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몸, 의자, 보이첵

글 입력 2019.01.2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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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보이첵을 본다.

 



1. 다시, 몸으로

보이이이이첵.jpg
 


이번 2019년, 극단 사다리움직임연구소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연극 <보이첵>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몸으로만 말하는, 절제된 무언극이다.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무대. 몇 편의 무용 공연을 통해 이전에도 이런 무대를 몇 번 감상해 본 경험은 있지만, 언어의 비존재는 언제나 낯선 경험이다. 작년에 처음으로 무언극을 감상하기 전 썼던 프리뷰에서 이런 말을 했었더랬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언어의 세계 바깥을 느끼는 경험은 즐거움보다도 그 자체로 에너지를 요하는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고. 정갈하게 차려진 언어만을 주워먹는 일보다 간편한 것은 없다. 그렇지 않은 때에는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지, 오감을 사용하며 여기 저기 뛰어다녀야만 한다. 마치 개발되지 않은 생태계에 홀로 떨어진 현대인처럼.


당연한 말이지만, 극작을 시도하면서 최근에 더욱 와 닿았던 것 하나. 언어가 가지는 힘은 엄청나다. 여기서의 힘은 우리에게 전달하는 에너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물론 그런 경우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강력하다.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상념들을 한데 주워모아 깔끔하게 정리하고, 의미를 발전시키고 나아가 전달한다. 언어를 주고 받으면서 소통은 편리해지고 신속해진다. 그러나 언어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데 있다. 그 어떤 언어도 무언가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언어의 프레임 안에 묶인 서로 다른 상념들의 의미는 천천히, 그것들을 대표하는 언어의 색깔에 동화되어 버리고 만다.


나의 감정을 상대에게 온전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을 통해 정리되지 않는 비언어의 '나'는 불완전한 언어 체계를 거쳐 튀어나오면서 최대한 비슷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러나 어쩌면 전혀 다르게 정의 내려질 모습으로 재현된다. 그리고 불완전하게 정리된 언어는 또다시 상대방의 불완전한 언어 체계를 거쳐 나의 언어보다도 훨씬 더 어긋난 모습으로 상대에게 재현된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이상하게 말하고 이상하게 듣고 서로를 오해하면서 살아왔다. 언어를 사용한 소통이란 사실 얼마나 과대포장되어왔는가. 아마 하나님이 굳이 인간을 벌하지 않았어도, 바벨탑은 완공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몸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힘겹고 불편하며, 언어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때로는 언어보다도 훨씬 더 적은 것들을 전달하게 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유의미하다. 깔끔하게, 그리고 아주 이상하게 정리된 언어의 세계 이면에서 정리되기 이전의 것, 본질적인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몸짓들. 이번 연극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찾아오게 될까? 움직임으로 가득 찬 무대 한 구석에서 어떤 생각의 단편 하나라도 잡아채고 돌아온다면 기쁠 것이다.



 

2. 오브제, <의자>


이번 연극에서 또한 기대되는 점은 바로 오브제로서 특정 사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무대에 소품이 많은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도 하고, 최근 쓰고 있는 글에서도 오브제를 활용하는 데 고민이 많던 중 반가웠던 점 중 하나다. 연극 <보이첵>은 이번 무대에서 11명의 배우들이 사용하는 11개의 의자만으로 극을 전개해나갈 예정이다.



보이첵 의자.jpg
 


무대 위의 소품은 언어와 같은 기능을 한다, 아마도. 소품이 사실적이고 디테일하고 풍부할 수록, 관객들은 편리해진다. 대본 속 공간이 그대로 구현되므로, 무대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고 오로지 텍스트에만 집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인 것이다. 그러나 공연은 텍스트로만 채워지는 종류의 예술이 아니다. 공간을 활용한 예술은 공간으로서의 예술성, 혹은 미적 충격만이라도 던져줘야만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의견이다. 이 점에서 오브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의자를 의자가 아닌 무엇으로 생각하자는, 극장이라는 공간 내에서의 관객과 연출가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에 따라 관객들은 의자라는 사물의 언어적인 의미를 파괴하고 스스로, 적극적으로 의미를 찾아내 부여한다. 새롭게 부여되는 의미가 사물의 원 의미와 멀어질수록, 그럼에도 설득적일 수록 관객들은 그 창의성에 경악하는 동시에 매혹된다. 대본 속 배우들이 언제나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을 보여줄 수는 없다. 그 사이 사이를 메워주는 힘, 혹은 극한까지 올라가는 긴박감을 터뜨리는 힘은 무대적 연출에서 나올 수 있다.


무대를 디테일한 소품들로 가득 채워넣은 극보다도 훨씬 관객의 상상력을 요구하며 연극적인 양해를 구해야만 하는 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에서 오는 충격은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번 연극에서, 11개의 의자에 거는 기대가 아주 크다.



 

3. 시놉시스


프레드리히 요한 프란츠 보이첵. 육군 일등병 제 2연대 2대대 4중대 소총수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 '마리'가 있었다. 보이첵은 군대에서는 상사의 면도를 해주며, 의사의 명령에 따라 매일 완두콩만 먹고, 소변량이나 감정의 상태를 점검 당한다.

 

가난하기에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는, 시키는 대로 밖에 할 수 없는, 삶의 희망도 가질 수 없는 나약한 인간 보이첵.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정신착란증세를 보인다. 어느 날, 한 가설무대에서 악대장은 보이첵과 함께 온 '마리'에게 눈독을 들이고…

 

의사들과 중대장은 나약하기만 한 보이첵을 향해 인간으로서 가치 없음을 놀리기만 한다.돈 때문에 악대장과 놀아날 수밖에 없는 '마리'.

 

결국 보이첵은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인 '마리'를 죽이고 자신도 죽음을 택하게 된다.



아, 정말, 솔직한 말로 이런 시대에 매력적이기는 힘든 내용이 아닐까 한다. 인간은 어째서 남자에 국한되는가. 사회부조리에 짓밟힌 개인의 파멸, 비극, 보이첵이 이런 멋들어진 말로 포장된 사이 그에게 짓밟힌 마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아니, 사라져버린 그의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에 포함되어 있는 듯 하다.


마치 잠을 잘 권리, 배변을 편히 볼 권리, 밥을 먹을 권리인 것처럼, 마리는 그의 권리 중 하나인 듯이, 그것이 빼앗기자마자 최후의, 인간으로서 가장 마지막의 마지막 권리까지 빼앗긴 듯 보이첵은 파멸을 선택한다. 21세기의 젊은 여자애가 보기엔 거북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긴 하다. 그럼에도, 1821년, 약 200년 전의 작품에 지금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사상은 빠르게 발달하고, 보편적인 인권은 놀라울 정도로 확장되어왔다.


개인적인 거부감은 잠시 접어두고, 오랜 세월 명작으로 남은 희곡 < 보이첵 >이 무대에서 어떻게 펼쳐질지 지켜보자. 현대적인 감성으로 각색되는 데 약간의 기대를 걸어보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관람일을 기다리며 이만 짧은 글을 마친다.



보이첵 포스터.jpg
 

[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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