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 <로기완을 만났다> 당신이 사는 곳에서는 지금,

글 입력 2019.02.07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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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 <로기완을 만났다>

당신이 사는 곳에서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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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종종 무국적자 혹은 난민으로 명명되었으며, 신분증 하나 없는 미등록자나 합법적인 절차 없이 유입된 불법체류자로 표현될 때도 있었다. 그는 또한 그 누구와도 현실적인 교신을 할 수 없는 유령같은 존재이기도 했고, 인생과 세계 앞에서 무엇 하나 보장되는 것이 없는 다른 땅에서 온 다른 부류의 사람, 곧 이방인이기도 했다.’


소설의 첫 문장은 그를 이니셜 'L'로 표기하고 있다.


명명하는 이름에 관하여,

이름이라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신분을 나타낼 수 있으며, 태어난 이래 타자에 의해 계속해서 소속감이 부여되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런 그를 이름 대신 'L'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에게서 지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우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와 ‘난민’이라는 단어를 동시에 들었을 때의 그 간극은 무시할 수 없다. 이주노동자는 살던 지역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옮겨와 노동을 하는 사람을 뜻하고 난민은 소속된 국가가 없고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로기완은 어떤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었나, 생각하다 보면 닿을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어떠한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가'


소설 속 ‘나’는 방송작가로 근무하다가, 시사주간지 H에 실린 탈북자 로기완의 인터뷰를 보고 그의 행적을 되짚기로 결정한다. 또 다른 방송 대본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 전까지 ‘나’는 돈이 없고 사각지대에 몰린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해 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모금활동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로기완을 만나리라고 결심한 것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를 ‘탈북자’라는 카테고리 안에 넣어서 그들이 겪을 수 있는 고충들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가 발견한 것은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누군가의 목숨을 딛고 살아남았으니 속죄하기 위해 살 수 밖에 없었던, 살기 싫다고 생각 하는 것조차도 삶이 이어지는 과정 중 하나였던 아이러니한 삶, 그것을 살아가는 인물에게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와 로기완, 그리고 윤주에 대하여



로기완은 북한에서 태어나 살다가, 나라가 대대적으로 힘들어 정말로 먹고 사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때 중국으로 엄마와 함께 도망쳤다. 당시 중국에서는 탈북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수색하는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로의 엄마는 신분증 없이 일을 할 수 없던 로를 대신해서 노래방에 출근하며 돈을 벌어왔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교통사고를 당해 즉사했고, 그녀의 신분이 탈북자임이 밝혀지자 수색은 강화되었다. 그 와중에 엄마의 시체 속 장기를 산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로기완은 4000달러를 받고, 그 돈으로 비행기 티켓과 브로커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벨기에로 떠난다. 그의 돈은 어머니의 목숨값이며, 누군가의 목숨을 딛고 살아났으므로, 함부러 죽을 수 없고 살아내야만 한다.


윤주는 오른쪽 뺨에 종양을 달고 혼자 원룸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학교는 물론, 집을 나간 엄마와 죽은 아빠, 그리고 배고픈 동생을 떠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나는 윤주를 취재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 했는데, 윤주가 더 많은 모금을 받을 수 있도록 방송 일자를 추석 때로 미룬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방송을 보고 더 많은 돈을 윤주의 손에 쥐어주기 위함이었으나, 윤주의 종양제거수술을 세 달을 미룬 결과 그 사이 종양은 전이가 되었고, 종양이 악성, 즉 암이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윤주는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고, 나는 죄책감을 떠안는다. 누구도 ‘나’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나는 차라리 무언가가 분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윤주가 용서해주지 않기를 바란다. 동시에 용서해주기를 바란다. 용서라 함은 그 아이가 견뎌야 할 무게를 내가 지켜보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고, 용서하지 말아 달라 함은 자신을 미워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대신해서 그 아이가 마음껏 채찍질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


나는 로기완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벨기에로 왔을 때 윤주의 연락을 피한다. 그러나 로기완의 행적을 쫓아가며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내가 느끼는 죄책감과 회한이 차라리 사치라는 것, 누군가는 그걸 느끼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마음을 정리하고 더 밑으로 향한다. 외로움은 비교될 수 없지만 살면서 누구도 곁에 없이 혼자 견뎌내야 했던 사람들은 나보다 더 깊은 곳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공감에서 비롯된 시선을 넘어선 확신이기에 나는 다시 윤주에게로 돌아간다.



로기완의 행적


로기완은 1987년 5월 1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온성군 세선리 제7작업반에서 태어난 남자다. 한 때는 명절에 좋은 음식을 먹고, 학교에 가면 학생들을 위한 공책과 연필이 마련되어 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체제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고, 200만명의 아사자가 생기던 시기에,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말하자면 생존과 직결된 먹지 못하는 문제 때문에 엄마와 함께 탈북한다. 그 후 중국에 도착해 그의 엄마는 노래방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고, 그녀가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한 직후에 신분이 발각될 위기에 놓여 벨기에로 망명한다.


그는 벨기에에 도착해 브로커가 말한 대로 교외에 호스텔을 잡았다. 그가 수중에 가진 돈은 650달러 50센트가 전부였다. 방값을 지불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고 쳐도 이 주를 버티지 못하는 돈이었다. 그는 일주일 동안 벨기에의 풍경에 압도당하는 시간을 보낸 후 한국대사관에 찾아가 난민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한다. 그의 신분을 입증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난민신분이 인정되면, 벨기에에서는 한 달에 700유로의 지원금과 무료로 프랑스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 일자리 알선, 그리고 주거 환경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런 점을 악용하여 북한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던 조선족들이 신분을 속이고 난민신청을 했고, 한국대사관은 그들을 선별해낼 수 없자 명확한 물증이 없는 사람은 쫓아냈다.


그러나, 그는 신분증을 지닐 수 없었다.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울타리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내가 일궈온 것들을 모조리 반납하는 것, 결국은 삶이란 통째로 어디선가 무언가를 빌려와 연명하다가 스러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존재가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설명되지 못한 적이 있었나,


중국에 있을 때 조국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다면 발각되기 쉬웠고, 발각된 후에는 조국으로 돌아가 수용소에서 끔찍한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그랬기에 국경을 넘을 때 그의 엄마는 조국의 때가 묻어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그것이 최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선택이 자신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대사관에서 쫓겨난 로기완은 호스텔로 돌아왔다. 그는 더 이상 가진 돈이 없었다. 그는 맥도날드 화장실에 들어가 버티다가, 거기에서도 나올 수 밖에 없어서, 50센트를 내고 공중화장실 한 칸에 들어가 몸을 웅크린다. 삼 일간 굶고 구걸을 해서 번 5달러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거리 벤치에 누워 자던 로기완은 정신을 잃고 경찰서로 송치된다. 경찰서에서 그는 150여 센티미터의 작은 키와 앳된 얼굴 때문에 동양의 고아라고 오해받아 고아원에 들어간다. 고아원에서 그의 노래를 들은 원장은 직접 한국대사관에 접촉해 그가 난민 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로기완은 고아원을 떠나 월유에 쌩삐에르에 잇는 수용소에서 머물며 ‘박’을 만나 난민심사를 받는다. 국기를 그리고, 국가를 부르고, 출생지역과 생활환경이 담긴 자기소개를 마친 후, 박은 그가 탈북자임을 확신하고 전적으로 그를 돕는다. 로기완은 난민임이 인정되어 지원금과 함께 프랑스어 학습 기회와 일자리를 얻는다.



"사랑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언제나 선악을 초월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로기완은 신분을 버리고 국적을 초월했으며, 간신히 얻게 된 신분을 포기했다. 사랑은 늘 옳고 그름을 초월하며, 무언가에게 결핍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간절히 얻은 것을 제물삼아 새로운 세계를 일구려 한다.


그는 중국집에서 서빙을 하다가 필리핀에서 망명한 라이카를 만났다. 라이카와 있을 때 온전해짐을 느낀 로기완은 잠시나마 행복해졌으나, 라이카는 불법체류자였고 가게에 들이닥친 경찰의 수색에서 신분이 탄로나 수용소에 갇힌다. 그러나, 라이카는 극적으로 수용소를 탈출한다. 로기완은 전 재산을 털어 라이카를 영국으로 몰래 건너가게 돕고 후에 그녀를 따라간다.


난민이 다른 나라로 국적을 옮기는 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유럽은 연합국가지만, 소속국가의 난민을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이 난민신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영국으로 이주한다면, 그의 난민 신분은 파기되고, 모든 지원이 끊기며 비자 없이 불법 이민자가 되는 것이다. 로는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기 위하여, 다시금 사랑을 하고 온전하게 살아남기 위하여 영국으로 떠난다.




복지와 난민, 그리고 로기완



대의를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복지제도를 악용하는 불법체류자들을 단속하는 것이 이득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제도를 정말로 악용하는 사람을 걸러내는 것도, 그리고 얼떨결에 같은 취급을 받고 걸러지는 갈 곳 없는 이방인들도. 어느 쪽이든 국가에서 난민으로 받아들여 자국의 국민으로 인정한다면 그들을 위한 복지를 펼쳐야 한다.


복지는 곧 돈이다. 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수많은 지원금을 내주어야 하고, 일자리와 주거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국가를 하나의 기업이라고 봤을 때, 기업의 입장에서는 여러 방면에서 손실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이방인을 배척하는 자국민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면, 이방인들에게서 위협을 느끼는 국민들의 불안과 불만이 안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복지를 위한 금전적 손해‘라는 이중적인 말이 사실처럼 느껴진다.


복지는 무엇인가? 돈을 투자해서 돈에 무너지지 않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일까? 이상의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아다가 더 나은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이 과정이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가진 것이 없을수록, 몸을 내놓아야 한다. 최선 대신 차선을, 따뜻한 잠 대신 웅크린 꿈을 꾸어야 한다. 이청준 - '당신들의 천국’, '소록도'에서는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사람들은 바다에 돌을 날라 땅을 개간하는 일을 하고, 그 과정에서 다치고 아픈 사람들이 빠져 죽는 일이 많았다.


결국 바위가 아닌, 사람을 빠트려 만든 지상을 딛고 서게 된 사람들은 그것을 천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섬 안에 시설이 한 가지씩 늘어갈 때마다 그만큼 섬 전체가 천국에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지옥으로만 변해가고 있었듯이, 이번에도 이 섬은 공원이 하나 더 늘고 그곳에 바쳐진 자신들의 노력과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 노력이나 희생의 크기만큼 섬은 점점 더 낙원과는 인연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복지란 삶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마련해놓은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해 그들이 가진 조금을 앗아가기도 한다.


‘우리들의 천국’이어야 하는데 ‘당신들의 천국’일 수 없다는 것이다. 난민, 그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 같은 삶마저 박탈당한 채 떠돌아다닌다.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다는 것은 존재를 지워버린다.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외면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거슬린다. 난민이 신분을 인정받고 그들끼리 뭉치고 공동체를 만들어서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그래서 기존의 자국민들에게 폭력의 양상으로 다가온다. 폭력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폭력은 무엇인가.


실제로 피부에 와 닿아야만 체감되는 것인가, 아니면 눈 앞의 존재들이 벌일 수 있는 범죄 가능성에서 느끼는 우려인가, 아니면 개인에 대한 공동체의 잣대인가, 서로 다른 이념이 대립할 때 생기는 문제들에 대한 걱정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막연하고 본능적인 두려움인가.


우리는 감정에 치밀해질 필요가 있다. 만화경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위하여.



[이정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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