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mina] 맞아도 되는 여성은 없다.

글 입력 2018.12.29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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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도 되는 여성은 없다.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는 끔찍한 폭력이 농담으로 둔갑하여 망령처럼 사회를 누비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불과 몇 년 새에 페미니즘은 화두로 떠올랐지만 남성 폭력이 자연스러운 일상이던 과거와 현재의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여성을 향한 폭력과 차별을 방관하거나 적극적 혹은 소극적으로 가담하는 남성 중심 사회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한 달 전 벌어진 이수역 폭행 사건은 이처럼 여성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여성에게 보이는 증오가 적나라하게 반영된 사례다. 이 사건은 명백한 여성 혐오로서 페미니스트처럼 보이는 여성, 넓게는 페미니스트를 향한 반동 그 자체다. 최근 탈코르셋 운동, 성폭력 고발, 불법 촬영 규탄 등 지금껏 묵인하고 방조되어왔던 남성들의 폭력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이를 향한 남성들의 적대감이 드러난 것이다.

사건은 피해자의 부상 증거 사진과 함께 사건 발생날의 정황을 담은 글이 온라인에서 공론화되어 알려졌다. 당시 여성 2명은 커플 일행과 남성 4명에게 메갈녀를 처음 본다고 조롱을 받자 다툼을 벌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남성 중심의 언론은 피해자가 얼마나 "맞을만한 짓"을 한 여성이었는지 설파하는 데에 온 정성을 쏟았다. 처음 공론화가 진행된 후 사건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여성 측이 남성 측과 설전을 벌이고 맞대응하는 영상을 일제히 보도하기 바빴다. 언론은 남성측에 특별한 감정이입이라도 한 듯 언어강간이란 단어를 강조하며 피해자의 행동이 비도덕적이고 심각한 공격이었다는 의미를 가득 담아냈다.



남성폭력의 신화


다수의 매체가 평소에는 보기 힘들던 피해자 중심적인 용어까지 사용하여 남성의 입장을 대변했다. 피해자가 던진 야유를 언어강간이라 여길만큼 예민한 시각은 오직 남성이 가해자, 피해자의 경우일 때만 선별적으로 발휘된다. 여성들이 겪은 언어적 성희롱 사건을 다룰 때 직접적으로 언어강간이라는 단어가 쓰인 기사는 단 한 건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언론의 영향력을 등에 업은 남성들은 입이 걸걸하고 드센 여성이 먼저 원인 제공을 했으므로 폭력이 합당하였음을 주장했다. 페미니즘의 기세에 억누른 척 했던 집단 가학성을 가감없이 내비친 셈이다.

사건을 다루는 언론과 남성들이 내뱉은 2차 가해는 전형적인 여성 혐오이자 남성 집단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심지어 피해 여성들은 스스로를 친자매라고 말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허위사실을 밝혀낸 듯이 보도했다. 피해자의 언행에 관한 신빙성을 떨어뜨리려는 목적이 뚜렷했다. 피해 사실은 축소하고, 일거수 일투족 진위 여부를 가리는 일에 짐짓 신이 나 보이기까지 했다. 첫 진술과 일부 맞지 않는 부분이 드러나면 기민하게 기사화 되었다. 응급차가 아니라 택시를 타고 간 부분, 처음 간 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에서 입원 수속한 부분을 빌미 삼아 피해자의 모든 주장이 거짓인처럼 편향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이다. 피해자가 상해로 인해 입원했다는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 측이 피해자가 아닌 피의자 신분으로 기소된 순간부터 사건의 결말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다. 여성의 욕설이 포함된 동영상이 공개되었을 때와 4명의 남성이 두 명의 여성을 물리적으로 위협하고 비방하는 영상이 공개되었을 때, 더 큰 신뢰를 보인 쪽과 더 맞을 짓을 벌인 쪽이 이미 판명났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초지일관 피해자를 맞아도 되는 여성으로 만들었다.

피해자는 경찰을 부르자 도주하려는 남성에 의해 두피가 찢어져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남성 측의 옷깃이 늘어지고 단추가 떨어진 것, 여성의 가방을 붙잡았던 손목에 할퀸 자국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서로가 쌍방폭행을 저지른 셈이 되었다. 마치 대등한 구도에서 벌어진 일처럼 시작하여 현재는 남성이 피해자에게 불합리한 공격을 받다 발생한 사건의 형태로 왜곡되었다. 쌍방폭행을 넘어 가해자인 남성을 피해자로, 피해자인 여성을 가해자로 만들고 싶은 광기마저 느껴진다.

중요한 사실은 남성 폭력의 피해자인 여성이 무력하기만 한 존재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여성은 자신을 향한 폭력에 저항하고 분노할 수 있는 인격체다. 여성도 거친 욕설을 내뱉고 조롱과 화를 낼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맞을 짓을 한 여성이란 결국 남성들의 언어와 규범 체계에 순종하지 않는 여성을 뜻한다. 남성이 정한 규칙을 따르지 않는 여성은 맞아도 되는 여성이다. 그런 여성을 향한 폭력은 합리적이고 공정하다. 맞을 짓을 한 죄로, 밤길을 걸어 다닌 죄로, 남성의 음심을 자극한 죄로, 완전무결한 피해자가 아닌 죄로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남성 폭력의 신화는 여전히 철옹성처럼 공고하다. 그런 점에서 안희정의 성폭력 사건과 이수역 사건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여성을 향한 이중잣대를 생생하게 대변하기 때문이다. 충분히 저항하지 못한 피해자의 잘못으로 성폭력은 무죄가 되었고, 자신을 조롱한 남성과의 다툼 끝에 신체적 상해를 입었으나 가련한 피해자가 아니라 분노하는 존재임을 보여주어 쌍방과실이 되었다. 여성이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가장 급진적인 운동으로 호명될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여성과 페미니스트


이수역 사건이 페미니즘에 반발하는 백래시임을 보여주는 것은 사건을 둘러싼 남성들의 격렬한 반응이다. 과거 김치녀와 개념녀의 분할통치로 쏠쏠한 재미를 보았던 때와 일치한다. 사건이 벌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랩퍼 산이는 자신의 SNS에 피해자와 연관된 동영상을 게재했다. 그리고 페미니즘을 정신병으로 취급한 노래를 발표했다 . 페미니스트를 정신병자라 일컬으며 정상적인 여성은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를 포함해 이수역 사건의 피해자 여성이 맞을 짓을 한 여성이라 흥분하던 남성들, 어떻게 감히 여성이 자신의 클리토리스를 공공장소에서 입에 담을 수 있는지 경악하던 남성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여성이란 대체 어떤 여성을 뜻할까. 그들의 앞에서 무해한 웃음을 짓고 성추행을 당해도 고이 참아 넘기는 여자, 강간을 폭력이 아니라 애정으로 여기길 바라는 여자, 그들이 원하는 대로 통제 가능한 여성, 자신이 인간임을 망각한 여성이 바로 정상적인 여성이다.

여성들이 남성들의 손에서 탄생한 가부장제에 관해 아무런 의심도, 분노도 하지 않고 남성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길 바라는 절박함이 드러난다. 이처럼 히스테리컬한 반응은 지배집단으로서 피지배집단이 돌이킬 수 없는 통치 불가의 영역으로 벗어나는 것을 방지하고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힘으로 억누르고 다스리며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는 그들에게 미친 여자로 보일 것이다. 자신의 권한 밖에서 날뛰며 안온하게 머무르던 남성 중심 세계에 균열과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Your Silence Will Not Protect You


올 한 해는 많은 것이 변했지만 또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 미투 운동을 통해 성폭력 생존자들은 어둡고 깊은 터널을 걸어 나와 존재를 드러냈고 용감하게 가해자를 고발했다. 온라인에서 가시화된 탈코르셋 운동은 Escape The Corset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뉴욕타임즈, BBC를 포함한 외신에서도 한국의 페미니즘을 주목했다. 탈코일기라는 만화의 텀블벅 펀딩은 무려 1억을 넘겼고 문화계에서는 여성, 페미니즘을 주제로 삼은 강연, 도서, 공연 등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지난 22일 여성 단일 의제로 불법촬영, 웹하드 게이트를 규탄했던 광화문 시위에서는 사상 처음 11만 명의 여성이 모였다. 하지만 정부는 제도적, 사회적 개선을 촉구하는 여성들의 요구에 지지부진한 답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편파수사와 편파판결은 계속 이어지는 상황이다.

며칠 전 피해자를 식별하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여자 화장실에서 불법촬영을 한 남성은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윤택의 추가 성추행은 무죄로 판명되었고 안희정 역시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수역 사건으로 굴종하지 않는 여성을 폭력으로 처벌하고 싶어하는 남성 집단의 욕망은 더욱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남해 경찰서는 임신중단 수술을 받은 여성을 색출하기 위해 개인 의료기록까지 추적했다. 정부가 낙태죄의 위헌 여부 판결조차 미루며 여성의 몸에 대한 자율권을 억압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OCED 국가 중 성별 임금격차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올해의 성평등지수 또한 116위에 자리하여 최하위권을 전전하는 중이다.

이런 절망과 희망이 반복되는 현실에서도 내가 지치지 않은 이유는 침묵하지 않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여준 변화를 향한 열망만큼은 끓어오르고 있다. 부디 이 동력이 꺼지지 않고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란다. 더 많은 여성들이 깨어나 자신 속에 잠재되어왔던 분노를 표출하길 바란다. 끊임없이 여성을 좌절케하는 사회에서 패배주의와 자조, 무기력이란 벽에 부딪쳐 쓰러지기보다 분노하는 여성이 되길 바란다. 남성들은 분노한 여성을 광인 취급하겠지만 당신의 분노와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 이 글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전하고 싶은 위로이자 언제나 당신들의 동료로서 연대하며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겠다는 나의 다짐이다. 28년 전 케이트 밀렛이 성정치학의 서문에 남긴 글로 나의 마음을 전한다.


“이 투쟁은 쉽지는 않아도 늘 흥미롭다.

그리고 인간 자유의 영역을 넓히는 일은
 
너무나 멋진 작업이어서,

여기에 함께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장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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