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는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우린 늘 누군가가 필요하다
글 입력 2019.01.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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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을 보고





작년 5월, 유럽에서의 일이다. 한 달의 여행 기간 중 유럽에서 목격한 가장 이국적인 풍경은 길거리의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서로 손을 맞잡은 남자들, 다리 전체에 문신을 한 할머니, 휠체어에 탄 사람들... 한국의 길거리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유럽의 거리엔 가득했다. 진정한 혐오는 결국 우리 눈에 안 보이게 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한국엔 얼마나 많은 얼굴들이 지워지고 삭제되어 왔을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쥐 죽은 듯 살아가길 강요당한 사람들. 그 수를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이 되면>은 우리의 시야에서 지워져온, 바로 그 삶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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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열세 살의 나한테

이렇게 말한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제 가족들과 떨어져

외딴 산꼭대기 건물에서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살아야 해.


그게 가족의 결정이고

너에게 거부할 권리는 없어.

네가 장애를 타고났기 때문에.


-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 中



중증 발달장애를 갖고 있는 혜정과 그녀의 둘째 언니 혜영,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은 18년 만에 이뤄진 두 사람의 동거 기록이다. 다큐멘터리에, 소재는 장애인이라니, 말만 들어도 연상되는 어떤 이미지들이 있을 것이다. 불편하고 괴롭고 계몽적이며 교훈적인... 방금 떠올린 모든 건 다 잊자. 이 영화에 위대한 변화, 대단한 발견은 없다. 처절한 신파도 미치겠는 감동도 없다. 그저 두 자매의 웃기고 씁쓸하고 행복하고 지치기도 하는 평범한 일상이 담겨있을 뿐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지만 믿지 않았던 일상이 이 영화 속에 있다. 그것도 무지 신나고 밝은 얼굴로 말이다.


15년 만에 시설 밖으로 나온 혜정은 과연 진짜 사회인이 될 수 있을까? 무사히 살고, 무사히 늙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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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은 취향이 분명한 사람이다. 커피를 좋아하고 (특히 믹스커피), 스티커 사진을 찍고 싶어 하며, 트로트를 좋아하고, 댄스를 사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런 맛에 요즘 사람들이 브이로그를 보나 싶을 정도로 재미있어서 도무지 그들의 일상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다큐멘터리, 그것도 장애인을 다루는 다큐를 보면서 이렇게 웃어도 되나 싶은 마음에 눈치를 보며 소리 죽여 웃었다. 하지만 혜정의 일상에 몰입하고,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 알 것 같다는 친근함을 느낄 때쯤 불편한 사실이 떠올랐다. 이렇게 역동적이고 유쾌하며 취향이 분명한 혜정이, 그동안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시설에서 살았다는 사실이다.

위협적일 수도 있기 때문에. 사회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사회에 차별이 만연하기 때문에. 혼자선 살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장애인을 격리시킨다. 그들은 어떻게 살지 궁리를 해 볼 겨를도 없이 마치 유배 가듯 어둡고 막막한 곳으로 갇힌다. '장애인들은 차라리 격리되어 사는 것이 본인들에게도 좋아.' 이런 말은 마치 '일가족 동반 자살'이라는 말이 주는 섬뜩함과 닮아있다. 이런 환경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는 어른의 판단하에 동반 자살되는, 아니 살해되는 아이들의 소식을 우리는 심심찮게 뉴스에서 볼 수 있다. 타인의 삶을 멋대로 추측하고 단정 지어 선택권조차 주지 않고 결정을 내려버리는 일. 우리는 그런 걸 '폭력'이라고 부른다.

아래는 혜정을 시설에서 데리고 나와야겠다고 결심한 이유에 대한 영상이다. 말씀도 기가 막히게 잘하시는 정혜영 감독님의 이 인터뷰 영상, 모두 꼭 보시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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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는 'I got everything'이라는 이름의 카페가 두 군데 생겼다. 정신 장애인들이 바리스타가 되어 주문을 받고 커피를 만드는 카페다. 처음 인천 시청에 이 카페가 시범 운영되었을 때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고 한다. 정신 장애인이 카페를 한다고?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서 또 의심했다고 한다. 저 사람들 진짜 정신 장애인 맞아?라고. 맞다. 그들은 정신 장애인이고, 그들은 카페에서 일을 할 수 있다. 조금 느리지만, 그들은 꽤 폼 나는 바리스타가 될 수 있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급여를 지급받을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노동자'라고 부른다. 장애인도 노동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에 귀를 기울이는 정책 결정자들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편견만 없다면 말이다.


나 역시 편견 덩어리다. <어른이 되면>이 시작했을 때 난 영화 속 혜정의 친구들이 어떻게 혜정과 친구를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나는 장애인 친구를 가져본 적도 없고 또 어떻게 친구가 되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도와줘야 할 사람이지 친구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애초에 어울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 영화 속 혜정의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해도 돼?', '저게 맞는 건가?' 등등 많은 물음표를 떠올려야 했다. 너무 딱딱하게 굴면 거리를 두는 것 같고, 너무 잘해주면 동정하는 것 같고. 하지만 영화 후반부쯤 깨달았다. 나의 이런 태도조차 그들과 나를 구분 짓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 공포와 두려움은 환상이다, 그리고 과도한 친절과 시혜 역시 환상이다.


장애인과 친구가 되는 일은 친구가 되겠다고 마음먹으면 되는 거였다. 장애인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은 다른 사람들 대하듯 하는 거였다. 특별히 동정하고 조심스러워할 이유도, 배척하고 거리를 둘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혹시라도 차별적인 발언을 하게 되진 않을까 엄청나게 신경 쓰며 노심초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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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에는 혜영이 만든 많은 곡들이 나온다. 그중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이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곡이다. 상냥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가사는 최근 들은 가장 멋진 바람이었다. 별거 아니지만 위대한 결심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과연 우리 중 몇 명이나 이렇게 살고 있을까. 나는 나 자신에게 되물었다. 나는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아

상냥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

모두가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


흐르는 시간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네


언젠가 정말 할머니가 된다면

역시 할머니가 됐을 네 손을 잡고서

우리가 좋아한 그 가게에 앉아

오늘 처음 이 별에 온 외계인들처럼 웃을 거야


-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by 장혜영)



혜영과 혜정은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상냥함을 잃지 않으면서, 다치지도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노래하는 혜정의 웃음은 마치 '나 여기 있어요'라고 손을 흔드는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따라 손을 흔들 뻔했다. 노래 잘 들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 좋겠다. 극장에서 보지 못한다면 VOD를 받아서라도 봤으면 좋겠다. 이런 영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런 삶이 있다는 걸 알고, 내가 느낀 작은 깨달음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혜영과 혜정, 그들의 위대한 도전과 용기에도 박수를 보낸다. 언젠간 이런 일에 용기가 필요하지도 않고, 이런 일을 도전이라 부르지도 않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






영화 정보


제목: 어른이 되면 (Grown Up, 2018)


관람객 평점: 9.79 (네이버), 9.9 (다음)


장르: 다큐멘터리


러닝타임: 98분


감독: 장혜영


주연: 장혜정, 장혜영






상영관 정보


- 인디스페이스 (서울)

- 아리랑시네센터 (서울)

- 에무시네마 (서울)

- 판타스틱 큐브 (부천)

- 인디플러스 (천안)

- 대전 아트시네마 (대전)

- 오오극장(대구)

- 영화의 전당 (부산)

- 광주 독립영화관 (광주)

- 메가박스 제주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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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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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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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하는스누피
    • 잘 읽고 갑니다:)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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