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웃음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Netflix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 [문화 전반]

글 입력 2019.01.28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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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ah Gadsby: Nanette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예능 프로그램을 더 이상 시청하지 않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여성 코미디언들의 외모를 조롱하고 품평하는 모욕적인 언사가 한갓 유머로 수용되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여성 예능인들조차 자학개그로 발언권을 얻는 행위를 마주칠 때 치솟던 괴로움은 TV 자체를 멀리하게 되는 요인이었다.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이 주목받고 27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이 연예대상을 받았지만 기존의 여성 혐오적 사고방식과 성별 불평등은 견고하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예능 프로그램들의 전체 출연자 중 여성은 36.8%에 그쳤고 주진행자 가운데 여성은 26.8%에 불과했다. 변화의 급물살이 사회를 흔들어도 여전히 주류 코미디와 방송계는 남성을 주축으로 움직이며 그들이 웃음을 제조하는 방식은 게으르고 편협하다. 그렇기에 넷플릭스 해나 개즈비의 스탠드업 코미디가 시사하는 바는 묵직하다. 그는 사회 전반에 걸쳐 지금껏 통용되어왔던 여성 멸시적 코드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어느 유튜브 독자의 말처럼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모든 문장이 명문인 테드 강의 한 편을 보는 기분마저 든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코미디와 서사의 교과서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사유 없이 편리하게 고정관념을 답습하며 무의미하고 폭력적인 웃음을 재생산하기보다 권력 구조를 헤집고 비판하며 통렬한 풍자가 가득한 날 것 그대로니까. 비단 코미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콘텐츠를 기획하고 생산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필청 해야 할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학유머의 중단을 선언한 코미디언



"비주류의 인간이 자학이란 걸 할 때,
자학이 뭘 뜻하는지 아시나요?
그건 겸손이 아니에요. 수치스러움이죠"


그가 태어난 호주의 테즈매니아는 1997년까지 동성애를 범죄로 분류하던 곳이다. 개즈비의 농담에는 이처럼 동성애에 대해 적대감이 가득한 환경에서 자란 레즈비언의 고뇌와 자기혐오, 절망감이 묻어 나온다. 고통스러운 유년시절을 보냈던 고향을 떠나 코미디를 시작한 개즈비는 여느 비기득권자들과 마찬가지로 자학을 무기 삼아 관객에게 웃음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를 발판 삼아 자신의 커리어를 쌓았다. 동성애를 향한 폭력과 더불어 레즈비언의 존재감마저 희미했을 시기이니 자기혐오적인 사고방식을 내재화하는 편이 더욱 쉬웠을 터다. 자신을 대변해줄 집단이나 상대를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온전한 정체성을 개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비합리적인 증오와 비난을 받는 존재일수록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비주류들의 자학은 기득권에 위치한 자들의 자학과 다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개즈비는 레즈비언이 섹슈얼리티와 관련되기보다 과거에는 남자들의 농담에 웃지 않는 여자, 맨 헤이터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한다. 시간이 흘렀지만 이러한 고정관념이 유지되어 레즈비언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문이 든다.

겉으로 표출하진 않으나 서구권에서 여전히 레즈비언을 불편해한다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의 언급을 피하고 최소화하기 때문이다. 레즈비언들조차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gay 혹은 gay woman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잦다. mankind가 인류를 상징하는 일반명사인 것과 같이 gay가 자연스레 모든 동성애자를 아우르는 단어로 굳어지고 있는 듯하다. 레즈비언이 female이나 woman처럼 종속적인 어원이 아니라 독자적인 의미를 상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gay라는 호칭을 선호하는 심리가 무엇일까. 스스로 맨헤이터가 아니라고 해명하던 개즈비의 이야기는 레즈비언들을 향한 애꿎은 낙인이 그들을 위축시키고 방어적으로 만드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짐작게 한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80년대 미국의 안티 페미니스트 남성이 역설한 주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남편을 버리고 아이를 죽이며 자본주의를 파괴한 후 모든 여성을 레즈비언으로 만드는 게 페미니스트들의 목적이라고 역정을 냈다. 곰곰이 따져보자. 남성과 여성의 결합은 곧 이성애 정상가족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가족 단위가 모여 비로소 가부장제 구조를 형성한다. 이 구조 안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차지하는 자들에게 레즈비언들은 존재만으로도 체제를 위협하는 반동분자나 다름없다.

필연적으로 남성을 배제하는 존재를 향해 거부감이 발현되어 레즈비언들을 은밀하게 압박하는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그런 점에서 남성 포괄적인 단어를 선택하는 행위는 자학과 닮은 꼴이다. 레즈비언이 함의하는 급진성과 독립성을 희석시켜 존재를 인정받는 것과 자신을 낮추어 웃음을 자아내는 자학유머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게다가 최근 미디어에서는 여자 주인공에게 조언과 위로를 건네는 절친 캐릭터로 게이를 등장시키는 구도가 공식 클리셰로 자리 잡은 듯하다. 그에 반해 레즈비언은? 게이와 비교했을 때, 레즈비언이 차지하는 영역은 미약하다.

과거와 현재에도 여성이자 동성애자로서 이중의 억압을 받는 이들이 자긍심보다 자기학대를 습득하기에 불행히도 최적화된 환경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쇼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개즈비는 남자친구의 유무를 묻던 할머니에게 커밍아웃하지 못한 사실을 토로한다. 머리로는 당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슴으로는 창피한 일이라고 느낀 셈이다. 이런 그가 이 쇼에서 중대한 선언을 한다. 자신을 포함하여 주변화된 집단의 존엄을 위해 자학적인 행위로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물론 그의 쇼도, 코미디 경력도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용기 있고 재치 넘치는 개즈비의 이야기는 아직 더 남아있다.



올바른 여성과 올바르지 않은 여성을 가르는 기준?



"남자가 치마를 입는 게 이상한가요?
머리숱도 없는 아이에게 분홍 머리띠를 해주는 게 이상하죠."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인위적인 성 역할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자신만의 진정한 자아를 깨닫기도 전에 사회가 구분한 행동양식을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다. 개즈비는 자신이 남성으로 오인받은 이야기에 빗대어 이와 같은 고정관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여성의 모습과는 다른 외형을 지녔다. 이로 인해 어떤 이는 그를 트랜스젠더 착각한 경우도 있다. 그가 들려준 일화는 가부장제 하에서 젠더 고착화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를 증명한다. 치마와 하이힐, 긴 머리, 부드러움, 상냥함, 핑크, 인형놀이, 화장 등은 선천적으로 부여받는 여성의 특성이 아니다. 바지와 짧은 머리, 블루, 공격성, 거침, 레고, 스포츠 또한 선천적으로 부여받는 남성의 특성이 아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관념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단지 저 좁고 허름한 상자 속에 자신의 몸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 고군분투할 뿐이다. 그래야만 '정상성'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정상이 아닌 것은 비정상이다. 정상적인 여성성과 남성성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들이 스스로를 여자 몸에 갇힌 남자, 남자 몸에 갇힌 여자, 혹은 논바이너리로 착각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들을 수십 가지의 젠더로 분류하여 해석하는 것 역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기존의 체계와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어야만 여성성과 남성성,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잘못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젠더(생물학적 성별이 아닌 사회적 성별)는 고정적이고 불변적인 성질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철폐되어야 할 낡은 카테고리다.



#METOO: 도널드 트럼프, 파블로 피카소, 하비 와인스틴,
빌 코스비, 우디 앨런, 로만 폴란스키...



"난 여자를 떠나보낼 때마다 불에 태워버리고 싶고
그 여자의 과거까지도 파괴해버리고 싶다."

그런 작자가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였다니요.
피카소는 미성년의 여성을 강간했어요.
마더 테레즈 발터가 피카소를 만난 건 17살 때였어요.
미성년자였을 때죠. 42세 피카소는 명성 높은 유부남이었고요.

하지만 피카소는 자신도 그녀도 모두 한창때라며 괜찮댔어요.
한창이 아니라 한참 먼 것 같은데.
물론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요.
큐비즘을 배웠으니까요.


예술사를 전공한 개즈비는 코미디를 넘어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서양 예술사와 여성 혐오, 성폭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의 메시지는 미투 운동을 통해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가치를 상기시킨다. 더 이상 성폭력과 여성 혐오를 일삼는 남성 예술가에게 예술이라는 이름의 면죄부가 주어져선 안된다는 뜻이다. 개즈비는 그들이 지금껏 문제를 일으키고도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로 그러한 행위가 용인되었기 때문임을 강조한다. 법적으로 재산이 분할되는 것이 두려워 이혼을 기피한 채 미성년자에게 접근했던 피카소, 여성은 신과 현관문 앞의 발매트 두 부류만 존재한다고 밝힌 남성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다. 로만 폴란스키가 미성년자를 강간한 죄로 유럽에서 도피생활을 하며 지속적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원인에도 강간범을 위한 구명 운동에 뛰어들었던 헐리웃 스타들의 지지가 있었다.

이쯤에서 수치스럽지만 우디 앨런의 작품을 즐겼던 과거를 참회한다. 나 또한 여성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이들의 명성을 드높여주고 삶이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 중 한 명이었음을 인정한다. 우디 앨런이 의붓딸이던 순이와 결혼한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작품을 감상할 때만큼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착각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예술과 예술가를 철저하게 분리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다. 특히 남성 예술가가 논란을 일으킬 경우, 가장 빈번한 충고로 작품과 예술가를 분리하라는 말을 한다. 죄는 저질렀지만 작품은, 연기는, 음악은 비난할 수 없다고. 안타깝게도 예술가와 작품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작품은 예술가가 살아온 인생과 경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총망라된 그릇이다. 우디 앨런을 예로 들어보자면, 그의 아동 성도착증은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딜런 패로의 폭로로 개봉이 중지된 어 레이니 인 어 데이의 스토리에는 45세의 남성과 15세 여성 간의 관계를 소름 끼치는 로맨스로 둔갑시킨 서사가 포함되어 있다. 평소 그의 삶이 반영된 결과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작품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작자의 일생을 관찰해야 한다. 예술가의 삶을 알게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뒤늦게 깨달아도 좋으니 부디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던 개즈비의 충고를 모두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지금껏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는지. 우리가 진정으로 들어야 할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누구인지. 이제는 외면해왔던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시간이다.


[장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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