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팔이] 10화: 덕업일치 된 자의 최후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일은 일이었다.
글 입력 2019.01.18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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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영화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갑자기 우울해져서 이유를 되짚어보면 이틀 이상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일 때가 종종 있을 정도이다. 이런 내가 영화 일을 꿈꾸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한마디로 ‘덕업일치’가 된 셈이다.

덕업일치가 된 삶은 즐겁다. 영화와 드라마와 책과 웹툰을 마음껏 누려도 ‘난 지금 공부하고 있는거야 ^^’라며 합리화할 수 있다. (실제로 이게 공부다.) 특히 레퍼런스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헤집고 다닐 수 있을 때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길 정말 잘했다 싶다.

굉장히 복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다는 것은 분명 굉장한 축복이다. 운 좋게도 고등학생 때부터 콘텐츠 쪽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해서 문과를 선택하고 전공을 선택할 때도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진로를 찾아가고 있을 때 나는 이미 진로 관련 경험을 쌓고 있었다.

이러한 사연을 알게 된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좋아하는 일 하고 있어서 좋겠다.’고 말이다. 사실이다. 좋다. 하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결국 일은 일이라는 것을 난 요즘 들어 자주 느낀다.



10화: 덕업일치 된 자의 최후


취미를 취미로서 남겨놓고 싶어 좋아하는 일을 일부러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어릴 때는 그들이 이해가지 않았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취미를 아름답게 보존하고 싶은 그들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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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일보


취미가 업이 되었을 때 받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조차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영화를 보려고 해도 무엇이 다음 주 기획안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지가 가장 중요한 선정기준이 된다. 유행하는 드라마 역시 단순 오락거리가 아닌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꼭’ 봐야 하는 공부가 되다보니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가장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콘텐츠 일을 업으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콘텐츠를 더 많이 보는 친구들을 만날 때이다. 콘텐츠 산업의 특성 상 비전공자이더라도 전공자 이상의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영화 덕후, 드라마 덕후, 웹툰 덕후 등등 말이다. 그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스스로의 부족함이 느껴질 때면 정말 그만한 스트레스가 없다.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싶어서 말이다.

제 아무리 덕업일치가 되었다고 해도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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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 때문에 웹툰을 뒤적이다가 다음에서 연재되었던 작품 <나빌레라>를 만났다. 어린 시절의 꿈을 쫓아 발레를 시작한 70살 할아버지 심덕출의 이야기이다.

무용단에 합류하게 된 덕출은 모든 것이 마냥 즐겁다. 동료들이 연습하는 것을 구경만 해도 즐겁고, 혼이 나도 즐겁다. 그에게는 동경만 하던 발레를 직접 해볼 수 있는 이 순간이 마냥 꿈만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발레를 점점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력도 비약적으로 늘어감에 따라 덕출은 조급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침내 정식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졌을 땐, 그렇게 바라던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두렵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덕출이 누군가. 이래 뵈도 인생 70년차 베테랑 아닌가. 덕출은 금방 마음을 추스른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다음과 같은 대사는 내 가슴에 정통으로 날아와 박혔다.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그건 취미지.
즐겁고 행복하지만 무섭고 긴장되고, 실패하면 아쉽고 분한 건 그게 꿈이라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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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제 아무리 업으로서 좋아하는 일을 택했다 해도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을 기대했던 것은 나의 욕심이었을 것이다. 일은 어쨌든 일이기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로 인해 더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를 일이다.

“일에 너무 큰 의미부여를 하지 말고, 그냥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예전에 참여했던 강연에서 모 영화감독님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덕업일치 된 자들이 종종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일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일을 그만큼 좋아하기 때문이리라. 좋아하니까 욕심나고, 욕심나니까 부족한 점이 보이고,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일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이루는 여러 가지 색채 중 하나일 뿐이다. 일로 인해 인생에 있어서의 또 다른 소중함과 즐거움을 놓치게 된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이 어디 있을까.

해서 난 요즘, 아무리 좋아하는 일일지라도 일과 어느 정도의 적절한 거리감은 유지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아무리 덕업일치가 된 삶일지라도, 일에 매몰되어 버리는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은 아니니 말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여유. 재미가 없어진다면 언제든 다른 일로 돌아설 것이라는 배짱. 이것이 내가 더욱 오래도록 즐겁게 덕질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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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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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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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하는스누피
    • 잘 읽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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