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가장 변두리에서 온 빛, 키스 해링展

키스 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말하다
글 입력 2019.01.07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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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제,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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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dragon의 타투


어딘가 익숙한 그림 아닌가? 우리는 이미 각종 미디어를 통해 이 그림을 수없이 보아왔다. 이 그림은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작품 무제(Untitled)이다. 단순하지만 명료한 그림체로 사랑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이 작품은 가수 지드래곤의 타투로도 유명했다.

인터넷에 키스 해링을 검색하면 그의 작업 자체보다 그의 작품을 몸에 타투로 새긴 사진과 어린아이들이 그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사진이 가장 먼저 뜬다. 자신의 몸에 새기는 타투는 아주 신중히 고르는 게 보통이다. 그렇기에 해링의 작품을 타투로 새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작업이 뜻깊고, 대중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은 해링의 예술이 순수미술을 넘어 일상 속에 스며들어 친근함을 가진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렇듯 키스 해링의 작업은 평론가와 미술애호가를 넘어 몸에 문신을 새기는 이와 아이들의 마음마저 사로잡았다. 대체 그가 누구이고, 그의 작업은 어떤 의미를 지니길래 그의 그림을 몸에 새길 정도로 사랑받는 것일까.

 

Keith h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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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미국은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는 사회였다. 이에 대항하여 반문화 미술이 늘어갔고 키스 해링은 그 당시 왕성히 활동한 작가였다. 키스 해링은 뉴욕 지하철역 주변의 낙서에 흥미를 느꼈다. 요즘이야 거리의 화가라면 가장 먼저 뱅크시가 언급되지만, 키스 해링 또한 거리의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며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항상 대중 친화적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소재부터 단순화된 표현으로, 미술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법이다. 그 작업에는 언제나 대중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동성애자이자 에이즈 환자였던 그는 자신을 둘러 싼 상황을 사회적인 문제로 다루며 사회 전반의 운동을 펼치기도 했고 정치적인 이슈를 작품 전면에 반영하기도 했다.

그의 화풍은 만화에서 영향을 받아 강렬한 원색, 단순한 표현으로 대표된다. 만화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친근함을 얻기도 하고 만화 특유의 풍자성을 얻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점차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오늘날 앤디 워홀과 같이 현대 팝아트의 거장으로 거론된다.



Pop 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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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스 해링 재단 (http://www.haring.com)


해링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 대중의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에이즈부터 동성애, 전쟁의 위협에 대한 이슈를 적극적으로 작업에 반영했다. 그리고 그의 예술을 누구나 공평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팝 숍(Pop Shop)이라는 가게를 열어 자신의 작품을 유통하고 다양한 상품에 접목하여 대중이 쉽고 빠르게 작품을 접하도록 했다. 그런 그의 노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9년 해링이 설립한 키스 해링 재단은 그가 죽고 난 뒤에도 그의 작품을 보존하고 유통하여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와 에이즈 환자에게 기부금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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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직 하우스&키스 해링 콜라보


더욱 상업적인 면에선, 그의 작업은 언제나 선호도가 높아 여러 곳에서 응용되어 소비된다. 그 예로 2011년, 베이직 하우스와 콜라보레이션한 티셔츠와 굿즈는 한국에서 키스 해링의 그림체를 더욱 유명케 하기도 했다.



AIDS


오노 요코의 말을 빌리자면, 키스 해링은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밝고 위트있게 표현한 작가이다. 해링은 자신의 예술에 동성애와 에이즈라는 사회적 이슈를 녹여내어 단순하고 유쾌하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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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gnorance=Fear, 1989


해링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하고 활동했다. 지금보다 더 보수적인 시대에서 성 소수자인 해링은 사회 변두리에 존재했다. 게다가 에이즈, 후천성 면역 결핍증(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에 걸린 성 소수자는 사회에서 눈초리 받는 가장 저편의 이방인이었다. 그는 가장 소외당하던 '소수자'였고 세상의 변두리에 속하는 사람이었으나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작품을 만들어 낸 작가가 되었다. 이것이 뜻하는 의미는 단지 한 사람의 성공이 아니다.

해링의 작업이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주는 만큼 그가 말하는 에이즈, 성 소수자에 대한 외침은 빛을 발하는 것이다. 낡은 관습을 타파하고 모두가 예술을 누리기 바랐던 그의 바람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누군가는 그의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사들이고 또 다른 이는 자신의 신체에 그의 그림을 그려 넣는다. 해링, 그는 아주 친근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전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일상 속에 스며든 가장 성공적인 작가이다.



키스 해링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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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번 <키스 해링> 전에선 어떤 점을 주목하여 봐야 할까?

1. 해링의 작품 속에서 그가 어떤 말을 하고자 했는지를 주목하자. 어떤 작품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2. 키스 해링이 활동했던 1980년대의 사회상을 인지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중요하다. 당시 어떤 사회였는지, 어떤 문화 속에서 해링의 작품이 호응을 얻었는지, 해링의 사회운동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그렇다면 당신은 그의 캐릭터를 소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이 의도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3. 그의 작품과 콜라보레이션 한 상품들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그는 생전 팝 샵이라는 가게를 통해 대중과의 소통을 꿈꿨으니, 그의 작업으로 이루어진 상품을 소비하는 것은 그가 꿈꾼 예술의 일종일 것이다.

4. 1990년, 키스 해링은 31세의 나이에 에이즈로 사망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예술가에게는 항상 ‘만약’이라는 부제가 붙는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어떤 사회활동을 했을까? 그것을 상상하며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잊지 말자.





키스해링
-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 -


일자 : 2018.11.24 ~ 2019.03.17

시간
10:00~20:00 (19:00 입장마감)

장소
DDP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티켓가격
성인 13,000원
청소년 11,000원
어린이 9,000원

주최
키스 해링 재단
나카무라 키스 해링 미술관
서울디자인재단, ㈜지엔씨미디어

관람연령
전체관람가


[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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