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인생의 뿌리가 되어 온 나의 구원자 [문화 전반]

글 입력 2019.02.02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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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view



“한동안 저녁 약속 못 잡아요….

앞으로 한 달 동안

<드래곤 길들이기> 봐야 함!”


친한 언니가 SNS에 저 글을 시작으로 <드래곤 길들이기>로 피드를 채웠다. CGV의 재상영에 신나 언니는 1편당 5장 이상씩 예매했고 개봉했을 당시의 팸플릿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9년 동안

내 인생을 설계한 작품이야.”


언니의 발언에 나는 내 인생의 뿌리가 되는, 구원자 작품이 뭐였는지 생각했다. 생각의 시간은 짧았다. 십 년 동안 제일 좋아하는 책을 물을 때 이 작품을 줄곧 말해왔기 때문이다. 아마 50년 후에도 이 책을 고르지 않을까?

 



나의 근원,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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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with an E>, 2017



<빨간 머리 앤>. 이 시리즈를 정말 좋아해서 관련된 것들이라면 뭐든지 찾으려고 했다. 영문 원본 소설, 무성, 흑백, 컬러 영화들과 그와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 뮤지컬 넘버 영상 등 인터넷으로 찾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보려고 했다. 캐나다의 어느 작은 박물관에서 1919년에 무성 영화로 만들어진 <빨간 머리 앤>을 dvd로 판다는 소식에 생애 첫 영문 메일을 보냈다. 넷플릭스에 처음 가입한 이유도 바로 <Anne with an E>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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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에 왜 그렇게 좋아했냐고 묻는다면, 글쎄, 잘 모르겠다. 처음 이유는 아마 책이 예뻐서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친언니 방에 있던 <빨간 머리 앤>의 삽화가 예쁘고 낭만적이었다. 글을 읽던 중 삽화를 볼 때마다 설레었다. 곳곳에 있을 삽화를 만나기 위해 책을 읽었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소녀 시절의 앤 이야기 외에 교사일 때의 앤, 대학을 다니는 앤은 나 혼자 아는 것 같아 우쭐해지기도 했다.

 

잔잔하고 조용한 에이번리 마을에 나도 함께 있었다. 읽는 내내 마을의 풍경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등장 인물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말할지 상상하면서 그에게 친밀함을 느꼈다. 낭만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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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of Green Gables>, 1934


<빨간 머리 앤>과 관련된 영화, 뮤지컬 등을 찾아보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의 겨울이었다. 오랜만에 본 1985년 드라마 <빨간 머리 앤>은 힐링으로 다가왔기에 앤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또한 낭만적인 분위기에 취했던 초등학교 때와 달리 고등학교 때는 다른 이유로 <빨간 머리 앤>을 찾았다. 바로 내가 길버트라는 인물에 빠져있었다. 당시 내 이상형은 길버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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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of Green Gables : The Sequel>, 1986


드라마 속 길버트는 앤을 앤 자체로 바라보고 존중한다.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면서 둘이 함께 성장하는 것이 이상적인 관계로 보였다. 또한 나에게 길버트는 항상 묵묵하게 그 자리에 있으면서 힘들 때 말없이 안아줄 것 같은 이미지였다. 길버트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마음이 안정적일 것 같았다. 길버트가 앤을 동등하게 바라보고 항상 그 자리에 있듯, 그런 사람이 내 삶에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당시 누군가가 나를 따뜻하게 안아줬으면 할 만큼 힘들었던 걸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빨간 머리 앤> 드라마가 당시의 나를 꼭 안아주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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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 1979


성인이 되어 미국을 여행을 갔다. 그리고 여행 중 서점에 들러 <빨간 머리 앤> 첫 번째 시리즈 <초록 지붕의 앤>을 영어판으로 샀다. 1권은 여러 번 봤으니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분위기와 내용은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한국어판보다 더 언어가 생생하게 느껴져 작품에 대해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앤의 당당한 모습에 더 기분이 좋아졌다. 성인이 되어 책을 다시 읽으니 앤 셜리가 내 인생의 롤모델같았다.

 

성인이 되니 앤이 다르게 보였다. 특히 앤이 린드 부인을 만나 화내는 장면이 통쾌하기도 했다. 린드 부인은 앤 앞에서 그의 외모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자 앤은 참지 않고 린드 부인에게 화를 낸다.

 


“어떻게 저한테 마르고 못생겼다고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어요? 아주머니는 무례하고 예의도 없고 감정도 없는 사람이에요!”



예전에는 이 말에 대해 별로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앤의 발언이 시원하다. 솔직하게 말하는 앤이 용감하고 멋있어 보였다. 불쾌한 발언을 들을 때 그 상황을 어물쩍 넘기기보다는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용감하고 통쾌했다. 린드 부인의 말에 상처받은 앤을 보면서 마릴라는 고모에게 못생겼다는 말을 들었던 과거를 떠올린다. 상처를 받은 마릴라는 나이가 오십이 될 때까지 그 기억을 잊지 못한다.


아마 그 당시의 마릴라도 당황하여 그 상황에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넘어갔을 것이다. 나 또한 현실에서 이상한 말을 들을 때 그저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나의 현실과 다르게 반응하는 앤에게서 시원함과 용기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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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of Green Gables>, 1985


<빨간 머리 앤>은 나에게 안식처다.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마다 나는 <빨간 머리 앤>을 핀다. 그곳에서 언제나 따뜻함을 받는다. 그리고 나이에 따라 앤이 주는 따뜻함이 조금씩 달랐다. 미래의 나는 <빨간 머리 앤>의 어떤 부분을 주목할까?



 

나의 뿌리, 나의 지침서


 

언니와 문자로 대화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9년 동안 내 인생을 설계한 작품인데

이제 결말을 보게 된다는 것이 말이 안 돼. 

여태 3편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버텼는데 이제 어떡하지?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언니는 끝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드래곤 길들이기3>가 개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시 문자를 할 때는 언니의 한 시대가 잘 정리되었구나 하면서 토닥이고 점점 작품을 마음에서 보내주라고 말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언니와의 대화를 떠올려 보니 굳이 마음에서 내보낼 필요는 없을 것같다. 언니에게 <드래곤 길들이기>는 인생의 뿌리가 된 중요한 작품이다. 즉 자신만의 인생 지침서라는 것이다. 지금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작품의 결말을 본 것에 시원섭섭함이 크겠지만 딱히 그게 끝은 아닐 것이다.


어떤 시기이든 언제나 앤에게서 따뜻한 위로를 받았듯이 앞으로 남아있는 미래의 시간 동안 언니는 다른 방식으로 <드래곤 길들이기>에서 따뜻함을 받을 것이다.





[연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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