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 읽다] W.G. 제발트 - 파괴의 파편엔

책 『이민자들』 _ 땅과 바다와 제국을 위하여
글 입력 2019.01.2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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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 선생님의 고향은 어디십니까?


주인 : 고향하면 생각나는 곳이 있지. 그렇지만 그곳을 고향이라 부를 만큼 오래 살지 않았네. 아주 어릴 적에 짧게 살다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되었지. 오히려 내가 지금 사는 이곳이 고향이라 해야 할 거야. 하지만 날 기초하는 것들은 그곳에 있다네. 아직도 떠올라. 분명히 기억나진 않지만, 기억이 나는 일들이지. 오래 살지 않았지만, 다분히 행복했던 기억들이 있네.


그곳에 가고 싶지만 가고 싶지도 않네. 하지만 그곳이 내 평생 고향이라 생각하네. 웃긴 말이지. 다른 지방으로 옮겨야 했던 일이 여실히 생각나기 때문에. 그게 나에게 때론 고통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라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나. 무얼 본 건가?


(책장 옆에서 들고 있던 책을 펼친다.)

손님 : <이민자들>이란 책을 읽고 있어요.


주인 : 독일 문학 코너이면 제발트인가?


손님 : 맞습니다. 읽을수록 슬픔이 커지는 책인 것 같습니다.


주인 : 당연히 그럴걸세. 이 책에 나오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유대인들의 이민은 실제였고, 네 명의 주인공들이 이 실존했던 일을 배경으로 살아온 사람들이었으니. 모든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발트가 직접 이 네 단편의 인물들을 인터뷰했다고 하네.


손님 : 선생님은 이 책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주인 :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누군가 평생토록 지고 산 고통을 알게 된 일이었다네.




파괴의 파편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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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 책의 각 화자는 안다고 생각했던 한 사람의 인생 그 깊숙이 있던 기억을 발견하지. 그리고 또렷이 회상조차 하지 못하는데도 그때의 기억이 그들의 인생 자체를 갉아먹고 있었다는 걸 알게 돼. 그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 짐작하겠나? 나에겐 정말 슬프게 다가왔다네.


헨리 쎌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막스 페르버 이 네명 모두 이민을 택한 사람들이었네.


그중 아델바르트를 제외한 세 명은 유대인이며, 파울과 페르버는 죄인처럼 쫓겨나듯 독일을 떠야 했지. 그래도 땅을 떠났으니 멸시 섞인 시선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았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의 모든 불행을 청산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을까?



학창시절에 나를 덮쳤던 그 불행이 내 안에 박아놓은 뿌리는 너무나 깊었네.


그 불행은 거듭 땅을 뚫고 나와 사악한 꽃을 피우고, 독기 품은 잎으로 내 머리 위에 천장을 만들었지. 그 천장은 지난 몇 년 동안에도 내게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나를 어둠으로 덮었네.


p.240



주인 : 겉으로는 그래 보였을지 몰라도 아무도 몰랐을지 몰라도 아니었어. 그 기억들은 그들 어딘가에 붙어 그들을 사는 내내 괴롭혔어. 묻었지만 묻히지 않은, 그 안에서 여전히 그때를 살고 있는 자신을 봤을지 모르겠네. 인생의 절반도 아닌 짧은 기억들이 그런 영향을 끼쳤다는 걸 믿을 수 있겠나?


유대인으로서 파울 베라이터와 그의 부모님이 겪어야 했던 비열하고 치졸한 일들. 그럼에도 자신 또한 끝끝내 그런 독일인임을 깨달았을 때의 자신에 대한 파괴. 페르버의 끝내 부모님은 영국으로 오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하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그것들은 그들 몸속에 마치 질병처럼 퍼졌겠지.




침묵하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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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게 말했다.


파괴의 시간이 지나간 뒤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침묵하고, 모든 것들을 감추고, 때로는 실제로 잊어버리기도 했는지요.


그런 것은 그들이 보여주었던 비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는 것이에요.


p.66



주인 : 이 책은 인간들의 욕심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 한 개인들의 평화롭고 찬란한 유년과 행복을 파괴해놓았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비춘다네.


그리고 그 뒤로는, 그들의 인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감추고 침묵하기 바쁜 정부가 드러나지. 아마 이 책과 작가 제발트는 그런 성찰 없는 한 나라와 정부와 국민의 태도를 비판하는 걸지도 모르겠네. 그런 회피와 무책임한 태도로는 발전된 다음 날이, 아침이 올 수 없다고.


그런 모습은 책에서 비판하는 독일의 모습뿐 아니라 다른 나라를 포함한 우리나라도 피해갈 수 없을 걸세. 파괴의 시대를 건너 20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렇게 행해오고 있으니까. 당의 이름을 바꾸는 것처럼, 얼른 얼룩을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떠들기 바쁘지. 자책과 원망과 성찰을 자신이 아닌 특정한 누군가와 시대에 바친 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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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인상적이었던 그녀의 말들 가운데 백미를 이룬 것은 어리석음만큼 끝날 줄 모르고 위험천만한 것은 없다는 말이었다.


p.287



주인 : 책을 읽고 문득, 티비에서 본 한 여자가 생각났네. 더 이상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못 살겠다며 이민을 가겠다고 하던 여자였네. 씨랜드 참사에서 사랑해 마지않던 아이를 잃은 한 엄마였지.


난 씨랜드 참사*부터 세월호 참사까지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네. 우리는 20년 전 그날과 무엇이 달라졌냐고. 씨랜드 참사가 무려 20년 전이지 않나. 그때 그 당시엔 대처가 미비했다고 변명했다고 친다면 그로부터 15년 후의 참사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침묵하고 외면하고 다시 건설하고 파괴되고 똑같은 반복을 해오고 있지 않나. 인간의 욕망과 파괴라는 굴레 속에서.


우린 결국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거야. 그걸 인정해야 하네. 난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정말 소중하다고 느꼈네. 비난해야 하네. 함께 눈을 감으면 안 되네. 그게 나의 뜻이 아니라 정부의 뜻이었다고 정부의 뜻이 아니라 시대의 탓이었다고 지워버리고 침묵해버리면 안 되는 걸세. 난 이 책에서 그걸 봤네.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사건 : 1999년 6월 30일 새벽 경기도 화성군 청소년수련원 씨랜드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유치원생 19명 등 23명이 숨진 대형사고. 그리고 그 이면엔 씨랜드가 수련원 준공허가에 있어 위험요소가 있음에도 허가되었다는 화성군청과의 비리가 있던 사건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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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G. 제발트

(WINFRIED GEORG SEBALD, 1944~2001)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독일 작가 중 한 사람. 1944년 5월 18일 독일 남동부 알고이 지역의 베르타흐에서 태어나, 프라이부르크와 스위스 프리부르에서 독문학과 영문학을 공부했다.


첫 문학작품 『자연을 따라. 기초시』를 출간한 이후 『현기증. 감정들』, 『이민자들』, 『토성의 고리』 등을 잇따라 발표했다. 2001년 『아우스터리츠』를 발표해 다시 한번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그해 12월 노리치 근처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제발트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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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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