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 그리고 나에게 [문화 전반]

글 입력 2019.01.2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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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웠다. 사랑스러움이 묻어나는 사람이. 얼굴이든, 말이든, 분위기든 콕 집어말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 대화를 지켜보다 떠오른 것이었다. 나에게는 도통 찾아볼 수 없이 결핍된 것. 내가 잘 하지 못하는 것. 결이 다른거지. 모두가 똑같을 순 없는거잖아. 생각을 풀어내다 멈춰섰다.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는 왜 다른가. 왜 나의 결마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가.

물론 공통점도 꽤 있다. 하나를 시작하면 진득하게 한다는 것, 여리여리함보다는 장부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것. 눈치가 없어서든 알고도 그러든 직설적이라는 것. 낯선 사람이든 어른이든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 그러나 정반대의 평가도 있는 것이다. 내가 꽤 우울한 사람이고 감정기복이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런 말에 놀라곤 하기도 했다. 너는 활력소 같은 존재이고 늘 신나보인다고. 혹자는 내가 어른스러워보인다고도 말한다. 정말 이상한 일에 소심해져 고민을 많이 하는 내가 우유부단하고 내성적인 것 같아 답답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는 커녕 자신에 차 있는 줄 알 때도 있다. 친구가 많지 않은 편이라 하면 니가 무슨 친구가 없냐고 한다. 그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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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떠오르는 이유는 세 가지. 내가 나를 잘 모르거나, 내가 나를 잘 숨겨서 남이 날 잘 모르거나, 그리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거나. 몇 가지 골칫거리를 빼면 나에게 만족하고 있다. 뭔가를 잘 잃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말이 꽤 빠른 편인 것, 말이 많은 것,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 것(낯은 안가리지만 ‘눈동자 낯’은 가리는 모양), 간이 콩알만해서 남앞에 서면 긴장하는 것,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것 등등. 그렇다면 내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것을 나열하라면? 음...위에 나오는 것들? 이렇게 바로 나오지 않는다.

사랑은 내게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랑보다 조금은 가벼운 호감이나 좋아하는 느낌마저도. 저절로 주어진다기보다는 뭔가를 잘하거나 뛰어날 때, 고생했을 때, 나를 남을 위해 희생하거나 배려했을 때, 똑부러진 모습을 보였을 때. 그 모든 것을 능력이라 칭하자면 능력이 있을 때 주어지는 것이었다. 아주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 날 좋아한다면 이유가 궁금해졌다. 정말 말 그대로 궁금했다. 나 같은 게 뭐라고 좋아하냐는 자기비하식의 생각은 아니었다. 내가 왜 좋냐는 질문의 정답은 그냥 이유없이 당신이라서 좋아하는 거라는 걸 수년간의 책의 문구나 드라마 대사로 학습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배운다고 우리 마음에 곧이 곧대로 내 것이 되지는 않으니까. 듬직하고 끈기있고 열정이 있는 모습이 좋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그러면 나의 특징 중 하나인 비틀어 듣기 혹은 상상의 나래 펼치기(대체로 김칫국보다는 비극적)가 활성화되어버리는 거다. 내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불특정다수의 당신은 나를 좋아할 수 있을까? 내가 무능력해지면 말이다. 자신이 없었다. 뭘 믿고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은 쉽게 변한다. 있는 그대로의 너가 좋다는 말이 괜히 대단하고 멀게 느껴지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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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나 좋아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을 때도 있다. 나쁘지 않게 불편하지 않게 지내는 정도도 충분할 때도 있으니까. 그게 어려울 때가 있다. 원인이 결정적으로 누군가의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동이라면, 그건 전적으로 나이든, 상대방이든 당사자의 잘못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잘못, 나의 잘못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게 아닌 그 사이를 보자. 옳고 그름이 아닌 호불호를, 사랑과 미움 같은 감정을, 그 두루뭉술하지만 안개 속처럼 뿌연 중간지대를 말이다. 명백하지 않아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그 곳에서 당신과 내가 자주 머물고 있으니까. 인간관계는 범죄처럼 진실을 밝히거나 가해자와 피해자를 매번 나눌 수는 없다. 잘못이 있어도 처벌과 보상을 체계적으로 받아낼 수도 없다. 사람 사이는 법이 없다. 이런 법이 어딨냐고 외칠 수는 있겠지만 어물쩡한 구석이 많다.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면 미움이나 증오는 저절로 찾아올 때가 훨씬 많았다. 회색지대에 있을 때,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니거나 우리가 자잘한 실수를 서로에게 저질렀을 때 말이다. 내가 나에 대한 가능성을 살펴보았듯이 마찬가지로 당신을 살펴본다면 이번에도 가능성은 세 가지다. 당신이 나를 잘 모르거나, 나를 알려고 하기는 커녕 이미 안다고 착각하거나, 당신을 사랑하기에 바빠서 내가 거슬리거나. 꼭 공인이 아니어도 누가 나를 싫어한다면 좋아할 사람은 없다. 내가 왜 좋아? 라는 말의 답을 알고도 늘 궁금한 것처럼, 내가 왜 싫어? 의 답을 알아도 늘 상처받을 것이다. 좋은 데 이유가 없듯이 싫은데도 꼭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누군가 나를 그냥 싫어할 수 있다는 걸 배웠으면서도 그 순간마다 아픔은 무뎌지지 않는다. 따지고 싶을 수 있다. 나를 얼마나 알기에 그렇게 나를 싫어하고 모진 말을 하는가. 화가 나고 속상할 때가 있다.

이유는 별 것 아닐 경우가 많다. 비슷해서 싫다기 보단 나와 달라서 싫을 것이다. 온 세상을 망치는 큰 일도 아닌데도 신경쓰일 것이다. 가령 의견이 달라서, 손톱 밑 까스라미처럼 거슬리는 느낌을 넘어가지 못해서일 것이다. 감정이 상하게 되는 것도 싸우고 싶은 것도 아주 작은 것에서 결정된다. 다른 때는 스스럼 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다가도 그 때는 참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기 싫어질 때가 있다. 미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 미안하다는 말은 먼저 잘못을 인정하는 상징이 되어버린다.

누군가 나를 싫어하면 그게 꼭 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단 말을 들었다. 내가 아니라 나를 싫어하는 상대방이 문제일 수 있다는 말.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는 얘기를 덧붙인다. 맞는 말이지만 늘 위로가 되진 않는다. 속상한게 아니라 화가 나는 것이다. 속상한 건 높은 벽이나 망망대해서 혼자 남아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을 때의 느낌이라면, 화가 나는 건 나의 외침을 잘못 들어서 별안간 화살이 날아오거나 칼이 꽂힐 때다. 차이를 옳고 그름으로 나누거나 모욕감으로 받아들일 때, 아무리 얘기해도 알 수 없는 필터링으로 진심이 연금술처럼 변해버릴 때. 내가 문제가 아니더라도 상대방 덕분에 나에게는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원인이 아닐 순 있어도 결과는 함께라는 점.

사람에겐 저마다 지뢰가 묻혀있다. 콤플렉스, 트라우마, 고통과 상처라는 이름의 지뢰. 지뢰와 연결된 작은 실만 스쳐지나가도 그 때부턴 원하지 않아도 이미 싸움이 시작되어 있다. 지고 싶은 싸움은 없다. 희희낙락하면서 통쾌하게 싸워보고 싶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사이다'장면에선 할 말 다하고 K.O. 시키고 유유히 자리를 뜬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한다. 영영 안 볼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한번은 다시 만날 만큼 세상은 꽤나 좁고 사람은 가깝기 떄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호구처럼 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다만 제대로 싸우려면 나를 내려놓아야 하고 그 때 내뱉은 말과 행동은 화해한다고 완전히 돌이킬 수가 없다. 그 의미를 알기에 알고도 사이다를 뿌릴 수 없을 때가 있다. 사이다가 한가득 있으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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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봤자 좋을 건 없다. 싸움이 좋지 않은 건 짧은 순간 상대의 약점을 건드리는 깊은 비수가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절대반지' 정도로 유혹적이다. 그 순간 가장 어려운 건 나 자신이다. 나를 몰아세우는 상대방에게 똑같이, 혹은 그보다 더한 완벽한 한방이 될 상처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한다. 팩트를 위주로 말할 수 있기를, 감정싸움을 하지 않게 되기를. 논점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상처내지 않기를.

상대는 시작과는 전혀 상관없는 진흙탕싸움을 하기도 한다. 불리해서이거나 할 말이 떨어져서일 거다. '그냥 그렇게 안했음 좋겠어, 내가 기분이 안 좋다.' 한 마디면 될 거였는데 말이다. 싸움은 걸어놨고 칼을 꺼냈으면 무라도 썰어야 싶을 수도 있다. 케케묵은 옛 이야기나 숨겨왔던 나에 대한 판단과 감정으로, 인격모독을 해오면 거기에 휘말리지 않도록 갖은 힘을 써야 한다. 억울하긴 할거다. 내가 이길 수 있는데, 이대로 가면 내가 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하는데. 내가 할 줄 못해서 안하는게 아닌데. 그래도 알면서도 상대처럼 할 순 없다. 그와 내가 다를 바가 없어진다. 이긴다 해도 남는 건 상처 뿐이고 나의 잔인함만 깨닫게 될 뿐이니까. 나를 지키지 않고 잃어버리면 싸움은 진 것과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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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나는 당신을 끝끝내 잘 알 수 없을 것이고, 당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유없이 좋아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고 미워하고 싫어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반대로 내가 상대에게 그렇게 느낄 때도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사람이 두 명만 되어도 그런 일은 일어난다. 그렇다고 매번 성벽을 높게 쌓고, 무기만 잔뜩 쟁여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성벽이 높고 무기가 많을수록 역설적으로 그만큼 두렵고 약하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주변에 나와 마음이 맞고 좋은 사람들이 있을 수만은 없다. 아니면 내가 정말 너무 완벽한 존재여서 약점이 없거나 상대보다 대체로 우위에 있으면 해결되는 걸까. 남부럽지 않은 높은 자리, 돈과 힘, 지성과 외모에, 성격까지 완벽하면 되는 걸까. 싸움에 유리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라다. 아니, 우리가 모자란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늘 뭔가를 많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 역시 끝이 없는 싸움일거다. 누구보다 잘나고 싶다는 것은 늘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면 위기를 겪는다. 우리가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서 부정하고 지워버리고 싶은 건 아니지 않나.

TV동물농장엔 사람보다 나은 것 같은 똑똑한 강아지가 나왔다. 우리 강아지도 저랬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 강아지가 그 강아지와 바뀌길 바라진 않는다. 강아지는 이미 내게 소중한 존재니까. 내게 아이가 생긴다면 매력이 넘치고 사랑스럽고 똑똑하고 건강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여전히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부모님도, 가족도, 친구나 연인에게도 그럴 것이다. 서로가 함께하는 게 독이 될 뿐이라는 생각이 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모든 게 다 좋진 않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나에게도 그럴 것이다. 장점보다는 단점이 먼저 훨씬 많이 떠오르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미워죽겠고 싫어죽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앞서도 얘기했듯 나를 제법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에겐 호감과 사랑을 얻어야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겐 그렇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있다. 우리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대가 없는 사랑이 코 앞에 있다. 밥은 먹여주지 않더라도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는 사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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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을 만나면, 나를 한번 더 바라보겠다. 소중한 사람을 안아주겠다. 우리는 전쟁을 하는 게 아니다. 몇 척의 배가 남든, 몇 척의 배를 부수든, 얼마나 너른 땅을 갖고 있거나 빼앗겼거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우리를 지나가게 흘려보내자고, 그 사이 받은 상처로 다시 나에게 또 상처를 주지 말자고. 나를 사랑하는 당신을 만나면 내 어깨를 두드려 주겠다. 혹시나 이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질까봐 두려운 거라면 괜찮다고. 잘 모르고 있겠지만 너를 사랑하는 건 그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고. 퉁명스럽고 부드럽지는 않지만, 사랑같은 건 할 줄 모르는 것 같은 너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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