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New Philosopher 2018 4호 : 워라밸의 시대, 잘 논다는 것

글 입력 2019.01.26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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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 이후로 정기간행물을 읽는 일이 참 줄어든 것 같다. 종이신문은 인터넷 기사로 대체한 지 이미 오래고 종이간행물은 가끔 생각이 나면 한 번 사보는 정도로 줄어버렸다. 현재 정기구독하는 간행물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간행물을 손에 쥐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이번에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처음으로 접한 간행물 뉴필로소퍼(New Philosopher)는 굉장히 흥미로운 간행물이었다. 인사이트를 담으려는 간행물들이라면 대개 정치 또는 경제지인 경우가 많은데 뉴필로소퍼의 경우는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이번 2018년 4호의 부제만 봐도 알 수 있다. '놀이'에 초점을 맞춘 간행물이라니. 너무 흥미로웠다. 그리고 꼭 생각해봐야 할 주제여서 이 책을 끝내 손에 쥐어 보았다.





< 목  차 >


 8    News From Nowhere
18   Feature  충만한 삶을 위한 놀이 _ 올리버 버크먼
24   Feature  놀이와 일의 경계 _ 마리아나 알레산드리
30   Feature  놀이, 심각한 동시에 사소한 _ 에밀리 라이알
38   Feature  스포츠와 게임의 본질 _ 나이젤 워버튼
44   Feature  그냥 게임일 뿐이라고? _ 패트릭 스톡스
50   Comic  리스크 _ 콜리 몰러
56   Feature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자 _ 티파니 젠킨스
62   Feature  어린아이처럼 놀자 _ 에드 스미스
68   Feature  창의성을 키우는 결정적인 가치들 _ 마리나 벤저민
76   Feature  스포츠와 동족의식의 함수 _ 클라리사 세백 몬테피오레
82   Feature  빵과 서커스 _ 앙드레 다오
90   고전 읽기  총성 없는 전쟁 _ 조지 오웰
96   고전 읽기  게으름에 대한 찬양 _ 버트런드 러셀
102  고전 읽기  피리 부는 사나이 로버트 브라우닝
104  6 thinkers  놀이Play
110  Essay  페더러, 육체적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 _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122  Opinion  낭만적인 야구를 위한 찬가 _ 이용균
128  Opinion  축구, 만인을 위한 만인의 스포츠 _ 강경희
134  Opinion 패배의 미학 _ 고재열
140  Interview  축구는 열 살 소년과도 대화하게 한다 _ 사이먼 크리츨리
152  Feature  일단 해보는 거야! _ 데이비드 파피뉴
158  Critic  죄수의 딜레마 게임 _ 스티브 쿤
162  Our Library
164  Column  게으름을 선택할 자유 _ 팀 딘
172  Interview  나만의 인생철학 13문 13답 _ 힐러리 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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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산다. 마음 한 구석에서 놀고 싶은 욕구가 샘솟고 있는데도 노는 것이 죄악시되는 마음 역시 동시에 들어서 놀지 못하고 묵묵히 일에 집중하려 노력하는 일들이, 비단 어릴 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안다. 그에 대한 답을, 뉴필로소퍼 4호에 실린 사르트르의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놀고 싶은 욕구는 근본적으로 존재의 욕구이다."


그래서인가보다. 처음에는 그림책을 보다가, 그 후 그림과 글이 비슷하게 들어가 있는 책을 보다가, 점차 그림보다는 글이 많은 책을 보다가 끝끝내 글만 있는 책을 보는 시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부던히도 일(공부)하는 동시에 놀기를 갈망한다. 마치 우리 유전자 속 어디에 노는 것을 갈망하는 염색체가 있기라도 한 것마냥 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는 유년기에 놀이에 대한 갈망을 억누르고 일(공부)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혹자는 달성하고 싶은 목표 그 자체만을 바라보며 그 푯대를 향해 끝없이 질주하는 삶을 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노는 것은 당연히 배제된다. 노는 것은 곧 비생산적이고 시간을 낭비하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에 뉴필로소퍼는 놀이가 충만한 삶을 위한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한다. 목표지향적인 삶은 물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집중하는 삶의 방식을 취하므로 생산적이지만 동시에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에만 가치를 두게 된다. 이 경우 자연스레 놀이는 가치없는 것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 삶에서 최초에 설정한 그 목표만이 가치있는 것일까. 이와 같이 목표에 매몰된 경우, 오히려 그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그 이후의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로 인해 공허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놀이와 여가는 이같은 질병의 해독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거기에 더해 이번 뉴필로소퍼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질문들에 대해서도 여러 인사이트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예컨대 바로 어제 경기가 있었던 우리나라와 카타르의 아시안컵 축구 경기를 보면서, 도대체 저 둥근 공과 네모난 잔디운동장과 각각 열 한 명의 선수들이 나와 이리저리 뛰는 저게 뭐라고 사람들이 이렇게 열광할까 하는 생각을 다들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이번 아시안컵에서 일본이 골을 넣고도 핸들링 반칙이 선언되어 골이 무효화되었던 것을 보면 이 축구라는 놀이는 매우 심각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처음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면 이 놀이는 한순간에 매우 사소해지기도 한다. '그게 뭐라고' 라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 한없이 가벼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놀이와 게임, 스포츠는 중요하면서도 하찮기도 한 모순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뉴필로소퍼 4호에서는 아주 깊은 통찰로 풀어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년기에 놀이를 통제받고 그 욕구를 억누르며 자랐던 사람들이 이제는 장성하여 키덜트로 돌아온 시대를 맞은 지 오래다. 어른들은 어린 시절 풀지 못했던 욕구를, 사회생활을 하며 갖춘 구매력으로 뒷받침하며 아주 즐겁게 이를 향유하기 시작했다. 프라모델이나 피규어부터 시작해서 슬라임까지 종류도 다양해졌다. 그런데 어른들이 이렇게 유년기와 같은 놀이문화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 동일한 기준이 어린이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는가? 오히려 어린이들에게는 과거보다도 더욱 숨막히는 통제들이 가해지고 있다. 당장에 드라마 스카이캐슬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입시의 허들이 매우 높아져서 더 어린 시기에, 더 많은 선행학습을 시키기 위해 다양한 사교육을 병행하려 하는 풍조가 만연한 이 사회에서는 당연히 노는 시간이 허용될 틈이 없다. 초등학생에게 예체능 학원까지도 생길 지경인데 오죽하랴. 이러면 체육과 같은, 그나마 놀이의 성격을 가질 수 있는 것조차 아이들에게는 일(공부)이 되어버리고 짐이 될 수밖에 없다.


미셸 드 몽테뉴는 "놀고 있는 아이들은 그저 뛰어노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진지하게 온 마음을 쏟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아직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느끼고 즐기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지 버나드 쇼가 한 말은 굉장히 의미있다. "우리는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놀기를 멈춘 것이 아니다. 놀기를 멈췄기 때문에 나이가 드는 것이다." 고된 일에 매인 것이 사실은 우리가 제대로 유희를 즐기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는 사실은 새삼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겪으면서 오는 회의감으로 찌들었다고 생각했던 게 어쩌면 제대로 놀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충분한 유희로 그것들을 발산시켜야 했는데 회사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러지 못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


그런데 여기서 노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텅 빈 마음의 상태를 이어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루서 귤릭이 말한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놀이는 개인의 본성을 가장 정확히 드러내주는 수단이며 동시에 인간의 성격과 기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활동이다." 어쩌면 놀이는 자신의 잠재력에 다다르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무엇일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마치 열심히 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트란드 러셀은 게으름을 그렇게 찬양했나보다.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 사람들은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고 있으며, 노동이 미덕이라는 믿음 때문에 엄청난 해악이 발생하고 있다. 현대 산업 국가에 필요한 교훈은 지금까지 들어온 것과는 사뭇 달라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 직장인들의 놀이 혹은 여가를 살펴보면 누워서 핸드폰으로 웹서핑을 하고 유튜브를 보는 것이 거의 전부인 경우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러셀의 시각에서 이를 진단해본다면 필요 이상으로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여유를 즐길 여력이 없으므로 그저 누워서, 거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실상 여가를 즐기는 개념이 아니라 곧 이어질 월요일을 대비하기 위해 그저 신체배터리를 충전하는 행위일 뿐인 것이다.


뉴필로소퍼를 읽으면서 이 대목이 머릿속에 정리되고 나니 생각이 정말 많아졌다. 나 스스로가 정말 그랬기 때문이다. 취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매주 주말 어딘가로 나섰다. 친구를 만나 맛있는 것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시간도 많이 보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모임도 가졌고, 많게는 한 달에 네다섯번까지도 음악회를 다녔고, 전시회나 연극은 주말 평일을 가리지 않고 자주 즐겼다. 인생에 목표도 있으면서, 그 목표를 위해 달리는 시간들에서 오는 피로감들을 수많은 유희들을 통해 적절히 풀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으면서 재충전하던 시기였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시기 중 가장 심적으로 풍요로웠던 시기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취업을 하고 나니 그럴 여력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매주 주말마다 집밖으로 나간다? 그 무엇을 한다 한들 생각만해도 피곤했다. 그냥 집에서,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이 가장 좋아졌다. 그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충전이 필요한 순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다만 스스로 이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런 시간들이 더 이상 충전이 아니라 어느 순간 타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디폴트가 되고 나니 이것만이 유희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이 일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음악회를 가는 것이 유일하게 설레는 유희였지만 이조차도 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주말이나 평일저녁 시간을 낼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서 오히려 취업하고 나서 꽤 오랫동안 공허했다.


그 길고 긴 터널을 지나와서 돌이켜보니, 결국 집에 가만히 쉬면서(좀 더 정확히는, '쉰다고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시간들은 나에게 충족감을 주는 유희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체적인 재충전이 필요한 순간은 쉬면서 채우고, 그 이후의 시간들은 내 내면을 재충전하는 유희의 시간으로 보내야 나에게 맞는 방식이라는 것을 다시금 재확인한 것이다. 어린 아이처럼 그 노는 순간에 가장 순수하게, 진실되게 몰입할 무언가를 나는 다시금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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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용어 중에, 요즘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갈 만한 말이 있다. 바로 '인생 노잼 시기'라는 표현이다. 그 무엇을 해도 재미없는 시기라는 이 표현은 정말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의 공감과 동의를 이끌어냈다. 한동안 왜 그럴까 고민해 보았다.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인 중 무시할 수 없는 게 사회적 여건일 것이다. 취업을 한 사람은 취업한 사람으로서의 고민에 맞부닥뜨린다. 내로라 하는 기업에 간 사람은 그 사람대로, 생각보다 덜한 대우와 복지 혹은 기대 이하의 회사 분위기에 이직을 고민하지만 이직할 만한 기업을 찾기도 쉽지 않다. 취업준비를 하고 있거나 대학생인 경우라고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취업을 혹은 그 외의 다른 꿈을 꾸고 있는데 이를 성취하기 쉽지 않은 어려운 나라 상황에 실망감이 커져가기 시작하면 그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시기가 더욱 빨리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생각해 볼만한 것은 우리사회가 과연 놀이로, 여가로 우리 삶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내고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드는 방법들에 대해 고민해보고 권유해본 적이 있냐는 것이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여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여러 방식 중 문화생활을 놓고 봤을 때, 거의 모든 문화 인프라가 서울에만 집중되어 있다. 당장 제2의 도시라 하는 부산을 가더라도 서울에 열리는 전시회, 음악회의 수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이러다 보니 "문화생활 한다"는 표현은 사실상 "영화보러 영화관에 간다"는 말과 거의 직결되는 게 현실인 것 같다. 물론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여가를 즐기는 방식이지만, 영화뿐만이 아니라 연극, 뮤지컬, 전시,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더 많은 곳에서 향유할 수 있도록 인프라가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


이처럼 뉴필로소퍼는 읽는 내내 아주 쉴 틈없이 생각이 넘쳐나게 해 주었다. 모두가 생각해봤을 법한 문제들에서부터 이런 통찰도 가능하구나 하고 생각하게 해 준 글들까지, 아주 재치있고 또 깊이 있는 글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워라밸이 중요해진 이 시대에, 잘 논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뉴필로소퍼 2018년도 4호에서는 그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생각의 기회들을 제공했다. 애당초 논다는 것에 정답이 있을까. 사람마다 노는 방식이 다 각양각색인데 말이다. 그저 짧게 한 번 생각을 정리해보고, 각자의 방식으로 삶에 유희를 취하면 될 것 같다. 마치 순수하게 놀이에 집중하는 어린 아이처럼 말이다.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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