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전에 없던 견고한 회화

전시 피카소와 큐비즘
글 입력 2019.02.03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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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피카소와 큐비즘> 전시회를 가기 전, 프리뷰에서 입체주의에 대해 그나마 알고 있는 내용을 정리하면서도 나를 참 의심했었다. 입체주의의 작품들은, 우선 내게 어떤 느낌을 안겨주는 작품이라기보다는 미술사에서 어떤 전환점을 남겼는지와 같은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입체주의의 그림들은 신기하게도 그 단순하고도 빠른 ‘느낌’보다 언젠가 습득한 그 의미 자체만 기억에 자리하고 있는 그림들이었다. 그런 내가 이번 전시회를 가서 그들의 작품을 직접 마주했을 때 어떤 느낌을 안고 돌아올지 정말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냥 또 프리뷰의 내용을 전시를 보며 반복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하지만 작품이 작품인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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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전에 없던 견고한 회화



작품을 이해하는 데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 시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시대에 그 작품이 나왔다는 건 분명히 당대에 요구하거나 흐르고 있던 무엇인가가 있었고 그 사이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사람과 지금의 우리가 서로의 시대를 조금이라도 공유하지 않고서는, 전혀 어떤 대화가 이뤄지기 힘든 것처럼 그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시대의 시선을 아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갑자기 이런 내용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이번 <피카소와 큐비즘> 전시에서 그런 시선을 장착하려 노력한 사람의 리뷰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으론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그 당시의 미술 상황에서 바라보면 입체주의를 더 이해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었다. 예를 들면 입체주의 전시 <피카소와 큐비즘> 전시회는 그 기원으로 여기는 세잔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세잔 바로 이전에 유행했으며 지금도 유명한 인상주의의 작품을 머릿속에 살짝 기억하고(모네의 그림 같은) 세잔의 작품부터 바라보면 “그냥 그림”보다는 조금 더 나은 무엇인가, 즉 어떤 변화의 지점을 느끼게 해줄 실마리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시선으로  입체주의의 근원 세잔부터, 그것의 종말이자 추상회화의 시작을 알린 들로네까지 살펴보고 만나며 나는 이들의 작품을 이렇게 결론 내렸다.


“전에 없던 견고한 회화”

라고


***


입장하고 저 멀리 세잔의 작품을 보자마자 호들갑을 떤 기억이 난다(어쩔 수 없는 ’미술 좋아 인간’인가보다. 아니 정말 세잔의 작품이라니까요!).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이미지로만 작품을 보는 것과 예술가의 흔적이 다분한 작품을 직접 만나는 것은 정말 달랐다. 예상과 달리 처음 만난 세잔의 작품 앞에서부터 발걸음을 쉽게 옮길 수가 없었고, 그렇게 전시회를 오기 전 품고 있던 나에 대한 의심도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졌다.


“견고하다”


세잔의 작품을 한동안 보다 떠올린 말이다. 단단하다고 하기에는 딱딱하지는 않고, 그렇다고 흐르는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단번에 한 단어로는 정의할 수 없는 그 견고한 느낌. 프리뷰에도 남긴 것처럼 그의 작품이 인상주의가 놓친 사물의 균형성과 견고함을 회복하기 위해 기하학적 구성을 도입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만나서 바라보니 그런 느낌들이 그저 아는 것과는 다른 경험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생각해보니 세잔은 인상주의의 문제만 본 것이 아니라, 인상주의자들이 포착한 빛의 인상은 좋은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세잔은 기하학적 구성이라고 날카롭고 엄격하게 선으로 구분한 구성이 아닌(이는 후에 본격적인 입체주의에서 드러난다.), 여전히 빛의 인상을 품은 색채로 기하학적 구성을 시도했다. 거꾸로 흘러가 보았을 때 그의 작품은, 세잔으로서도 그리고 미술의 흐름으로서도 이런 모습으로 탄생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세잔의 고민에 대한 해답으로 이뤄낸 작품은 정말 멋진 대답이었다. 


나는 그래도 선보다는 색채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구성이라 이미지로 봤을 땐 구름 같은 덩어리로만 이루어진 느낌이라서 단단한 느낌이 덜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전혀 아니었다. 사진으로는 그저 연하고 밝은색들의 덩어리 모임으로 보였을 세잔의 작품들을 직접 보니 유화의 묵직한 느낌과 함께 그 인상주의와는 다른 느낌인 견고함을 전해주고 있었다. 곳곳에 있는 두껍고 거친 붓질에서도 단단함이 느껴졌다. 인상주의의 모네의 작품을 생각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세잔의 작품을 보면 세잔의 작품이 어떻게 인상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가까이 느껴지는 세잔만의 견고함이었다. 


빛을 한껏 담은 색채와 그것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세잔의 작품은 밝고 빛나는 풍경인 동시에 무너지지 않을 듯한 단단함이라는 어떤 믿음을 전해주는 그림이었다. 이처럼 세잔은 자신의 고민과 당대의 미술의 흐름을 조화롭게 이뤄내며 작품을 그려낸 화가였다. 그리고 미술의 흐름은 이제 빛의 인상보다 다른 것에 주목할 때가 왔던 것 같다. 새롭게 등장한 입체주의는 세잔의 기하학적인 구성이 주는 견고함을 미술 전통 파괴를 위한 해답의 요소로 끌어당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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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르 비유 마르크 술병, 1914년 경, 38.5x55.5cm
왁스 칠 한 캔버스에 모래와 유화
Pablo Picasso, Le Vieux Marc, c.1914
© 2018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피카소와 큐비즘> 전시 리뷰에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작품을 직접 보고 놀란 부분은 이 두 화가가 정말 형태 그 자체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직접 눈으로 본 이 둘의 작품에는 유화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금의 특징이라도 드러나는 표면이 없었다. 매끄럽지도, 그렇다고 거친 것도 아니었다. 표면에서 드러나는 질감은 작품에서 어떤 느낌을 전해주는 데에 꽤나 큰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크게 드러나려는 작품이 아니었다.

그리고 피카소와 브라크는 색채마저도 최대한 적은 수를 활용했다. 그런 그들의 작품들이 내겐 이 작품들이 '표면'상으로는 뭔가를 말할 기미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적은 색채, 드러나지 않은 질감, 오로지 작품에서 뚜렷이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는 건 형태의 구성뿐이었다. 피카소의 <르 비유 마르크의 술병> 작품에는 모래라는 새로운 시도가 등장했지만 모래 조차도 유화 붓질과 함께하며 제 성질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고 있었다. 어쩌면 모래의 입자들도 어떤 표면을 채운 도구가 아닌 엄연한 하나의 입자들이라는 형태로서 작품의 구성에 함께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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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남자의 두상, 1912, 61x38cm, 캔버스에 유화

Pablo Picasso, Tête d’homme, 1912

© 2018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만약에 입체주의가 제안한 재현의 세계를 현실로 그대로 옮겨 오고 이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을 손가락을 툭 치면 “탁”하고 작은 소리가 날 것 같았다. 투박하고 정적인 소리, 조각이 맞물리는 미세한 소리만 울리고 있지 않을까. 손가락을 넣으면 빛 사이로 사라질 것 같은 입체주의, 살결과 나뭇잎 결이 보드라운 그대로 느껴질 것 같은 르네상스라면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은 엄격한 표면이 손끝에 닿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만큼 사물의 어떤 느낌보다는, 그 형태 자체에 시선을 주목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들이 새롭게 제안한, 전통 회화의 방식을 파괴한 형태의 언어, 그것이 입체주의의 시작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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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아 곤차로바, 라일락이 있는 정물

1911, 81x45cm,캔버스에 유화

Natalia Gontcharova, Nature morte aux lilas, 1911

© Musée d'artmoderne de la Ville de Paris



입체주의 화가들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시각 언어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고 연구한 예술가들이었다는 느낌을 전시를 보며 자주 느꼈던 것 같다. <구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품들이 유독 많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형태를 재현하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다른 예술보다도 깊이 사유한 회화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사물을 분리하고 치밀하게 재구성하여 쌓아 올린 파편들은 툭 쳐도 무너질 것 같은 안정감과 단단한 느낌을 준다.


전통 회화가 그린 꽃들은 원래 꽃들이 그러하듯 손으로 살짝 건드리면 살랑하고 흔들리거나 아른거릴 것 같지만, 입체주의의 꽃은 그런 인상과는 다른 느낌을 안겨준다. 흔들리지 않을 것 같고 단단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다. 만약 “사물의 본질”이란 것이 외부로서 정의된 겉모습과 달리 내부에 품고 있는 단단한 무엇인가라면, 나는 입체주의 작품이 사물의 본질을 드러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


입체주의가 회화로서 선포한 예술이 해낼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 그리고 기하학적인 형태가 주는 안정감과 균형, 그리고 이로써 재현할 수 있는 사물의 본질의 발견을 미술의 흐름이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법이다. 그 견고함을 이룬 기하학적 형태의 구성은 황금분할의 시도로 발전했고, 기존의 입체주의 작품이 너무 정적인 느낌이라는 것에 한계를 느꼈던 것인지 화가들은 새로운 시도로 입체주의에 드러나지 않던 색채를 드러내고 시간의 개념을 더하며 오르피즘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절정까지의 과정에는 들로네와 레제가 함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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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들로네의 거대한 장식화가 안겨준 압도감을 기억한다. 첫인상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거대했다. 와! 이 작품은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정말 입이 떠억 벌어지는 작품이었다. 들로네의 거대한 장식화들은 어쩌면 입체주의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보았을 땐 색채, 안정적인 구성, 추상까지 모두 담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입체주의의 흐름을 보여주는 전시에서 들로네의 장식화가 마지막에 위치한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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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들로네, 리듬 n°1, 튈르리 살롱전 장식화
1938, 529x592cm,캔버스에 유화

Robert Delaunay, Rythme n°1, décoration pour le Salon desTuileries, 1938

©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같이 간 친구는 장식화의 색채가 직접 보니 예쁘다며 감탄했다. 나는 "맞아"라며 망설임 없이 함께 감탄하고 있었다. 작품에 크게 있는 현란한 무지개색의 나열도 유치하기보단 정말 아름다웠다. 화려한 색채는 곳곳에 자리한 낮은 톤의 색과 무채색이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균형에는 형태의 구성도 한몫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림을 그릴 때 안정감을 위한 구성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나 상상을 한다. 완벽한 균형과 비례를 추구하던 르네상스의 작품들 사이에서도 구도가 안정감 있고 완벽하다는 것이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되는 중요한 요소인 만큼, 안정감을 추구하는 구성은 그냥 떠오르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화면을 구성하는 것, 크게 와닿지 않는 이 말을 더 가까이 이해해보려면 이 작품을 그리는 입장이 된 상황을 상상해보면 좋을 것 같았다.


입체주의 이전에는, “구성의 안정감”을 추구하게 된다면 그림에 재현된 사물들을 어디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었을 것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마 우리는 이미 현실을 살며 사물이 어디에 어떻게 있을 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수없이 보며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테이블 위에 무엇을 어떻게 놓을지 생각해볼 때 대충 감이 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물도 아니고 그저 도형일 뿐이라면, 그리고 도형의 구성원 자체와 그것이 위치하는 평면의 크기, 그리고 들어가는 색채들을 고려하며까지 이를 배치하는 구성의 경우라면, 바로 붓을 대기엔 신중한 고민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대형작품이다. 단번에 떠올린 심상을 거침없이 그리기엔 그 크기가 주는 힘과 인상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단순하게 그려지지 않았을 들로네의 대형 그림들은 이 모든 것을 이뤄낸 정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변화와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이 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미술사에서 들로네의 대형 장식화는 '입체주의의 종말과 추상주의의 시작'이라는 이름을 가지기에 충분한 작품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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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그대로 그리는 ‘재현’만을 해낼 수 있는 전통회화의 방식을 깨뜨린 입체주의는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시각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으며 이 시작은 “미술만이 할 수 있는 시각 언어”라는 새로운 언어와 문법을 창조해내는 현대미술까지 이르렀다. 마치 우리도 모든 사람들을 할 수 있는 것이 같을 뿐인 사람들로 서로를 보는 것이 아닌 한 사람만의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과 같이, 그리고 '나' 개인도 남들을 따라 하기보다는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과 같이, 단순한 재현의 방식에 불과했던 미술은 자신이 미술로서 할 수 있는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단순한 재현이 아닌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겠다는 입체주의의 과감한 재현 방식의 파괴가 큰 영향력을 주었다.


전통회화와 현대미술의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인 입체주의는 함께 살펴보기에 가치 있는 사조이다. 그리고 이번 <피카소와 큐비즘> 전시회는 그런 입체주의를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간단히 후기만을 남겨보자면 개인적으로는 입체주의와 추상주의 그 사이의 지점을 직접 거닐어 볼 수 있던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어 좋았고, 전시회가 늘 그렇듯이 원화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 들로네의 대형화를 국내에서 볼 수 있던 건 정말 엄청난 기회가 아니었나 싶었고 언제 또 그런 대형화가 한국까지 찾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러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이번 전시회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피카소와 큐비즘>이라는 입체주의의 흐름을 원화들과 함께 살펴보는 전시는 자주 찾아올 기회가 아닐 것이다.


리뷰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유명한 화가들 외에도 함께 존재했던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흥미로운 포인트다. 그들의 작품에서도 입체주의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미를 포착할 수 있었고 우리가 아는 거장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당시 미술 흐름에 작품으로서 이뤄낸 대답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기회였다. 그들의 작품을 함께 바라보며 입체주의의 흐름에 대해 생각을 지어보는 것도 좋은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다만 입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미술사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재현과 형태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예술이기에 이런 면에서는  그저 느끼기에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은 것이 입체주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피카소와 큐비즘>이 바로 입체주의에 들어가기보다는 후기 인상주의의 세잔을 우선 배치한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입체주의는 간단하게라도 그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요약적인 내용을 알고 간다면 더 유익한 전시가 될 것 같으니 전시에 함께 배치된 텍스트도 놓치지 않고 함께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남긴다.

 + 사실 피카소와 브라크 작품을 만나기 전 입체주의가 탄생한 흐름을 작은 글씨로 빼곡히, 그것도 꽤 많은 양의 텍스트로 나열한 건 조금 막막한 느낌을 준 것 같기도 했다. 전시의 중요한 지점이기도 했는데 일반인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조금 더 필요한 부분과 함께 간략하고 요약적인 내용으로 전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소한 부분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에서 아쉬운 부분은 이 부분이었던 것 같다. 

세잔의 작품으로는 사진으로 본 기대와 달리 강한 견고함을 지닌 모습을 작품에서 느낄 수 있었으며, 입체주의의 작품에서는 사진으로만 보았을 때 전혀 몰랐던 "정적"인 느낌과 "형태를 향한 강한 관심"을 이해할 수 있었고, 들로네의 작품으로는 대형화가 안겨주는 압도감과 입체주의의 흐름이 안고 있던 고민과 문제들을 풀어놓은 대답에 감탄할 수 있었다. 모두 내가 전에 가지던 지식만으로는 다가갈 수 없었던 범위의 이해가 일어났던 순간이자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이런 범위를 실제로 느껴보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한 예술의 흐름을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과 이 흐름을 그저 배운 지식으로만 의미를 기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내가 바라보고 이해한 느낌으로 기억할 수 있다는 것들이. 

이번 기회로 그들의 작품과 나 사이에서 이해한 입체주의는 "전에 없던 견고한 회화"다. 앞서 말했지만 사물의 본질이, 더 나아가 모든 것의 본질이 내면에 그런 단단하고 견고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입체주의가 본질, 실재를 재현한 예술이란 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직접 만난 입체주의는 내게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인상을 남긴 회화였으며, 입체주의 화가들은 그만큼 멋진 파괴를 이루어낸 예술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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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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