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입체주의 입문자를 위한 전시 ‘피카소와 큐비즘’展

(~03.31) '피카소와 큐비즘'展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글 입력 2019.02.0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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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와큐비즘_포스터.jpg


'피카소와 큐비즘'展
-파리시립미술관 소장 컬렉션-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2018년 12월 28일 - 2019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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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Tête d’homme, 1912
© 2018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그림, 재현이 아닌 추상을 말하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그림과 문자의 동등함을 논한다. 제아무리 그림과 문자라 할지라도 원본의 표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림과 문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언제라도 그림과 문자는 그것을 표현하는 실체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기존의 관념에서 그림은 표현의 대상이 있어야 그림으로서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었다. 가령 정물화를 그린다고 하면, 정물의 대상이 있어야 비로소 정물화라 불릴 수 있었다.

 

르네상스의 미술은 어떠한가. 투시 원근법과 명암법의 발명, 해부학의 발전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 묘사를 가능케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작품을 해석하였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사물의 생생함을 느끼는 르네상스의 미술은 20세기 초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미술사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난다.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기를 강조했던 미술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미술의 위기로부터 시작되는 현상이다. 미술의 혁명은 사진이란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부터 비롯된다. 사진의 발명과 보급 이후, 19세기 서양미술은 현실의 재현 대신 형태 너머의 것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생생한 묘사를 강조하는 사진이 등장한 이상, 미술에서 객관적인 재현은 더 이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재현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상실한 미술은 입체파의 등장을 알렸다. 입체주의(큐비즘)는 1900~1914년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 혁신 운동으로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예술 운동 중 하나이다. 이는 유럽 회화를 전통적인 사실주의로부터 해방한 회화 혁명으로 간주한다. 화가로는 피카소, 브라크 등이 중심에서 입체주의를 이끌었으며 레제와 들로네 등은 이를 응용하여 밝은 색채와 다이내믹한 율동을 표현했다.

 

미술사의 관점에서 큐비즘은 비교적 최근의 사건이다. 하지만 시간적으로 가깝다고 해서 정서적인 친근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재현 너머 원시적이고 추상적인 정신의 모호함을 표현하는 회화를 지향하기에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고, 여럿이 공통된 인상을 받으리란 보장이 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입체주의는 모호하고 난해하다는 인상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질감에 있어서는 입체주의에 대한 무지도 한몫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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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La Danse, 1975
© 2018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입체주의 입문자를 위한 의미 있는 전시



이러한 점에서 ‘피카소와 큐비즘’展은 입체주의 입문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선물로 다가온다. 입체주의 전반에 대한 개괄은 물론, 실제 회화를 통한 깊은 감상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에서 진행되는 전시는 입체주의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알짜배기 전시다. 그러나 여기에는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있다. 바로 전시 명에 담긴 ‘피카소’ 때문이다. ‘피카소와 큐비즘’이라는 전시 명을 본다면 누구나 ‘피카소의 작품이 많겠거니’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전시는 ‘큐비즘’에 더욱 집중된 전시다. 피카소의 작품은 총 4점이 전시되어 있고, 이 또한 큐비즘 전개 과정에 대한 이해의 일원으로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피카소의, 피카소를 위한 전시를 기대한 이들에게는 아쉬운 부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도 ‘큐비즘’에 방점을 찍어 본다면 입체주의 전반에 대한 이해를 구할 수 있기에 아주 매력적인 전시로 다가온다. 폴 세잔부터 오르피즘에 이르기까지 입체주의 전반을 아우르는 작품의 연속을 통해서 알 듯 말 듯한 입체주의의 매력에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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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Braque, Tête de femme, 1909
© Georges Braque /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시작에서 발전까지, 큐비즘의 모든 것



폴 세잔의 작품을 시작으로 전시장 안에는 입체주의 화가들의 그림으로 가득하다. 특히 중반부에 해당하는 ‘입체주의의 발명-피카소와 브라크’,‘섹세옹도르(황금분할)과 들로네이의 오르피즘’, ‘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입체주의’에서는 당대 화랑에 혁신을 가져온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그림에 기하학을 도입한 입체주의는 큰 맥락에서 보면 비슷한 느낌을 준다. 어딘가 모르게 차갑고 정교하게 계산된 것 같은 느낌은 보는 이들에게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그런데도 자세히 보면 화가마다 각기 다른 화풍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강렬한 원색과 거침없는 필치의 ‘모리스 드 블라맹크’, 입체파에 막 매료된 ‘라울 뒤피’,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와 ‘브라크’, 색채 연구에 몰두했던 ‘로베르 들로네’ 등 당대 화랑을 뒤흔든 이들의 작품을 연달아 만날 수 있다. 비슷하면서도 특색 있는 작품을 연이어 보며 자연스레 입체주의를 감상하게 된다.

 

입체주의 그림은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또 동시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원화가 주는 강력한 아우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감상하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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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전시된 튈르리 살롱전 장식화 ⓒ이다선



그림, 자의성을 가지다



입체주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문득 소쉬르가 생각난다. 기의와 기표를 분리하여 언어의 자의성에 손을 들어준 그의 주장이 입체주의 미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라울뒤피의 <정물>에는 눈에 보이는 과일이 없으며, 피카소의 <남자의 두상>에는 일반적인 남자의 모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것은 ‘정물’과 ‘남자의 두상’이란 제목을 지닌다. 작품 속에 실제의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작품의 제목은 언제나 유효한 셈이다.

 

기표와 기의가 분리된 이상 둘은 항상 함께 자리하지 않아도 된다. 기의는 기의대로, 기표는 기표대로 드러날 뿐이다. 입체주의가 시사하는 바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재현하지 않아도 그림은 그림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눈에 비춰지는 것을 묘사하지 않아도 그림은 제 가치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설령 그것이 수학을 기반으로 한 기하학일지라도, 다양한 색채를 표현하는 빛깔의 연속일지라도 말이다.

 

사실을 묘사하는 게 꼭 사실대로 그리라는 법은 아니다. 르네상스 이후 500여년이 흐른 뒤에야 입체주의에 의해 고정불변의 진리가 깨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사실적인 것의 재현에 익숙하다. ‘피카소와 큐비즘’전시를 통해서 표현의 자의성을 마주해 보는 건 어떨까? 마냥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그림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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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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