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현실이라는 이름의 새장 [기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누구나
글 입력 2019.01.15 11:3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나는 ‘현실적’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것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알량한 편견과 잣대로 다른 사람을 재단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명분이 되는 게 바로 이 ‘현실적으로’다. ‘현실적’이라는 개념은 ‘객관적’이라는 개념과 완벽히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개념은 쉽게 혼동되는데, 주로 부정적인 오지랖(긍정적인 오지랖도 있다고 생각하는지라)을 시전 하는 사람들이 “너에게 객관적인 조언을 해줄게~”라며 자신의 잣대를 들이댈 때 많이 붙는 수식어도 바로 이 ‘현실적으로’다. 아 물론 정말 경험에서 우러나온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고마운 분들도 많지만, 현실을 빙자한 '부정적인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도 참 자주 만난다. 이걸 직접적으로 느꼈던 게 과거의 내 친구로부터였다.

 

나에겐 항상 ‘현실적인’ 생각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기준은 사회의 전형적인 기준과 정확히 일맥상통했다. 어차피 외딴섬에 혼자 사는 게 아닌 사람이니 사회의 기준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려고 맘먹어도 그게 쉽지 않고, 꼭 사회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친구의 ‘현실적인’ 기준에는 보편적인 통념 사이 사이에 교묘하게 들어가 있는 본인의 편견까지 포함되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그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고 그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을 한심하게 여겼다. 자신의 가치관대로 상대를 재단하는 습관이 있는 이 친구는 '현실적으로'라는 말을 참 자주 했다. 결국 그 친구와 나의 관계는 어느 순간 그 친구 앞에서 “내가 어떻게 평가될까?”라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 후로부터는 끊어 졌다.

 

나의 친구처럼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잣대를 ‘현실적인 조언’이라는 말로 포장하며 절망 쉽게 상대방을 평가하는 사람들 꽤나 많다. 그리고 이들이 내뱉는 말은 보통 한 문장으로 축약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넌/그건 안돼

 

내가 새로운 꿈을 정했을 때, 그에 대해 누군가가 나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한다고 해보자. 그 조언이 도움이 되는 진짜 ‘현실적인 조언’인지, 그냥 나의 가능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말뿐만 현실적인 말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현실은 경험에서 나온다. 걱정, 고민, 추측, 평가에서 나오지 않는다. 진심과 경험이 담긴 조언은 그 조언의 맺음말이 부정적이든 아니든 진짜 ‘조언’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진심과 경험이 아닌 자신의 가치관대로 쉽게 평가하고 내뱉는 ‘현실적으로’는 영양가 없는 잡음일 뿐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나를 대하는 나에게도 적용이 된다.



냥.jpg
illust 이맑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우리 스스로를 ‘현실’이라는 틀에 집어넣어버린다. '현실적으로'란 말을 사회가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틀과 동일하게 여기고, 그 틀을 ‘선택’해서가 아닌 ‘조바심 때문에’ 들어가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그걸 ‘현실적’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이름은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틀이 되어 그 너머의 것을 단념하게 만들어버린다.


나는 대학생 시절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조바심 때문에 수업만 열심히 들었던 적이 있다. 나의 조바심의 원인은 간단했다. 꿈이 없었고 목표가 없었다. 목표가 없으니 불안했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없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몰랐다. 그때 선택했던 게 학점에 치중하고, 취업준비를 하자였다. 그런데 신기한 게 같은 것들을 하는 데도 자신의 목표가 뚜렷한 학생들은 나와 똑같은 과정을 겪고 있으면서도 나와 달랐다. 더 확고했고 더 에너지 넘쳤고 더 단단했다. 그 모든 게 일상에서 묻어났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도 현실적으로 살고 있으니깐"이라고 다독였다. 결국 졸업하고 나서야 한 가지 사실이 와 닿았다. 나는 목표가 없기에 조바심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의 꿈을 찾으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았다. 그리고 꿈을 꾸기도 전에 '현실적으로'라는 명목으로 외면했다. 나는 ‘현실’이라는 이름을 합리화하는데 쓰고 있었다.

 

적어도 ‘현실적으로’란 단어는 경험해본 자만이 말할 수 있는 말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 하고 싶은 것들을 해보기도 전에 외면하고 있는 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써선 안 된다.

 

‘현실적으로’에 내포되어 있는 가장 대표적인 생각은 이거다. “가능성이 낮아.”

그리고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꿈꾸는 사람들에게, 나 자신에게, 쉽게 말한다.

그건 힘들다고 많은 사람들이 실패한다고.

맞다. 도전이 항상 성공이란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다. 성공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외면하기 위한 도구로 ‘현실’을 사용하진 말자.

 

조바심이라는 한계

현실이라는 이름의 틀


‘현실적으로’라는 말을 나 스스로에게 하는 순간

나는 ‘현실’이라는 새장에 갇혀버린다


꿈과 이상을 좇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게 아니다


새장 밖에 있는 새의 삶 역시 불확실하지만

새장 안에 있는 새의 삶은 뭘 해도 새장 안이다

 

내가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무언가를 향해 ‘나아갈 수는 있다’는 사실만큼에는 한계를 씌우지 말자.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누구나





아트인사이트에디터태그_이민희.jpg
 

[이민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