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 내리는 봄엔 이 영화를 보세요 - 4월 이야기 [영화]

처음으로 가득한 이야기, 나의 4월
글 입력 2019.02.0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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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월의 둘째 주이다. 곧 있으면 3월이 되고 새 학기가 시작되고 대학에는 신입생들로 가득하겠지. 서서히 벚꽃이 피는 3월의 길거리는 언제나 설렘과 기대로 들떠있을 거다. 그리고 일본의 4월도 새 학기가 시작되는 달이다. 모든 게 처음인 사람들의 시작의 달. 4월. 그 4월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4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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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도쿄에 위치한 무사시노 대학에 입학하는 주인공 우즈키를 배웅하는 가족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가족의 품을 떠난 우즈키는 혼자 살게 된 새집도, 도쿄도 모든 게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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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비처럼 내리는 봄, 4월. 봄을 맞아 누군가는 결혼하고 또 우리의 주인공은 이삿짐을 옮긴다. 바쁘게 움직이는 이삿짐센터 직원들 사이로 무엇을 도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의욕만 앞서는 우즈키. 돕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 방해만 된다. 혼자 하는 이사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스무 살이다.

낯선 상황이 어색하고 두렵지만, 한편으론 모든 일이 설레고 해맑은 우즈키. 이사를 끝낸 그녀의 후드티 사이로 벚꽃잎들이 떨어져 내린다. 풋풋한 꽃내음과 함께. 스무 살에게 봄의 기운은 정신없이 다가와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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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의 자기소개 시간. 다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할 때, 우즈키는 긴장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해 부끄럼을 탄다. 이 대학에 온 이유를 묻는 동기에게 별다른 말을 찾지 못해 곤란하며.

우즈키처럼 내향적이고 낯을 가리는 나에게도 입학 후 첫 오티는 정말 도망치고 싶었다. 점점 차례가 다가오며 바로 앞 순서 동기가 자리에 일어설 땐 머리가 새하얘지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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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키의 고향 훗카이도와 달리 따사로운 도쿄의 봄은 가져온 스웨터도 벗게 했다. 책을 읽으러 앉은 공원의 벤치에서, 진한 키스를 하는 커플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를 뜨기도 하고 영화관에서 고전 사무라이 영화를 보다 가까이 다가온 변태에 '뜨악'하며 뛰쳐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20살은 세상에 이상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첫,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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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비틀, 자전거도 위태롭게 타는 그녀에게 낚시 동아리는 더욱 어색하다. 그다지 끌리지도 않는 낚시 동아리에 가입한 이유는 동기의 영업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스무 살 때 한 동기의 꼬임에 넘어가 밴드부에 들어갔다지. 덕분에 대부분의 수업을 재수강해야 했지만. 현재 그 친구와 나는 절친이 되었다. 우즈키와 그녀의 동기를 보면서 또다시 옛 생각에 잠긴다.

위태롭던 자전거가 어느덧 익숙해져 안정감이 느껴질 때쯤, 무사시노 서점에서 첫사랑 선배를 만난다. 사실 그녀는 이 서점의 점원, 야마자키 선배를 만나기 위해 무사시노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마주친 선배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책만 사서 나온다. 겨우내 기다리던 첫사랑의 재회는 이다지도 볼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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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시노'시에 있는 '무사시노' 대학. 짝사랑하는 선배가 일하는 '무사시노' 서점. 그곳에 선배가 있단 걸 안 순간부터 우즈키의 목표를 '무사시노'였다. 그녀에게 무사시노는 야마자키 선배 그 자체였다. 자꾸만 선배를 생각나게 하는 무사시노를 계속 중얼거린다. 무사시노, 무사시노, 무사시노.


소녀의 마음속 첫사랑은 세상 무엇보다 크고 간절하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사랑을 위해 뛰어드는 순수한 마음. 그것처럼 견고하고 단단한 마음이 또 있을까.



홀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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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같이하실래요?
제가 카레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죄송해요. 저 벌써 먹어서요."


혼자 먹는 밥이 질렸을까. 저녁을 같이하지 않겠냐 두들긴 앞집에서 거절의 말을 들은 우즈키는 또다시 혼자서 밥을 먹는다. 너무 조용한 집안에 음식 씹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자 잠시 일어서서 티비를 켜 소리를 채운다. 밥을 다 먹고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통화를 할 때쯤 들려온 초인종 소리는 앞집이다. 거절한 게 미안해서 찾아왔다는 그녀의 말에 우즈키는 환한 미소로 대답한다. "들어오세요."

스무 살의 나는 막 상경한 탓에 아무 연고도 없이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막막함이 두려웠다. 그렇게 홀로 밥을 먹으며 적막함을 티비소리로 달래고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터득했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땐 새로운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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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린 무사시노 서점. 드디어 선배가 우즈키를 알아봤다. 그의 눈동자가 커지며 훗카이도에서 오지 않았냐 물을 때는 마치 내가 우즈키가 된 양 기뻐하고 설렜다. 아직 뚜렷하게 우즈키에게 호감을 표시하지 않았지만 단지 둘의 연결고리를 선배가 알아차렸다는 이유만으로 뭔가 일이 잘 풀릴 것만 같다.

20대 초반의 나는 한창 호감과 선의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내게 잘해준 사람에게 하던 수많은 착각들. '혹시나, 저 선배도... 나를?'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참 터무니없는 설레발이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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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밖을 확인하고 우산을 가져다준다는 선배의 호의를 "이이데스. いいです.(괜찮아요)"하고 거절하는 우즈키는 쏟아지는 빗속에 잠시 건물 처마를 우산 삼아 비를 피한다. 이걸 쓰라며 우산을 건네는 낯선 이에게도 "이이데스."하고 거절하지만 이내 실례하겠다며 우산을 건네받고선 다시 서점을 향해 내달린다. 낯선 이를 한껏 경계하던 그녀는 모르는 행인에게 우산을 건네받기도 할 만큼 세상에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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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 우산을 빌려달라는 우즈키의 말에 선배가 고르라며 우산들을 건넨다. 우즈키가 고른 빨간 우산은 고장이다. 그렇지만 어찌나 좋은지 양볼을 빨갛게 물들인 우즈키는 언제나 그렇듯 "이이데스."

그렇게 우산을 꼭 돌려주겠다고 다음을 기약한 우즈키는 고장 난 빨간 우산을 들며 빗속을 달린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온몸이 젖었지만 내딛는 걸음은 씩씩하기만 하다. 우산을 빌려준 사람에게 다시 우산을 돌려주며 언제 낯을 가렸냐는 듯 씩씩하게 웃는 우즈키. 그렇게 그녀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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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기적이라 부른다면
난 그걸 사랑의 기적이라 부르고 싶다."


짝사랑하는 선배가 준 고장 난 우산을 들고 비를 막으며 이 순간을 사랑의 기적이라 부르겠다는 우즈키. 이 모든 걸 저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세차게 내리는 비와 그 속에 첫사랑을 시작한 한 여자.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그들이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이어나갈진 온전히 상상의 몫이다.

*

"재이 씨가 보면 정말 좋아할걸요? 꼭 비 내릴 때 보세요."

2년 전쯤 영화를 전공한다는 지인으로부터 얼떨결에 추천을 받게 된 영화였다. 잠시 잊고 살다가 4월의 어느 날, 비가 내리는 밤에 추적추적 빗소리를 들으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삿짐을 나르느라 분주한 틈에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낯설지 않음을 느끼는 순간, 이 영화가 인생영화가 될 거라는 깊은 예감이 들었다.

이제는 더는 소녀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고, 그렇다고 여인이라기엔 어딘가 어설픈, 그 경계에 서 있는 우즈키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그날 밤은 우즈키에게서 자꾸만 언젠가의 나를 찾았다.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광경이 생경하고 어설프기만 한 그때의 나를. 아주 엉성하고 어리숙한 시기의 나는 우즈키처럼 세상에 녹아들었고 또 누군가를 좋아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어렸고 미성숙한 '좋아함'은 우즈키만큼 커다랗진 않았지만 잠깐의 분홍빛 세상을 선물해줬다. 밥을 먹지 않아도 행복하고 메시지 하나에 호들갑을 떠는 온통 봄의 세상. 물론 나의 결말은 새드였지만.

우즈키와 선배가 훗날 어떻게 되었는지, 일방통행의 마음이 쌍방이 되었는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다. 차라리 이렇게 인연의 시작에서 영화가 끝난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경험상 모든 첫사랑은 어딘가 상처를 내고 흉터를 남기는 것 같기에. 그 열렬한 시작으로 마무리를 짓는 것이 첫사랑이란 감정을 극대화할 방법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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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이야기>는 1998년 영화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일본영화 <러브레터>를 만든 이와이 슌지 감독 작품이다. 처음 영화의 정보를 들었을 땐 이 영상미가 1998년의 것이라는 사실과 감독이 중년 남자라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 어떻게 이렇게 어리숙한 여자의 마음을 잘 표현했는지. 67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속에서 극은 긴박하지도, 극적이지도 않게 잔잔히 흘러간다. 너무 과해서 도화지가 뚫릴 것 같은 느끼함도 없고 너무 건조해서 버석거리는 마른 느낌도 아니다. 아주 적당히 물을 머금은 물감으로 섬세하게 그림을 그린 촉촉한 수채화 같다.

곧 만물이 새로운 시작을 하는 봄이 온다. 새 학기의 시작과 신입생의 달은 3월이지만, 무얼 느낄 새도 없이 지나가 버리는 3월에 비해 4월은 조금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기는 달이다.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산뜻한 풀내음을 맡으며 설렘을 동반한 오후를 이 영화와 함께하시길. 물론 비가 온다면 더 좋고.




[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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