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옥상에서 만나요, 시스터. [도서]

글 입력 2019.01.1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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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44


결혼, 정말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결혼하는 것이 당연한 삶이니까 했다. 미숙한 존재인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하기도 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삶을 위해 했다. 결혼하는 이유는 때로는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나기도 하다.

<웨딩드레스 44>는 하나의 웨딩드레스를 거쳐 간 44명의 여자의 이야기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여자들이 있다. 이 드레스를 입은 열다섯 번째 여자는, 결혼 생활이 ‘굴욕’이라고 말한다. 사랑과 안정 그 화려함으로 포장된 결혼은 사회 유지를 위한 제도일 뿐이다. 그 제도에 고개 숙인 여자에게 이 사회는 또 참 많은 당위를 들이민다. 가부장제 아래의 결혼에서 여자들은 굴욕적이기 쉽고, 생각보다 많이 불행해질 수도 있다.

열 여덟 번째 여자의 청첩장을 받은 친구는 동성애자이다. 결혼 제도를 비난하는 여자에게, 친구는 그래도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 둘이 계속 함께하기로 했다고 세상에 외치고 싶다고. 그러니까 결혼은 누군가를 사회 속에 가두고 당위를 부여하지만, 열심히 누군가를 배제하기도 한다.

결혼은 어쩌면 잔인할 만큼 무서운 제도이다.

나는 43번째 여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도 커피를 참 좋아하는데, 한번 입으면 벗기가 너무 힘든 그 드레스 때문에 커피 한 잔 마시지 못하고 참아야 하는 결혼식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해봤다. 아름답다 못해 인형이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그 불편한 드레스는 결혼식이 끝난 후에 벗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할 수많은 이유가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나에게서 커피를 빼앗아 가는 웨딩드레스 따위는 절대 입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효진


효도 ‘효’에 다할 ‘진’. 주인공인 효진 이름의 뜻이다. 신생아에게 씌운 그 명령어처럼, 우리는 엄마에게, 아빠에게, 그리고 사회에게 ‘효진’ 같은 명령어를 입력받으며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명령어로부터 효진이는 도망친다. 줄곧 도망치는 와중에도 한결같이 좋아했던 단 것을 만들기 위해 도쿄로 향했다. 예고된 불행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좋아하는 것을 찾아 ‘잘’ 도망치는 효진이는, 용기가 있었다. 나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아빠가 끔찍하다고 말할 용기, 엄마를 위해 나를 포기할 정도로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용기가. 새로운 세계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도망이, 그 도망을 하는 효진이 부럽고 멋있다. 더불어 그녀는 행복할 거라는 확신이 든다.



해피 쿠키 이어

이 소설집에는 ‘정세랑’ 표 판타지물이 몇 개 수록되어 있다. 그 중 <해피 쿠키 이어>를 재밌게 읽었다. 유일한 남성 주인공인 ‘이스마일’은 한국 의대에 실습을 나온 아랍인이다. 이스마일에게 명예살인에 관해 묻는 교수, 주사를 맞으려 하지 않는 환자들 등 이방인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차별적인 시선들이 담겨있다.
 
이스마일은 명확히 이방인인 화자이지만, 그에게서 경계심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는 사랑스럽다.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계형의 권유로 아르바이트하게 된 과자 공장에서 사고를 당해 귀 반쪽을 잃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가장 친한 친구는 계형이다. 콩을 먹지 못하는 여자친구를 걱정하고 기꺼이 요리해준다. 아무도 존중하지 않았던 그녀의 결단도 긍정하고, 자라나는 과자 귀를 그녀에게 기꺼이 내어주면서 살이 오르기를 바랄 뿐이다. 다가올 이별에도 남겨질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이 좋다.

반쪽이 날아간 이스마일의 귀에서 과자가 자라난다는 판타지는 정세랑 작가가 선보이는 그만의 따뜻하고 다정한 상상력을 잘 나타낸다. 비극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비극의 원인을 누구에게로 돌리지 않고, 그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버리고 하나의 주체로서 사랑하고 함께하는 이야기이다. 어쩐지 나도 이 이야기들과 닮은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

책에 묻어 있는 이야깃거리와 고민이 나의 것과 맞물린다. 나와 같은 고민을 누군가가 함께 치열하게 하고 있다는 것, 나는 지금 혼자만의 고립이 아닌 우리들의 연결로 향하고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또 든든하다. 포기와 죽음의 옥상이 아닌, 따뜻함과 다정함이 흠뻑 묻어나는 옥상에서 나를 기다리는 ‘언니’들의 이야기들이 좋다.

얼마든지 더 듣고 싶다.


[조연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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