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고독과 분노 끝에 남는 것, 갈증 [도서]

글 입력 2018.12.31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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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책을 읽는 과정은 상당히 괴로웠다. 영화에서는 눈을 감아버리고 귀를 막으면 다음 장면이 나오지만, 책은 눈으로 글자를 열심히 좇지 않으면 내용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 글에 진실된 소감을 적어내려면 내용을 꼼꼼히 읽어야 하기 때문에,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이 꽤 힘들었다.


이렇게 잔혹하고 아프고 독자를 여러 번 멈추게 하는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붕 뜬 마음으로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인물들을 극단에 몰아넣은 비극을 통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등장 인물



후지시마 아키히로는 가나코의 아버지이자 소설의 주인공이다. 아내의 불륜 상대를 폭행해 형사를 그만둔 뒤 경비 회사에서 일한다. 분노조절장애가 있어 약물에 의존하며 혼자 살아가던 어느 날, 딸을 찾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가나코는 가장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중심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가정 불화와 아버지의 강간, 그리고 남자친구였던 오카타의 죽음으로 약물과 매춘 사업에 관계되어 스스로 불행에 뛰어든다. 아사이는 후지시마의 옛 부하로, 후지시마에게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면서 그를 감시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눈치가 빠르고 행동력이 좋은 충실한 형사이다.

 

무나카타는 조직 이시마로의 우두머리로 가나코와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오카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으로 가나코를 조직에 끌어들이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세오타는 오카타와 같이 이시마로의 수많은 희생양 중 한명이다. 가나코에게 매혹되어 함정에 빠진 뒤, 약물 중독으로 결국 죽음을 맞는다. 오사나이는 신장질환이 있는 아들의 치료를 위해 조직의 청부살인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형사였던 살인범이다. 어머니 기리코는 딸을 그리워하고 소중히 생각하지만 그녀를 지켜내는 것에 버거움을 느끼며 친정으로 사건을 피해간다.

 

*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에 깊은 갈증을 느끼고 있다. 평범하고 남들 같기란 소설 속에서는 얼마나 어려운지,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이는 아무도 없다. 애초에 그 경계나 기준점을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듯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분노와 거의 모든 여성에게 성적욕망을 느끼고 표출하는 후지시마, 애정과 안정적인 휴식처를 상실한 가나코,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향한 원망과 불신, 불륜을 한 기리코-세 가족은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채워지지 않는 욕구와 욕망의 뿌리는 부모와 자식, 부부 사이에서 싹터 화살은 서로를 겨냥하고 결국 활시위는 팽팽히 당겨졌다. 방법과 과정에서의 차이는 있었지만 세 사람은 서로를 끝없이 할퀸다. 그 상처가 자신을 향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화살 끝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것을 자신을 방치한 부모에 대한 복수라 여긴 가나코는 아버지의 광기를 면밀히 이용하며 깊은 수렁으로 유인한다.

 


창으로 비쳐 드는 햇살이 따갑다. 화가 치밀 정도로 강렬한 햇살이었다. 커튼을 다시 쳤다.

그녀는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가슴 저 안쪽에서 영문도 모를 자신감이 솟구쳐 올랐다. 반드시 찾을 거야. 후지시마는 스스로를 향해 되뇌면서 그녀의 가슴을 거머쥐었다.


- 1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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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갈증>의 후지시마 아키히로

 

 

갈증은 곧 욕망이었다. 이들 가족만의 일은 아니었다. 무나가타도, 조직의 청부살인에 스스로 중독되어가던 오사나이도, 가나코에게 현혹된 동창생들도 마음에 큰 구멍이 뚫려 메울 방법을 몰랐다. 구멍은 점점 더 커져가 그들의 존재를 서서히 갉아먹었고 또 다른 무언가를 갈구하게 했다. 분노와 결핍이 해방구를 제대로 찾지 못했을 때의 가장 처참한 모습은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자극적이고 굴욕스런 모습으로 조직과 가나코의 희생양들은 죽어갔다.


가장 큰 구멍을 갖고 있어 주위 사람들을 구원의 손길로 가장해 매혹시킨 가나코는 블랙홀인 셈이었다. 관계의 중심이자 선과 악의 경계에서 한쪽 손은 구원을 향해 뻗고 다른 쪽 손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동굴을 가리켰다.

 


“우리는 뭔가가 부족한 사람들이야.”

“하지만 가나코는 아주 커. 우리보다 더. 뚫린 구멍이 너무 깊고 커서 주위 사람들을 휘감아 버리지. 내 말 뜻 알아?”


- p. 291


 

딸을 찾기 위해 놈들을 쫓기 시작했던 후지시마는 점점 자신의 딸에 대해 알아갈수록 더욱 망가진다.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갈증을 해결하고 원래 가족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초반의 후지시마는 점점 다른 존재에게 잠식된다. 약물에 중독되고 피와 살인, 강간의 냄새에 젖어들지만, 딸을 찾으려는 강한 욕망이라며 외면한다. 인간 존재의 끝없는 추락을 보여주며 그가 당하고, 저지른 악행의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최후에 그를 반겨주거나 안아줄 이 없는 길을 계속 달렸던 후지시마가 마주한 것은 딸의 죽음뿐이었다. 바로 자신을 부르며 금기를 깨뜨린 자에게 금기가 없다는 말로 웃으며 죽은 가나코는 이미 자신의 갈증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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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갈증>의 후지시마 가나코

   


“나는……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아냐,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누구든 사람을 죽여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있지. 숨기고 싶은 것이 있고. 가족이나 자기 자신. 자존심과 어둠에 감싸인 비밀. 당신도 그렇잖아?”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사키야마의 멍한 눈길이 자신의 혼 저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 311p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잔혹한 이야기의 끝. 결국 분노와 고독 끝에는 다시 갈증만 남았다. 작가는 자신의 외롭고 힘겨웠던 청춘을 짜증스럽게 되뇌이며 소설을 썼다고 했다. 인간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생겨 읽어보았다가는 작가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 같다. 해결되지 않는 사건의 연속, 일본 정서 특유의 이야기를 감추는 서술방식으로 인물의 심리를 파악하거나 의미를 읽어내기 어려운 부분들이 인내심을 시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뒤에 밀려올 진한 허무함과 냉소가 궁금하다면 한번쯤은 읽어보아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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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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