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두 여자의 치열한 일대기, <고아 이야기>를 읽고

팜 제노프 작가의 <고아 이야기> 리뷰
글 입력 2019.02.06 20:2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치열한 인간의 삶은 언제든 또 다른 인간의 영감이 된다.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있다가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천장을 쳐다봐도, 열심히 사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라는 의욕이 솟구친다. 그게 현실의 인간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허구의 이야기가 현실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마음이 울적한 날엔 별 것 아닌 한 문장도 오래오래 들여다보는 것처럼, 이번에는 아이, 전쟁, 그리고 서커스에 관한 두꺼운 책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생존의 기록



<고아 이야기>는 두 여자의 목소리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책이다. 노아와 아스트리드는 여성의 몸으로 한 아이와 함께 길고 긴 터널을 헤쳐 나아가야 했다. 유대인이라는 낙인이 데스노트에 적힌 이름처럼 느껴지던 시대에, 나치를 피해 지지부진 도망쳐야 했던 시대에, 노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서커스단에서 공중곡예를 하게 된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허공을 날아가 아스트리드의 손을 잡는 건 여전히 겁나는 일이었다. (중략) 어쩌면 아스트리드가 일부러 나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려 들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질 수 있을까?


우리의 눈동자가 맞닿았다. 나만 믿어. 아스트리드의 눈빛이 말하는 것 같았다.


(191p)


 

서커스단에서 노아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할까 봐 의심하던 아스트리드는, 그녀와 끊임없이 손발을 맞추는 과정에서 서서히 있는 그대로의 노아를 받아들이고 마음을 나누게 된다. 물론 기질이 정반대인 탓에 티격태격하기 일쑤지만, 아스트리드와 노아 모두 서로를 진심으로 미워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의 연대에는 다음의 전제가 깔려있다. 둘 모두 자신 스스로밖에 믿을 수 없는 외톨이라는 것, 그리고 이 전쟁 같은 삶 속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아스트리드, 나를 잡아요.” 노아는 그네를 타고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외쳤다. 도저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중략) “피터도 당신이 살아남기를 바랄 거예요.” 그녀가 덧붙였다. “여기서 포기하지 말아요.”


“피터는 죽었어.”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알아요. 하지만 우린 여기 있잖아요.”


(474p~475p)


 

전쟁이 비참한 것은 언제든 인간이 거리에서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이든, 처음 보는 사람이든 간에 죽음이 공평하게 삶을 휩쓸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노아와 아스트리드는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 지금 이 순간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두 사람이 그 단순하면서도 묵직한 이유를 찾아내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노아의 말이 오래도록 마음을 울린다.




태어난 것만으로도 사실 충분한데, 그쵸



삶의 이유를 명확히 규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주 드물 것이다. 태어났기 때문에 삶을 강요받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가끔은 이런 불공평하고 정신력만 빼먹는 세상에 내가 왜 태어났는지, 살아간다 해도 무엇을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이건 인간의 존재 의미를 고찰하는 거창한 철학적 질문이 아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순간에, 특히 아주 고된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어김없이 이마를 두드리는 딱밤 같다.

 

왜, 어떤 사람이 장난을 친답시고 딱밤을 때린다고 생각해보라. 갑작스럽게 이마를 두들겨 맞고 나면 기분이 아주 더럽다. 욕설과 함께 핑 도는 눈물을 삼키느라 고개를 숙이게 되지만, 통증이 가라앉고 나면 머리에 찬물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 내가 딱밤을 맞았는지, 딱밤을 때린 놈이 누구인지, 그놈한테 복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밝히다 보면, 다시는 이런 딱밤을 맞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나를 단련하게 된다. (물론 딱밤은 일평생 계속되고, 내가 결코 피할 수 없는 딱밤도 존재한다.)



딱밤.JPG
△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종영)>의 '무한상사', 사진=MBC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딱밤에 비유하다니. 영 별로인 듯한 예시지만 어쨌든, 예측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두개골을 흔들리게 할 정도로 아프다는 점에서 이 두 가지는 닮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우리는 딱밤 맞기를 계속할 것이다. 때로는 피하려다 맞고, 때로는 울면서 맞겠지만, 결국은 그 통증을 버티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내 삶을 뒤흔드는 시련을 맞닥뜨렸을 땐 이마를 문지르면서 이렇게 생각해보자. “이번 딱밤은 좀 아프네.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다시 <고아 이야기>로 돌아와서



치열한 삶이라는 두 단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다. 뜬금없지만. 노아와 아스트리드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이기도 했다. 프리뷰를 적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몰입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두 여자의 치열한 일대기가 예상치 못하게 마음을 두드린 탓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던 두 사람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아이야기_표1_앞표지_미리보기_도서출판잔.jpg
 




권령현.jpg
 

[권령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