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섭식장애 이야기] 그 원인을 찾아서 #3

나의 사람, 그리고 그로 인한 외로움들에 대하여
글 입력 2019.01.03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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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이 있다.
 
익숙한 서울을 떠나서 단체 여행을 가서도 늘 멀리서 사진만 찍어주는 사람. 젊은 사람들이 가장 많은 거리로 친구들과 옷을 보러 갔을 때, 어쩐지 신난 것만 같은 친구들의 들뜬 모습을 보면서 피로함을 느끼며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 누가 봐도 친한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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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친구와 함께하는 그 순간에도, 함께 이야기하다가도 문득 혼자라고 느끼는 그런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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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엄한 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얼굴이 길었다. 말라서 더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움푹 파인 볼에는 살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산행을 좋아하셔서 다리에는 적당한 근육이 있어 탄탄해 보이셨다. 하지정맥류처럼 종아리에 핏줄이 울긋불긋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그 튀어나온 핏줄을 막아보곤 했다. 튀어나온 핏줄을 막으면 그다음 핏줄 부분은 어떻게 될까?

술을 마시면 그런 버릇이 있다. 볼록 튀어나온 주변 사람들의 핏줄을 눌러보면서, 때로는 쓰다듬으면서 그 시절의 할아버지를 떠올리곤 했다. 이 핏줄을 막으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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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무서운 사람이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서 피하는 그런 사람이었댔다. 할머니와 가족들을 모두 쫒아내고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폭군이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할아버지를 사랑하셨을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몸을 움직이지 못하시는 할머니는 우리와 전화통화를 하며 통곡을 하셨다. 할아버지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태우고, 할아버지가 살던 동네를 한바퀴 돌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갈 때, 할머니가 입원해있는 요양원에서는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보기 쉽게 침대를 최대한 들어올려주었다. 그토록 사랑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못하니 함께하지 못한 마지막 걸음을 얼마나 슬퍼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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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년 전, 2016년의 12월이었다. 방황하다가 제정신을 차려 차석장학금을 받았던 그 학기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시점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얼른 내려가야 하는데도 나는 그 상황에서 노래방을 갔다. 내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모르고 재미도 없이 흥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고 나오다 동기 두 명을 마주쳤다. 그 사람들에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걱정하는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슬슬 현실로 다가왔던 것 같다.

얼른 남부터미널로 달려갔지만, 8시간 동안의 차가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대학을 다니면서 그런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무작정 기다리다, 몇 분 간격으로 매표소에서 조금 앞 시간으로 예약을 하고 취소하기를 반복했다. 매표소 아줌마는 기계로 빨리 예약을 하고 자기에게 와서 취소하면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다행히 좌석들은 생각보다 취소가 잦아서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기다려서 차를 탈 수 있었다. 아침에 연락을 받았는데 고향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이었다.

아직도 그날의 장면을 기억한다. 방의 가운데에는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이 놓여있었고, 좌우에는 꽃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얼굴들, 엄마, 아빠, 삼촌, 이모, 작은외삼촌이 검은 양복과 검은 드레스를 입고 앉아있었다. 어른들은 나에게 먼저 절을 하라고 했다. 상에 놓인 향이 피어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절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 나는 그 상황에서도 지독하게도 나다운 말을 중얼거리며 절 같지 않은 절을 했고, 그 상황이 너무나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이제야 현실감각을 찾아서인지 울음이 터져버렸다.

할아버지의 형제분이 말하는 것이 들렸다. "그래, 손주들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그 중얼거림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잘했던가? 뭘 잘했지?

나는 신기하게도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우뇌와 좌뇌 모두가 독립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인듯한데, 지극히 이성적인 생각과 본능적인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다. 왜 저 픽셀은 '1자'인가 '!자'가 아니라, 와 같은 아무래도 좋을 이상한 생각과 함께, 도착해야 할 거리를 이성적으로 생각을 동시에 한다. 생각의 위치가 달라서 가능한 건가, 싶을 정도로 오차 없이 동시에 진행되어서 더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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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존재하기 때문에 힘이 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아니 사실은 모든 사람이 그렇다. 누군가는 위대하므로 존재해야 한다, 누군가는 세상에 아무런 이바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있기 때문에 소중하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에서 바라본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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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2학기에 팀플을 같이 하던 오빠는 주변에 친구들의 죽음을 자주 봤다고 했다. 나는 그때는 주변에 돌아가시거나 죽은 사람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죽음이 어떤 건지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죽음을 수도 없이 가까이서 본 그 오빠는 앞으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과 함께할 미래를 상상할 수가 있을까?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새로운 사람을 사귈 수가 없게 되었다. 그전에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인간관계를 더욱더 놓아버렸고, 모임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뒤에 남자친구를 사귀었을 때 나에게 상처가 무엇이냐 물어보던 그에게 나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오빠도 언젠가 죽을 거잖아." 하며 울었다.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관계란 헤어지기 위해 맺는 거라고 하더라. 헤어졌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만나는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그런 관계란 몇 개가 될 것인가? 애초에 그런 관계를 개수로 세려고 한다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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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장례식 때 3일 내내 울었다. 무슨 국인지 알기도 힘들 정도로 건더기가 없던 국을 먹으면서도 울었다.

오랜만에 내려간 고향에서 나는 6년 동안 키웠던 고양이 도리 이야기를 했다. 그때 동생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그리고 언니에게 눈짓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았다. 신기하게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말이란 것이 있었다. 평생을 같이 살았던 동생이었고, 우리는 어느 부분에서는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그게 더 잘 보였다. 도리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첫날은 할아버지의 시신을 볼 수 있었다. 장례지도사가 잘 닦아놓아 말끔해진 할아버지는 평소에 낮잠을 주무시던 모습과 똑같았다. 장례지도사는 이번 모습이 마지막이라며 곡을 하고,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지고 인사를 하라고 했다. 우리 가족들 모두가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곡은 몹시 어색하고 어설펐다. 너무나 형식적인 절차였고, 정작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는 시간 동안에도 누구도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귀를 만졌다. 할아버지가 낮잠을 주무실 때 몰래 만져본 그 귀와 촉감이 너무나 똑같아서 차마 돌아가셨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둘째 날은 방문하는 사람들을 반기고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엄마에게 수고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몇 년간 엄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를 집에서 모셨기 때문이다. 힘들었을 텐데도 엄마는 울었다.

셋째 날은 할아버지 시신을 태운 버스를 타고 고향과 동네를 한 바퀴 돌고, 할아버지가 평생 쓰던 밥그릇을 문가에 던져 부쉈다. 할아버지가 치매가 걸리셨을 때도 앉아있던 정자를 보며 우리는 울었다. 할아버지를 마주치면 용돈을 주곤 하던 그 길가에서도 울었다. 그토록 익숙한 동네를 할아버지의 눈에서 보는 것만 같은 걸음이었다. 그리고 시신을 태우는 곳으로 가서 태우는 동안에도 울었다. 장례지도사는 나보고 그만 울라고 했다. 그러고는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느냐고 물어보았다.

무슨 자격으로, 나의 추모 시간을 빼앗으려고 하는 거지?
장례지도사라는 자격이 있으면, 네가 지도하는 시간까지만 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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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같이 병원에 다녔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득실거리는 병원에서 함께 물리치료를 받고 영양제를 맞았다. 떠올려보면 그다지 아픈 데가 없었고 단지 잘 체하는 체질이었는데도 늘 병원에 다녔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최대한 아프다고 말하라고 했다. 늘 옆에서 엄마나 할머니가 나의 병에 대해서 말을 했고, 의사들은 못 이기는 척 약과 치료를 처방해주었다.

지금이야 그런 압박감으로부터 독립하긴 했지만, 그때의 나는 아픈 척하는 인형이었다. 엄마 또는 할머니가 진료 의자에 나를 앉혀두고, 옆에 서서 나의 질병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의사의 눈길이 나에게 올 때쯤, 나는 힘이 없어서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는 아픔을 연기했다. 그때의 내가 정말 아팠던 걸까? 지금 생각하면 의문이 든다. 그저 아파야 하는 구실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나.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병원을 가는 그 토요일 오전 시간 동안은 적어도 엄마의 눈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고, 정당하게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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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우고 나면, 할아버지가 태우던 쓰레기들에서 나오던 검은 연기처럼 검을 줄만 알았는데 새하얀 가루만 남아있었다. 누가 그 가루가 한때 사람이었던 거라고 믿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무 의미 없는 하얀 가루가 된 할아버지를 보며,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그렇게 만든 장례지도사에게 화가 났고 분통이 터졌고, 그러면서도 그게 당연한 순서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없애버렸다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야만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6년 키운 고양이 도리가 묻힌 곳, 할아버지가 살던, 우리가 사는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에 할아버지의 잔해를 뿌렸다. 할아버지의 새하얀 가루는 자연으로 돌아가기 싫은 듯 우리의 몸에 다 붙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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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외식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도리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모습으로 죽어있었다고 했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우리 도리는 집에서 밥을 주고, 자유롭게 바깥을 돌아다니는 애였는데 6년씩이나 험한 세상을 살다 보니 더는 차를 피할 힘이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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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서 운동을 하다 보면, 나에게 영역표시를 하던 그 아이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곤 했던 그 도리가 이젠 그 땅속에 묻혀있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동네 고양이들과 피 터지게 싸워서 몸 일부가 늘 상처투성이였던 그 아이를 보며 가슴 아파할 일이 더는 없다는 사실도. 무심한 얼굴로 길가에 앉아서 "집에 가자 도리"하면 졸졸 멀리서 천천히 따라오던 그 움직임도. 가족들과 동네 뒷산으로 등산하는 날이면 자기도 따라와서 개 때문에 함께 집으로 오지는 못했지만, 3일이 지나면 거친 털로 집을 찾아오던 도리가 더는 집으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사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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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장례를 치르고 올라왔을 때도 나의 학점을 걱정했다. 이번 학기는 정말 잘하고 있었는데, 이 일로 모든 게 다 망가지는 것만 같았다. 당시의 설계 교수님께선 이때까지 잘하고 있다가, 할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좀 못한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은 정년퇴직을 바로 다음 해에 앞두셨으니 죽음을 여러 번 보아서 그게 아무런 일도 아닐 것이다, 스스로 말해봤자 상처받는 사람은 나였다. 리포트를 쓰면서도 할아버지 이야기를 안 쓸 수가 없었고, 그러면서도 학점을 잘 받기 위해 장례식장의 건축물 재질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나였다.

도리는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중고등학교 친구들의 안부에도 도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전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도 한 번씩은 보았던 그 아이가 떠났다는 말을 차마 쉽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발 디딜 틈 없는 좁은 고시원 방 안에서, 안 그래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 좁고 컴컴한 방에 불을 다 꺼놓고 울었다.

그때부터 휴학하고 싶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가족들과 함께 1년이라도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나에겐 휴학하고 싶다고 말할 그런 용기도 없었다. 언니가 대학을 중퇴했으니 나라도 얼른 취업을 해야 해, 라는 아무도 심어주지 않은 강박관념이 남아 '쉬고 싶다'는 말도 내뱉지 못했다.

친구들이 왜 휴학을 안 하느냐고 물어보면 늘 엄마가 허락을 안 해준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니, 엄마에게 말했으면 허락을 해주었을 거야. 나는 두려운 거야.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왜? 그렇게 소중한 그들이 떠난다면, 나는 더욱 망가질 거니까. 떠날까 봐 더 가까워지지 못한다는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를 내가 하고 있다는 게 참 바보 같지만, 죽음은 나에게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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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구토를 하고, 연극을 보러 가는 버스 안에서 생각했다. 왜 먹기 싫은데도 먹고 구토를 할까?

보통 사람들은 구토하는 이유가 살찌기 싫어서, 다이어트 강박증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하는데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나 같은 경우는 정말 먹고 싶지 않은, 제대로 된 음식도 아닌 밀가루 반죽을 먹고서 토하기도 했으니까.

먹고 토하고 나면, 힘이 없으니까. 세상이 다섯 템포는 느려진 것처럼 온몸에 힘이 빠지고 생각이 둔해지고 이러다 길을 가면서 기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버스나 차가 나를 치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응급실에 입원하겠지. 그럼 가족들이 걱정하면서 휴학을 하라고 권하지 않을까. 결국은 내 마음속에 있던 것은 휴학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들의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었고.

누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느냐고 욕을 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이것이 먹고 싶은 것을 변명하는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이 믿건 말건 그것은 그들의 자유다. 나는 뭐든지 느린 사람이라 내 마음을 쉽게 파악한 적이 없었고, 이 마음을 인식한 뒤로는 구토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한 번이라도 먹고 싶지 않은, 다 익지도 않은 날것의 밀가루 2kg을 먹어본 적이 있는가? 3시간동안 고구마 1kg을 먹어본 적은 있는가? 그렇게 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나에게 '먹고 싶어서 먹어놓고 비겁하게 토하는' 사람이라는 욕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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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이 지나 2018년 11월 중순 무렵, 할머니가 욕창 때문에 입원을 하셨다. 입원하기 전에 엄마에게 전화했는데, 엄마가 우리 집에서 전화를 받지 않고 할머니네 집에서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언니에게 전화해서, 왜 엄마가 할머니 집에 있느냐고 울면서 물었다. 언니는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두 가지 이상의 생각을 동시에 하곤 한다. 그 순간에도 역시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당장 내일 처음 시작하기로 했던 고속버스터미널의 햄버거 레스토랑 아르바이트와, 이틀 뒤에 정해진 팀플과, 한 번만 더 빠지면 F일 게 분명한 수업 하나와 토요일에 있는 팀플들이었다. 그 팀플들을 취소했을 때 나올 나에 대한 무책임함, 아르바이트 첫날 빠지게 되는 그런 뻔뻔스러움으로 내가 평가받을 것이 두려웠다.

동생에게 전화했더니 동생은 며칠 뒤 밴드부 공연이 있는데도, 자기가 공연 MC이고, 여러 무대에 서는데도 불구하고 내일 당장 시간을 내어 내려간다고 했다.

나는 그 날 종일을 고민하다가 남자친구에게 울면서 말했다. 남자친구는 나보고, 네가 할머니를 봐야겠다고 한다면 다른 걸 다 못한다고 얼른 말하라고 했다. 모든 걸 다 포기하고서라도 할머니를 봐야 한다고 하면.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취소하고, 여러 개의 톡에 들어가 팀플을 못하겠다고 하고, 교수님께 말씀을 드려놓았다.

그런데 막상 다음날 내려가려고 터미널쯤 갔을 때, 엄마가 나보고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 급하면 연락을 준다고. 나의 일정이 다시 모든 게 흔들렸다. 이미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지나버렸고, 수업을 위한 과제를 하기에도 빠듯했다. 이미 아침을 먹었지만, 남부터미널에서 핫도그 하나를 먹은 것을 시작으로 44일 동안 멀어져 완치판정을 받은 섭식장애의 굴레로 다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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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지금 아직 살아계신다. 여전히 우리 집안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걸그룹 다리처럼 마른 다리이고, 얼굴도 몸도 모든 게 작아져 버리셨지만. 몸에 주삿바늘을 여러 개 꽂고, 그 줄을 끊기 위해 손톱으로 갈고 계시지만. 간호사가 또 아프게 할까 봐 다가오면 소리를 지른다고 하시지만, 그런 할머니를 봤을 때 안심했다.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 돌아가실까 봐 걱정을 수도 없이 했다. 상담선생님께서는 엄격했던 엄마 대신, 걱정과 사랑을 무한히 주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의 정서적 지지자이신 것 같다고 했다.

그분들은 내가 영양제를 맞는 동안, 물리치료를 받는 동안에 아무런 공부를 하지 않아도 혼내지 않았다. 머리를 염색하고 치마를 짧게 입고 다녀도 훈계를 하지 않았다. 같은 키에 다른 친구들보다 10kg이나 많이 나가는 나에게 늘 말랐다고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해서, 나는 그 흔한 트라우마도 없었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마른 사람인 줄만 알았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위를 가진 줄만 알았다. 친구들 할머니 집으로 데려와 저녁을 같이 먹을 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분들을 이용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정당하게 공부를 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 엄마의 눈을 피해서 그래도 어른들에게 밝히는 거니까 괜찮다며. 나의 가장 큰 지지자이자 도피처였던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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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니까 6년 전, 할머니가 길가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척추를 아예 못 쓰게 되었다. 그때부터 엄마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보살펴야 했고, 자연스럽게 나에게 더는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모든 걸 내가 선택해야 했고, 갑작스레 엄마의 관심에서 벗어나 버렸다. 내 삶의 기준이자 지침이었던 엄마가 사라지자 두려웠던 것 같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질투했던 것 같다.

"요즘 누가 집에서 어른들을 모시느냐"고, "요양원을 보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엄마를 걱정해서가 아닌, 엄마의 관심을 받기 위한 나의 처절하고 멍청한 몸부림이었다. 정작 나는 그들 아래에서 사랑을 받아왔지만, 나를 규제하고 제어하는 사랑을 받기 위해서 하는 질투였다. 질투해서는 안 될 대상들을 질투해온 나에게 내리는 벌. 그 모든 것들을 깨달았을 때 느낀 죄책감. 그리고 그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한 행위들이었다.

너무나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또 그러면서도 비정상적인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자친구에게 사랑을 느끼면서도, 늘 고향에 내려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그 증거다. 엄마의 사랑, 엄마의 관심, 이제는 그것에서도 자립하고 졸업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 되지가 않다.

네가 알아서 해라, 라는 말을 들을까 봐. 엄마가 나를 받아들일 것은 알지만,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지만, 사실은 내가 스스로 정해서 사는 게 두려울 거란 것은 알지만.

그 모든 책임이 새로운 선택을 하는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실패를 한다면 엄마를 원망하고 탓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모든 감정을 알고 있기에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 사랑하면서도 원망할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한 겁쟁이의 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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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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