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일상을 침투하는 악의 평범함, 연극 '빌미'

글 입력 2019.02.06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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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빌미'


연극 ‘빌미’는 결혼이란 일상의 소재를 통해서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최 교수 부부는 딸 승연의 유학 송별회를 위해 부부 소유 펜션에 온다. 송별회를 맞는 자리에서 승연은 자신의 약혼자 진성필을 데려와 결혼 허락을 구한다. 그러나 최 교수는 약혼 상대를 보고 단번에 거절한다. 딸의 약혼자 진성필이 과거 자신의 제자였고 현재는 시간강사라는 불안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결혼상대로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를 든다. 딸은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달라며 부모에 설득을 구하고, 진성필 또한 자신들의 사랑이 타당하다는 근거를 대며 결혼 승낙을 요구한다.

 

최교수 부부는 쌍수를 들고 결혼을 반대한다. 반대하는 과정에서는 진성필이 딸 승연을 의도적으로 유혹했다고 판단하며 둘을 떼놓으려 한다. 이 과정에서 흥분한 진성필은 급성 천식발작을 일으켜 돌연 질식사한다. 진성필의 갑작스런 죽음은 최교수 부부와 승연,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승연의 죽마고우 하늘 모두를 당황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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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연의 부모(최 교수 부부)에게 결혼 승낙을 구하는 진성필
ⓒ옥상훈(2018창작산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진성필의 죽음이다. 당황도 잠시 최 교수 부부는 펜션에서 일어난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증거를 인멸하고 알리바이를 맞춘다. 또한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데, 사회적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기 때문에 사건으로 인해 자신들의 입지가 훼손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부부는 경계성지능장애를 앓고 있는 승연의 소꿉친구 하늘을 용의자로 지목하며 범죄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죄를 뒤집어씌우는 과정에서 진성필은 잠시 의식을 회복한다. 그런데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생각한 이들은 진성필의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를 감금시킨다.

 

작품의 시간은 진성필의 죽음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두 갈래로 나뉜 시간은 ‘현실과 이상’, ‘진실과 허구’란 맥락 속에서 파악된다. 죽은 이전으로 돌아가면 사랑을 인정받고자 하는 승연과 진성필의 모습이 보인다. 딸 승연은 진성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물론 사회적 명예와 부를 다 가진 부모 입장에서 딸의 사랑은 그저 장난내기에 불과해 보인다. 여기서 작품은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승연의 사랑이 진심어린 사랑인지 아니면 한낱 이상에 불과한 것인지 부모 자식 간의 갈등, 가족 구성원과 비 가족구성원 간의 갈등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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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생각이 전혀 다른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는 승연
ⓒ옥상훈(2018창작산실)


작품 초반의 사랑의 ‘현실과 이상’이란 갈등은 희극적인 요소에 의해 본질이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펜션에 와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딸의 유학 송별회를 하려는 찰나에 등장한 의문의 대머리 남성이란 상황에 집중되어 이들의 갈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진성필의 죽음을 통해서 갈등이 전하는 바의 가치가 사후적으로 다가온다.

 

상황의 맥락에서 보자면 ‘저렇게까지 했어야 했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진성필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사랑의 본질을 다시금 살펴보게 만든다. 허무맹랑하게 결혼을 주장한다고 생각했던 승연의 입장은 명예와 지위를 생각하는 최교수 부부에 의해 비상식적으로 여겨졌던 죽음 이전의 언행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동시에 사랑이란 이름 아래 최교수의 권력, 갑질, 명예가 방해하고 있었는지도 뒤늦게 이해가 된다.

 

어쨌거나 진성필은 사망하였다. 원인이 크고 작건 ‘살인’이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사건 이후 작품은 ‘진실과 허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최교수 부부는 경계성지능장애를 앓고 있는 하늘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 하늘의 낮은 지능을 이용하여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하지만 하늘은 그 와중에 진성필에 대한 비밀을 폭로하며 최교수 가정을 파국에 이르게 만든다. 어떤 발언이 진실이고, 어떤 발언이 거짓인지는 중요치 않다. 하늘의 발언으로 인하여 의심을 하기 시작한 이상 진실과 거짓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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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필의 사망을 완전히 감추려는 승연
ⓒ옥상훈(2018창작산실)


작품 속 펜션은 ‘침묵의 집’이다. 역설적이게도 펜션은 그간 금기된 침묵이 터지게 되는 발설의 장이다. 사회적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최교수 부부를 중심으로 등장하는 딸 승연, 하늘네 가족, 진성필은 모두 부부로부터 억압과 차별을 받는 존재다. 승연은 언제나 부모의 뜻에 따라 판단하고 살아온 수동적인 인물이고, 하늘이네는 최교수 부부의 부를 통해 형성된 일방적인 갑을관계다. 게다가 진성필은 과거 최교수의 제자였고, 시간강사라는 지위로 인하여 자연스레 차별과 무시를 받는 존재다. 최교수네 부부를 중심으로 대척점을 구성하는 인물들은 진성필 사건 이후로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최교수 부부에 대한 응어리를 토로한다.

 

그러나 인물의 관계는 최교수 부부-하늘이네, 승연, 진성필이란 일대일의 구조에서 그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허물을 폭로하고 비난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하늘은 가정 속에서 암암리에 용인되어 온 부모의 폭력을 고발하고, 승연은 진성필과의 연을 강제로 분리시킨 부모에 대한 원망을 토로한다. 하늘네 부모는 최교수의 갑질에 대항하여 이들 부부에 분노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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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종과 유착관계로 비롯되는 기만과 폭력을 묘사하는 '빌미'
ⓒ옥상훈(2018창작산실)


결혼 허락이란 날갯짓이 결국에는 서로를 헐뜯고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거대한 폭풍을 가져왔다. 작품명이 되는 ‘빌미’의 사전적 정의는 ‘재앙이나 탈 따위가 생기는 원인’이다. 작품 속 파국을 이끄는 악의 빌미는 무엇인가? ‘침묵의 집’에서 일어난 악의 빌미는 거대한 무언가가 아니다. 다만 미미하여 파악하지 못하고, 익숙하여 인지하지 못한 악의 평범성일 뿐이다.

 

한나 아렌트가 논한 ‘악의 평범성’은 사유하지 않고 공감능력이 없다면 누구나 환경과 구조에 의해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개념이다. 사유와 공감능력의 부재는 개인의 불행에서 그치지 않고 타인과 공동체를 위협한다. ‘빌미’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일어난 사건에 대한 깊은 반성과 고민 없이 그저 거짓을 덮기 위한 행동은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행사하는 공감능력의 상실을 만들었다. 바깥세상과는 단절된 채, 악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펜션은 곧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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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면서 인물의 갈등은 절정에 이른다
ⓒ옥상훈(2018창작산실)


연극 말미에는 비가 내린다. 인공 장치를 통해 파멸의 끝을 보게 된다. 남아 있는 이는 하늘과 승연이지만 이들 또한 어떤 악으로 치닫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빌미’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악에 이르는 빌미를 지니고 있다. 승연과 하늘은 부모의 억압이 싫었고, 하늘의 부모는 최교수 부부의 갑질이 싫었다. 그러나 이들을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스스로의 덫에 의해서다. 폭력과 죽음이란 극단적인 표현에 의해 이들의 갈등이 해소된다. 파멸에 이르러 정화에 도달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따라서 연극 ‘빌미’는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일어나는 ‘살인’이란 사건을 통해 악의 평범함을 밝히고 거짓으로 그 어떤 것도 가릴 수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전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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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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