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 [공연]

글 입력 2018.12.30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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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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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_윤현민 / 출처_극단 달나라 동백꽃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이 지닌 세가지 힘.



1. 극본의 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서사. 특히 역사 이야기를 소재로 한 창작물을 감상하기 전에 나는 항상 기대감을 낮추곤 한다. 아쉽게도 그동안 여러 창작물에서 역사적 사실은 과장되거나 축소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왜곡되기까지 했다. 사회 구조로 인해 발생한 현상이나 거시적인 문제를 개인에게 환원해 원인을 전혀 다르게 설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을 보기 전에도 기대를 조금 접어두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역사, 특히 근현대사 부분을 소재로 한다기에 약간은 진부한 신파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잠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을 보면서, 연극을 다 보고 난 이후에 맨 처음 내가 생각했던 편견은 제대로 깨졌다.

<썬샤인의 전사들>은 일제강점기부터 제주4.3사건, 한국전쟁, 민주화항쟁까지 70년간의 광범위한 역사를 다룬다. 그 이야기들은 소설가 한승우의 이야기에서 펼쳐진다. 제주4.3사건을 겪고 부산으로 탈출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소년의 일기를 담은 수첩이 전달되면서 이야기는 흘러간다. 생존을 위해 일본군, 중공군을 떠돌던 병사, 의대생에서 인민군 군의관이 된 시자를 거쳐 시자의 동생 시춘에게까지 수첩은 전달된다.

빠르게 바뀌는 인물들과 배경들이 조금은 복잡하기도 했다. 그 때마다 연극은 서술자 한승우를 다시 등장시켜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그렇다고 관람객들을 완전히 관찰자로만 두지도 않는다. 한승우의 머리속에서 창작된 줄 알았던 인물들은 모두 실존 인물이었고, 한승우 역시 이어져온 수첩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면서 연극은 한승우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현재와 연결한다. 그의 딸이 세상을 떠나게 된 사고는 4년 전 봄, 우리나라가 겪은 비극을 연상하게 한다. 단순히 누군가가 겪은 줄 알았던 이야기가 한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가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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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_윤현민 / 출처_극단 달나라 동백꽃



2. 연출의 힘


작은 무대가 산이 되고 바다가 되고 때론 우주가 되기도 한다. 영화처럼 있는 것을 그대로 담아낼 수는 없지만 연극의 무대는 연출에 따라 그 어느 곳도 될 수 있다. 같은 극본으로 연극을 만들더라도 연출에 따라 관객의 몰입도와 재미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연극<썬샤인의 전사들>은 조금 어려운 연극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제주도부터 시작해 한반도와 중국을 넘나드는 배경, 전쟁의 공포감을 조성하는 압도적인 수의 군인들을 연극에서는 실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썬샤인의 전사들>은 독특한 연출을 통해 실감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장소가 계속 바뀌는 인물들의 이동은 스크린이 돕는다. 인물들이 장소를 변경할 때마다 무대 오른편에 설치된 스크린이 지도를 띄워 장소를 알려주는 덕분에 흥남, 만주같은 조금 낯선 곳들의 위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인물들이 변경될 때마다 조금은 오래 지속되는 암전도 분위기를 더했다. 극중 인물들은 대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데, 인물의 죽음 후 암전이 될 때 그 인물을 애도하고, 잠시나마 역사적 사건에 대해 다시 한 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연극이 펼쳐진 CKL스테이지의 구조도 연출에 한 몫을 더했다고 생각한다. CKL스테이지는 그동안 갔던 소극장들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무대를 앞에 두고 그 뒤로 관객석이 일렬로 놓인 방식이 아니라 무대를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관객석이 놓인 극장이었다. 맨 앞 줄에 앉아있어 그런지 처음에는 괜히 건너편의 다른 관객과 눈이 마주치는 듯 하고 배우들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는 기분이 들어 민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연극이 시작되면서 부담스러웠던 거리 덕분에 연극 속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또한 관객석 중심을 관통해 무대로 이어지는 입장 통로는 관객석까지 무대로 만들었다. 관객석 주변을 뛰어다니는 배우들을 통해 마치 나도 연극의 일부가 되어 역사 속에 존재하는 기분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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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_윤현민 / 출처_극단 달나라 동백꽃



3. 연기의 힘


역사를 주제로 한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는 고증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사실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썬샤인의 전사들>은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70년의 역사를 완벽히 담아냈다.

우선 제주4.3사건의 피해자였던 선호의 등장부터 깜짝 놀랐다. 선호의 입에서 쏟아지는 모든 말들은 제주도 방언이다.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림짐작해 의미를 파악한 단어도 여럿 있을정도로 제주 방언은 낯설었다. 제주 방언으로 기록되는 선호의 글과 말은 4.3사건과 전쟁의 공포가 어땠는지 생생하게 알게 한다. 제주4.3사건 이후로 사용하는 이들이 많이 줄어 현재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제주 방언을 연극에서 이렇게 생생하게 만나볼 줄이야. 신기하고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순간이었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놀라웠다. 극 내용의 특성상 <썬샤인의 전사들>에서는 성향이나 특성이 바뀐 인물들을 연기하는 배우가 많았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소속을 바꿔다니던 호룡이 그렇고, 활기찬 부산 소녀였지만 위안부로 끌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막이도 그렇다. 평범한 의대생이었다가 인민군 활동으로 빨갱이 낙인이 찍혀 처형당한 시자와 읽을줄도, 쓸줄도 몰랐지만 언니의 수첩을 받고 연극을 쓰는 시춘까지. 연극 속 모든 등장인물은 격동의 변화 속에서 자의로, 혹은 타의로 변하게 된 인물들이다. 분명 같은 인물이지만 배우들은 연기를 통해 인물의 내면변화를 섬세하게 담아냈다. 특히 호룡이 막이의 죽음을 목격하고 일본군에 입대하는 부분이나 자살을 시도하려던 시자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인민군복을 입는 부분, 제자와 함께 신명나는 춤을 추던 시춘이 고문으로 인해 말을 잃어버린 부분에서는 소름이 돋기도 했다.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은 인터미션까지 있는, 무려 150분 동안 진행되는 긴 연극이다. 연극의 내용 상 감정소모가 매우 큰 연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 동안 열연을 펼친 배우들에게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 극단 달나라 동백꽃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극단이지만 앞으로 연극을 선택할 때 믿고 관람하는 극단이 될 것 같다.

*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세상을 떠난 한승우의 아내와 딸 봄이는 계속해서 한승우에게 환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둘은 계속해서 한승우에게 이야기를 쓰라고 말한다. 고통스러워 하지만 이야기를 쓰면서 한승우는 역사를 돌이켜보고 자신의 상처를 끄집어내고, 후회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과정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힘든 과정이겠지만 과거를 돌이켜보고, 반성한 뒤 다시는 미래에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성찰이 아닐까?


[정선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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