방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 혐의와는 별개로 그녀에게 쏟아진 맹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뱃속 아이를 유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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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히 생각한다. 동양인 여성이자 여류 작가인 오노 요코에게 이런 일은 드물지 않았을 거라고. 존이 요코를 사랑한 이유도, 페미니스트가 된 것도, 차별 없는 세상을 원한 것도 애초에 이방인을, 여성을, 다른 인종을 차별하는 그 모든 이들 때문이라고. 비틀즈의 해체 원인을 힘없는 이방인 여성에게 돌려버리고 악녀라 손가락질하는 팬은 비틀즈의 진정한 팬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비틀즈는 언제나 부당한 차별을 반대했으니까.



각자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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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과 요코의 아이, 션 레논과 함께



전시 막바지에, 오노 요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션 레논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를 위한 존의 드로잉과 수많은 판화 작품에서 아버지의 부정(父情)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행복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따라 이동하다가 감춰져 잊고 있던 누군가를 보게 되었다. 바로 전 부인과 존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줄리안 레논이었다.

사실 존과 요코의 시작은 석연치 않다. 그들의 사랑 때문에 존의 첫 번째 부인과 아들, 줄리아 레논은 남겨졌고 상처받았다. 그러나 나는 존과 요코를 응원했다. 과정이 어찌 됐건 이미 재혼한 둘이,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법으로 계속해서 미디어에 노출되고 평화를 외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폴 매카트니의 목소리로 <Hey Jude>가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줄리안을 위로하는 노래가 들리고 그들의 사랑에 가려진 누군가를 보았을때 또 다른 이의 입장이 추가된 머릿속에 과부하가 걸렸다.

줄리안의 입장은 남 일 같지만 않아서 더 그랬다. 나 또한 이혼가정으로 자라면서, 새롭게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사는 누군가의 빈자리가 속상해 울던 밤이 있었다. 혹시 줄리안도 존이 새 가정에서 션에게 쏟는 그 열정에 눈물이 날 만큼 속상했을까. 션 레논의 탄생과 함께 모든 걸 내려놓고 아버지로 충실해진 존의 행보는 아내 오노 요코에겐 다정한 남편을, 그들의 아이 션에겐 멋진 아버지로 대중들에겐 깊은 부정으로 보였겠지만 줄리안에게는 무엇보다도 박탈감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그런 줄리안이 애처로웠던 폴 매카트니는 <Hey Jude>라는 노래를 통해 그를 위로하려 하지만, 이 노래가 줄리안 레논을 위한 곡이라는 사실은 20년 후에 알려졌다고 한다. 그래도 이 노래를 들은 줄리안에게는 가슴 깊이 와 닿지 않았을까. 만약 어린 내게도 이 노래를 알려준 사람이 있었다면 조금 덜 슬펐을 텐데.




Hey Jude
헤이, 주드 
Don't make it bad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마
Take a sad song and make it better
슬픈 노래를 좋은 노래로 만들어 보자고
Remember to let her into your heart
그녀를 네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기억해
Then you can start to make it better
그러면 넌 조금이라도 괜찮아지기 시작할거야


줄리안 레논은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부모의 선택을 이해한다. 그렇게 사람은 복잡하게 얽힌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성장한다. 하지만 끝까지 좁혀지지 않는 입장 때문에 관계가 지속되지 않기도 한다. 비틀즈의 해체도 입장을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틀즈 해체 후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 간 존과 남겨진 이를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폴, 가족이었던 사람들, 그들의 만남을 응원하지 못하는 비틀즈의 팬들과 반대로 세기의 사랑이라 평가하는 대중.

그렇게 많은 입장을 고려해 존 레논은 평가된다. 그 평가들은 역시나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지만 단 하나, 모든 것을 통틀어 공통된 입장이 있다. 그건 바로 존 레논이 온 생을 받쳐 열망한 평화이다. 어떠한 통제도 없이 자유로운 평화의 세계. 그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위해 그는 주어진 삶 내내 외쳤다. 그리고 그가 전한 평화의 외침은 서로 다른 입장들을 하나로 아우르고 위로한다.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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