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소하고 위대한 변화_뮤지컬 '재생불량소년'

재생 불량을 재생 가능으로 바꾸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글 입력 2018.12.28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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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고 위대한 변화

- 뮤지컬 '재생불량소년'을 보고 -





예술은 때로 누군가의 인생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예술 작품이 갖는 최고의 가치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 작품을 접하기 전과 후가 달라지는 것. 지금 당장은 사소한 변화지만, 나중에 어떤 큰 파장을 가져올지 알 수 없는, 그런 작은 날갯짓을 만들어내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 뮤지컬 '재생불량소년'은 완벽히 성공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을 보기 전과 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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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7일자 뮤지컬 <재생불량소년>의 커튼콜


줄거리는 간단하다. 재생불량성 빈혈을 진단받고 무균실에 입원하게 된 천재 복서 반석. 그는 절친한 친구였던 승민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며 시종일관 비관적이고 삐딱하다. 하지만 그런 반석에게 백혈병을 앓고 있는 긍정적인 열일곱 소년 상균이 다가온다. 반석은 그를 밀어내려 하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는 상균에 의해 점점 변한다. 두 사람에게는 적이 많다. 트라우마, 질병, 독한 약, 매일의 피검사 수치, 좌절과 체념. 투쟁하며 나아가는 반석과 상균의 이야기는 100분 동안 우리를 웃겼다가 울린다. 그들의 포기하지 않는 마음처럼 이 극은 가장 어두운 순간조차 한 줌의 빛을 남겨놓는다. 희망을 잃지 말라는 듯, 포기하지 말라는 듯. 재생 '불량'이 '불가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불가능을 아니게끔 하는 힘, 그러니까 '재생 불량'을 '재생 가능'으로 만드는 힘, 그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건 너 자신과의 싸움이야.

너 자신을 이겨야 해. 이건 정신력 싸움이야.



스포츠 경기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권투 경기 전 코치는 반석에게 말한다. 이건 너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그런데 이 말을 반석은 병원에서도 듣는다. 이건 혼자만의 싸움이라고. 반석이 진짜 이겨내야 하는 건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난치병도 아니고, 매일의 피검사 수치도 아니고, 고통스러운 치료도 아니다. 진짜 싸움은 구토, 설사, 통증, 기대의 좌절 등 그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어퍼컷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다. 무릎을 꿇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에서 스스로를 건져 올리는 것. 그게 진짜 싸움이다. 그리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건 간호사의 격려도, 책 속의 멋진 한 줄도 아니다. 희망이다.

희망은 그들에게 내일을 가능케 한다. 내일을 상상할 수 있다면 내일은 그곳에 분명히 존재한다. 집에 가는 상상, 대학에 가는 상상, 강해지는 상상, 라면을 먹는 상상. 그래서일까? 화려하고 당찬 수많은 넘버들이 존재했지만, 가장 귀에 쏙쏙 박히고 즐거웠던 건 라면이 먹고 싶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만두 라면, 짬뽕라면, 치즈라면, 떡라면, 컵라면. 그 온갖 라면들을 먹는 상상. 한강 둔치에 앉아 라면을 후후 불어먹는 상상. 현실은 그저 황도 통조림에 불과하지만, 라면이라는 상상력은 그들을 또 하루를 버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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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재생불량소년>의 컨셉 사진


 ※
아래의 내용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뮤지컬을 보기 전 시놉시스를 읽었을 땐 '반석'의 역할이 압도적으로 중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극의 또 다른 히어로는 열일곱 살의 상균이다. 상균은 반석을 그 짜증 나는 무균실에 적응시키며, 그에게 권투를 배우며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된다. 상균은 어설프게 주먹을 휘두르고 엉성한 스텝을 밟으며 크게 웃는다. 팔 한 번만 휘둘러도 폼이 나는 반석과 달리 상균의 주먹질은 어린아이처럼 우습기만 하다. 그런데도 상균은 즐겁다. 그는 말한다.


"살아있는 것 같아!"



살아있다는 감각은 그들에게 너무도 중요하다. 우리는 어떨 때 살아있다고 느낄까? 살아있음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살아지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것. 단지 숨이 붙어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 아닌 심장의 박동을 느끼고 숨이 차고, 온몸의 기관들이 제각기의 기능을 하며 운동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 단지 침대에 누워 식물처럼 수액과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일으켜 뭔가를 배우고 두발로 뛰어보는 것. 해본 적 없는 일을 해보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일. 자유 의지를 가지고 내 생각과 기호대로 행동할 때 우리는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살아있음을 느끼고,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갖는 상균은 그 싸움에서 기필코 승리하게 될까? 이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니까 그는 그 싸움에서만 지지 않으면  이 무균실을 벗어날 수 있게 될까? 이겨낼 수 있을까? 악독한 의지로 버텨내기만 한다면? 하지만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상균이 앓고 있는 백혈병과 반석이 앓고 있는 재생불량성 빈혈의 공통점은 모두 '골수'의 기능이 망가졌다는 것이다. 피를 만들어내는 공장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골수 기증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기증자를 구하는 일이란 결코 쉽지가 않다.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이천 배는 힘들어 보인다. HLA가 일치해야 기증을 할 수 있는데 이 HLA가 일치할 확률이란 부모와는 5%, 형제자매간은 25%, 타인의 경우 2만 분의 1이라고 한다. 이 2만 분의 1이라는 기적. 상균에게는 그 기적이 나타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다. 부모님의 반대를 이유로 돌연 기증을 거부하는 기증자. 기증을 거부한다는 소식 앞에서 상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그저 새로운 기적을 기다리는 것뿐.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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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재생 '불량'을 '가능'으로 만드는 힘은 우리에게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끝나지 않는, 지독한 싸움을 끝내줄 수 있는 사람은 우리일지도 모른다. 뮤지컬이 끝난 뒤 내가 가장 먼저 검색한 것은 '골수 기증'이었다. 공연을 보며 나는 내내 후회했다. 헌혈 한 번 해본 적 없는 내가, 골수 기증을 남의 일이라고만 여겼던 내가 부끄러웠다. 누군가의 희망이 되어준다는 것,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고 또 살릴 수 있는 그 기적이 내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찾아본 결과 골수 기증은 생각보다 무섭고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눕는 일은 아주 오래된 방식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마치 수혈처럼 말초 혈액으로 조혈모세포를 기증할 수 있다. 3일간 입원이 필요하며, 기증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고작 3~4시간 정도. 다음날에는 바로 일상생활도 가능하다고. 양팔에 모두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비용치고 4시간의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기증자 신청은 가까운 헌혈의 집에서 5ml의 혈액 검사만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주사가 무서워 헌혈은 꿈도 못 꾸고, 예방 접종조차 거부하던 나는 다음 주 헌혈의 집에 방문할 예정이다. 그 작은 두려움을 이겨낸다면, 몇 시간의 며칠의 불편감을 버텨낸다면 누군가는 지긋지긋한 병원을 벗어날 수 있다. 나의 작은 친절로 누군가는 기뻐 울지도 모른다. 나를 기적이라 부르고, 희망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2만 분의 1이라는 기적. 그 기적을 만들어낼 작은 씨앗을 심으러 나는 다녀올 예정이다.

그리고 나의 손에 이 씨앗을 쥐여준 것은 다름 아닌 이 뮤지컬 <재생불량소년>이다. 반석과 상균의 공이다. 불량을 불가능이라고 읽지 않는, 끝내 가능하리라 믿는 그들의 강인한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결핍이 있는 청소년들의 희망과 연대를 보여주며 재생불량성빈혈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이 뮤지컬. 많은 사람들이 보고 나와 같은 감동을 느꼈으면 좋겠다. 사소하지만 위대한 변화를 이끌어낼 뮤지컬 <재생불량소년>은 1월 20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관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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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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