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 이상의 예술: 예술과 그 인지적 가치에 대하여 [시각예술]

글 입력 2019.01.27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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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예술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예술은 외부세계를 재현해서 보여줄 수도, 내면세계를 표현해서 나타낼 수도, 가상세계를 제시해서 드러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직 외부, 내면과 가상의 아름다움을 제공하여 우리에게 감각적인 즐거움만을 선사하는가?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아마도 부정적일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너무나도 다양해져 버린 형식을 가진 현대예술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예술이 어렵다는 인식은 외형의 난해함에서만 비롯될 뿐 아니라 내용의 어려움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이렇듯 예술이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 자체는 이미 예술을 감각적으로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으로 바라볼 가능성을 알려주고 있다. 감각에 호소하는 것은 단순하고 쉬울수록 좋다. 달콤한 캔디는 달콤함 외에는 그 어떤 맛도 없다. 그것은 달콤할 뿐이다. 물론 예술과 캔디는 다르지만 오늘날에는 예술이 캔디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캔디도 예술이 될 수도 있다. 캔디 같은 예술은 너무나도 많다. 그것을 그린버그는 키치라고 불렀다. 하지만 예술 같은 캔디가 나타날 때 모든 것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그리고 또 어떻게 복잡해지는 것일까?

미적가치와는 구별되는 예술의 가치들이 제기되면서 예술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팝핑 캔디가 되었다. 그것은 상품이 되었고, 장식이 되었고, 마취제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훌륭한 예술을 상품으로 보지도, 장식이나 마취제로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예술”이라는 말에 걸맞은 예술로서의 가치는 그 가치가 오로지 그것이 예술로서 감상 되었을 때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예술이 그 자체의 구성을 통해서 지식이나 이해와 같은 인지적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한다. 예술을 예술로서 감상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Ⅱ. 예술과 지식


앎이란 무엇일까? 앎은 우리의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다. 이러한 앎의 조건은 하나의 사실과, 이것이 사실이라는 우리의 믿음,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우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거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명료한 정당화의 여부에 따라 지식은 또 명제적 지식과 비명제적 지식으로 나뉘게 되는데, 비명제적 지식에는 절차적 지식과 현상적 지식 등이 포함된다. 절차적 지식(Know how)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지식이고, 현상적 지식은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지식이다. 이러한 절차적 지식과 현상적 지식은 명제적 지식과 달리, 언어적 설명과 이론적 이해만으로는 반드시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절차적 지식이 우리가 무엇인가 명제적 지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면, 현상적 지식은 우리가 이론적으로만 알던 지식에 실제로 경험하였을 때만 알 수 있는 새로운 부분을 추가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예술이 인지적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종류의 앎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아래에서 필자는 예술이 명제적 지식 또는 비명제적 지식을 제공할 가능성을 이들에 대한 비판을 비판함으로써 검토해 보고자 한다.


2.1 예술과 명제적 지식

예술의 인지적 가치를 비판하는 입장에선, 많은 예술은 ‘허구’이기 때문에 참된 지식을 전달할 수 없다거나 예술의 명제적 지식은 정당화 없이도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신빙성에 있어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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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클로스, <린다>, 1975-6


많은 예술이 허구에 기반을 두어 제작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소설, 회화, 영화 등의 예술은 대개 작가가 창조해낸 가상적 내러티브를 감상자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예술이 보여주는 세계가 허구적 세계라고 할지라도, 많은 경우 작가는 실제 세계를 참고하며 이러한 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에 예술이 전달하는 모든 정보가 허구라고 일축해버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아 보인다. 그 이유는 역사적, 과학적 사실과 같은 명제적 지식이 예술이 묘사하는 사회나 세계에 대한 배경 지식 등을 통해 전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한 사극 드라마도 시대적 고증을 거쳐 제작되며, SF 소설은 과학에 대한 지식 없이는 전개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설령 작품이 제공하는 명제적 지식이 어디까지가 참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감상자는 개인의 필요에 따라 배경지식을 조사함으로써 참과 거짓을 분류해낼 수 있다. 그러나 혹자는 예술작품이 제공하는 지식이 참인지의 여부를 너무 세세하게 파고들 경우, 그것은 예술로서의 감상을 해치기 때문에, 이럴 경우 획득된 명제적 지식은 결국 예술적 가치로서의 인지적 가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세세하게 파고들어야지만 작품에 대한 감상이 완전해지는 경우는 어떠한가?

일상의 현실을 극히 생생하고 완벽하게 묘사해내는 극사실주의 회화를 생각해보자. 척 클로스의 <린다>를 마주보고 선 관람객은 거대한 크기의 캔버스를 전체적으로 눈에 담은 다음 다시 가까이 다가가 네모진 격자구획을 통해 한 칸 한 칸 채워진 이 작품을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다. 캔버스를 나누고 있는 수많은 격자 중 단 한 칸이라도 린다라는 사람의 사실적 외형과 다르게 그려졌을 경우, 또는 인간의 신체와 들어맞지 않게 그려졌을 경우, 척 클로스의 ‘극 사실’은 사실이 아니게 되고, 그의 극사실주의 회화 자체를 지탱해주는 가치가 무너져 버릴 것이다. 이렇듯 격자를 한 칸 한 칸 뜯어보는 행위가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가 아닌 다른 어떤 행위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가? 극 사실주의 회화의 예술적 가치는 그것이 보여주고 있는 캔버스의 모든 구석이 극히도 정확한 사실이라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감상자에게도 모든 세부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관찰하는 감상이 요구된다.

이럴 경우 작품이 제공하는 인체의 외형에 대한 지식이 참인지의 여부를 적극적으로 판정하는 것이 오히려 예술로서의 감상을 증진하고,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드높인다. 또한 <린다>가 제공하고 있는 명제적 지식은 정당화된 지식이기 때문에 앞선 지적과 달리 신빙성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것은 척 클로스가 살아 있는 인물 대신 사진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진은 가장 객관적인 재현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대상을 자의적으로 왜곡할 위험이 있는 인간의 눈과 달리, 사진기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이게 담아내기 위해 발명된 기계이다. 따라서 ‘사진’에 기반을 둔 척 클로스의 회화가 한 인간의 얼굴의 모든 부분에 대한 과학적으로 정당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고 말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2.2 예술과 비명제적 지식

예술의 인지적 가치를 비판하는 또 다른 입장에서는 예술이 우리가 이제껏 알지 못했거나, 사소하지 않은 사실에 관한 믿음을 처음으로 형성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예술이 주제로 삼고 있는 지식을 우리는 모두 이미 알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예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이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예술만이 이러한 믿음을 배우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예술은 철학서, 교과서 등 예술과 동일한 지식을 전달해줄 수 있는 수단보다 사람들에게 특정 지식 개념을 설득시키는 강력한 힘이 부족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가능한 반박은 명제적 지식 역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지식의 한 종류일 뿐, 예술을 통해 우리는 명제적 지식 말고도 현상적 지식과 절차적 지식 등의 비명제적 지식을 배울 수 있으며, 이러한 비명제적 지식은 예술의 현실 재현 기능을 통해 다른 수단보다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주장이 될 것이다.

  
2.2.1 절차적 지식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절차적 지식은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지식이다. 예술이 주는 절차적 지식이 어떠한 것이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는 최소한 예술작품의 감상을 통해 우리가 ‘감상하는 절차’ 자체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대상을 예술로서 감상하는 절차는 예술작품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절차적 지식이다. 단토의 사고실험처럼, 예술 감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한 사람에게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그리고 그와 같은 크기의 검은 색종이가 붙여진 하얀 캔버스를 보여줄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는 무엇을 어떻게 봐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이다.

단순하게 쳐다보는 것과 감상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정신적 활성화의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최소한의 절차적 지식은, 특정 대상을 바라볼 때, 어떠한 경우에는 우리가 정신을 집중해서 그것을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작품이 줄 수 있는 또 다른 가능한 절차적 지식은, 화가가 이 그림을 어떻게 그렸는지에 대한 절차를 들 수 있다. 그림은 화가가 그려낸 것이다. 그것은 완성된 작품으로서 우리 앞에 공개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의 제작 과정보다는 최종적 결과를 감상하게 된다. 그러나 재현적 회화의 경우, 우리는 화면의 구도, 또는 미세하게 남아 있는 붓질의 방향 등을 통해 화가가 어떻게 그것을 완성했는지에 대한 부분적 단서를 획득할 수 있으며, 막스 에른스트의 프로타주 초현실주의 회화나 과정미술 및 행위예술 등 현대 미술 같은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예술가의 수행적 과정의 궤적을 쫓을 수도 있다.

막스 에른스트의 <박물지>는 프로타주 기법이 적용된 그림이다. 프로타주 기법이란 자연사물을 종이에 대고 연필을 문질러 옮긴 후, 우연한 효과로 획득된 형상 위에 가필하여 형상을 창조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림의 표면을 통해, 감상자는 곧바로 이 그림이 나뭇잎을 종이 아래에 깔고 그 위로 연필을 빠르게 움직여 얻어진 형상에 기반을 두어 창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로만 오팔카의 <자화상> 시리즈는 작가 본인이 41세가 되던 해인 1972년부터 매일 한 장씩 자신을 촬영한 사진이다. 전시된 일련의 사진을 통해, 감상자는 예술가가 자신의 하루하루를 기록한 것을 통해 작업을 진행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든 마타 클락의 <쪼개기>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제목과 이미지 모두를 통해 감상자는 예술가 작업을 완성 시킨 방식이 다름 아닌 ‘쪼개기’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명쾌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렇듯 작품이라는 완성품뿐만 아니라 작가의 창작 과정 자체가 녹아있는 예술을 통해 감상자는 인간의 수많은 행위 중, 특히 예술 창작 활동이라는 것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 지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절차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러한 절차가 제대로 된 절차라는 걸 감상자가 확인할 수 없거나, 확인 자체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오직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특정 작품을 제작해야만 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감상자는 대답할 수 없다. 그들은 비전문가이기 때문이다. 또는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감상자는 작품의 제작 과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 의하면, 훌륭한 예술 작품은 반드시 ‘그러한’ 방법으로 제작되어야만 했기에 예술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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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에른스트, <박물지>,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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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마타 클락, <쪼개기>,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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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오팔카, <자화상>, 1972 시작


본문이 ‘예술적’ 가치로서의 인지적 가치를 논의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 가능한 다른 ‘최선의 방법’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의 ‘실용적’ 관심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논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작품은 도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절차’인지의 여부에 관한 확인이 반드시 요청되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를 만드는 데에는 제대로 된 절차가 필요하다. 제대로 된 절차는 곧 자동차의 성능과 연관되어 있고, 이러한 성능은 사용자의 안전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예술작품과 자동차를 같은 종류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절차라는 것을 예술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또한, 감상자가 예술 작품의 제작 과정에 관심이 없다는 것과 예술의 인지적 가치는 관련이 없다. 지식은 관심의 유무에 의해 존재하기도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인이 구두 제작에 대한 절차적 지식에 관심을 두지 않지만, 그렇다고 구두 제작이 절차적 지식을 전달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외에도, 감상자라는 범주 안에는 미래의 예술가로 성장할 예술 지망생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명작을 보고 습작하는 연습, 다양한 형식의 현대 예술을 통해 자극받고 새로운 매체와 방법이 어떻게 작품에 적용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 즉 예술의 이러한 절차적 지식은 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2.2.2 현상적 지식

예술이 현실에 대한 간접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직접적 경험에서가 아닌 간접적 경험을 통해 어떠한 것을 경험하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Know what it is like)를 알게 해주는 예술은 '현상적 지식'을 제공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혹자는 우리가 직접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예술이 모든 경우에서 현상적 지식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이러한 간접 경험 역시도 예술만을 통해 전달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결국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해볼 수 없다. 현재로서는 예술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전부 명쾌하게 해석할 수는 없다. 이 점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가 예술에 대해서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 필요는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대리경험을 통해서 어렴풋이라도 알 수 있다면, 그것 하나의 앎일 것이다. 또한, 직접 경험을 한다고 해도 우리가 어떠한 추상적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직접 사랑에 빠져본 사람에게 사랑이 무엇이냐 질문하면 그들은 서로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따라서 모두 아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따른다면,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또 알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일반적 상식과는 어긋나는 주장이다.

결국,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은 이런 사랑을, 저 사람은 저런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기회이다. 직접적 경험과 간접적 경험의 데이터가 모였을 때, 그때야말로 우리의 앎은 가장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이해와 감정에 관한 시각적 제시는 결국 ‘예술’이라는 특정한 매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제시될 수 있다. 언어로 고통을 제시하고 세계의 부조리한 현실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의 커튼을 우리와 실재 사이에 내리고서 그림자놀이를 하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한번 걸러진 채로 우리에게 제시되며, 감정의 동요를 유발할 수 있는 있어도, 예술의 시각적 효과만큼의 직접적인 충격을 우리에게 가할 수 없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무엇을 생생하게, 우리의 눈앞에 직접 가져다 놓는 것, 이러한 세계에 대한 경험적 이해는 예술의 힘을 통해서만 극대화될 수 있을 것이다.



Ⅲ. 결론

 
‘다시’ 알려주는 것의 의의와 ‘어떻게’ 알려주는지와 관련되는 효과는 오직 예술만이 가능한 영역이다. 이를 통해 예술은 추상적 규범이나 함축이 풍부한 개념들의 이해를 돕고, 도덕 판단 능력이나 감수성과 관련된 노하우를 제시하며,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해도 잊혔거나 그 진의와 적절성을 실감하지 못한 사실에 대한 상기를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은 진부하더라도, 그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삶의 여러 영역에서 중요한 비명제적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은 예술적 가치로서의 인지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선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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