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난해한 전시를 관람하는 소소한 팁, 피카소와 큐비즘전

요리봐도 조리봐도 모르겠다면?
글 입력 2019.02.07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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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를 감상하는 방법은 수능 국어영역을 무사히 풀어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전시회에는 답이 없다. 아무리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작품으로 나온 이상 그것을 감상하는 것은 감상자의 역할이다. '사랑'을 의도한 전시에서 '증오'를 보는 일은 흔하지는 않겠지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작가나 관람자의 잘못은 아니다. 많은 배경 지식 중의 하나로, 눈앞에 놓인 것을 판단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배경 지식이 없다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전시회를 관람하는 팁을 주겠다.

이번에 관람한 전시는 <피카소와 큐비즘>이었다. 피카소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그렇듯이 이해할 수 없고, 난해한 그림이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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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들로네, 리듬 n°1, 튈르리 살롱전 장식화

1938, 529x592cm, 캔버스에 유화

©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피카소와 큐비즘> 전에서 본 리듬이라는 작품이다.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약 10m는 족히 되는듯한 그 웅장한 크기에 놀랐고, 이런 작품이 4개 정도 된다는 것에 놀랐다. 도무지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아무런 사물에서 어떤 힌트도 떠올릴 수 없는 작품을 마냥 느낌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주변에서 전시회를 보던 사람 두 명도 '도저히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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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 르네 마그리트


풍경을 위주로 그린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나, 초현실주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면 적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부분도 다분한데, 피카소의 그림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걸 그림이라고 불러도 되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과연 사람이 존재하는 차원에서 해석해도 되는 걸까 싶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위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도 난해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래서 전시회에 도저히 해석하기 난감한 그림을 만났을 때 내가 추천하는 방법은 오디오 가이드를 듣는 것이 아니라, 수능 국어영역을 풀듯이 전시회 구역 입구에 적혀있는 글과 그림을 하나하나 비교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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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브라크, 에스타크의 집
1908년, 베를린 미술관 소장


자연의 모든 것은
원통, 원추, 원구로 표현할 수 있다.
단순하게 그리는 법을 배우고 나면,
그다음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래의 캡션으로 위의 그림을 해석하라고 한다면, 그림에서 원통, 원추, 원구를 쉽게 발견해서 그림을 해석할 수 있다. 사물을 기본형으로 바꾼 다음에, 그 기본형을 새롭게 조합해서 만드는 것이 '입체파, 큐비즘'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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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드 블라맹크, 부지발, 갱쟁 부두
Bougival, quai Sganzin, 1907 - 1908년
oil on canvas, 60x73cm


위의 그림 역시 인상파 초기의 작품이다. 인상파가 시작되는 시점에서의 작품들은 그래도 그나마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그림처럼 보여, 후반부의 작품과는 달리 설명 없이도 조금은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원근법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섬 위의 나무와 집의 크기가 거의 같고, 앞에 있는 것과 뒤에 있는 것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정확한 것은 현실이 아니다."


- 마티스



그래서 입체주의의 정의 또한 명확하지 않다. 화면을 깨부수고, 기존의 원근법을 부수고, 기존의 조화로운 색채감각을 뒤 부수고, 그렇게 생겨난 것이 입체주의라는 것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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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뒤피, 버려진 정원


위 작품은 많은 사물, 새, 식물, 집 등이 혼재되어 있다. 분명 같은 장소에 존재하지 않을 것들이 동시에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 집도, 새도, 식물도 모두 크기가 제각각이다. 화면의 가운데에 주인공이 있는 구도도 아니고 주로 왼쪽 바닥 쪽에 많은 것들이 처박혀 한데 뭉쳐져 있다. 햇빛에 의해 반대쪽에 생겨야 할 그림자 역시 지붕에 있거나, 온갖 곳에 그늘을 지고 있다. 위의 캡션들에 의해서 이 그림은 '입체파'라는 것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의 화면 구도와 원근법을 무시하고, 작가의 의식을 그대로 담은 그림이다.

<작은 방목장>이란 작품 역시 원근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크기의 사물이 하나의 화면에 위치한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시간을 합쳐서 한 화면에 그려놓은 것 같이, 공간감은 없지만, 그 2차원 속에 시간은 담겨있는 듯했다.

그러나 위의 작품까지는 사실 입체주의의 특징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기본형으로 만들어, 새롭게 조합해서 완전히 새로운 사물을 만들지는 못하고 자연을 원형의 형태로 만들거나, 화면을 새로운 구도로 만들거나, 기존의 미술 양식을 깨트리는 점들이 종종 보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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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그리스, 책
1913, 41 x 34 cm, 캔버스에 종이 콜라주 및 유화
©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입체파가 진행되면서 화면의 분할과 조합이라는 점이 정말 눈에 그대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마치 책을 보고 있는 사람의 눈이 잠깐 깜빡거려서 모자이크되는 것 같다. 그 순간, 그 찰나를 조각조각으로 내어 조각마다 자기가 보는 것과 느낀 것들을 빼곡하게 채워나간다. 퍼즐 속에 각각 그림을 넣는다. 하나로 이어진 그림들을 일부분으로 분해해서, 쉬운 도형으로 만든다. 화면 자체가 도형이 되어버린다. 조각난 퍼즐은 다른 색을 가지고, 다른 그림을 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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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남자의 두상
1912, 61x38cm, 캔버스에 유화
© 2018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창조의 모든 행위는 파괴에서 시작된다."


- 파블로 피카소



드디어 피카소의 작품이 시작되고, 이는 완전한 입체파의 시작을 알린다. 화면 하나를 선으로 나누고, 분할된 조각마다 남자의 두상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들어선다. 피카소는 새로운 그림 하나를 위해서 기존에 존재하는 남자의 얼굴을 여러 개의 선으로 나누고, 쪼개고 원형으로 만든 뒤, 새롭게 조각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쪼개고 분절하는 이유는 새롭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들은 자연에 존재하는 그대로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번, 어릴 때 이 사람들은 예쁜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내 '예쁘다. 기준은 지금 생각해보니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아름답다'는 감탄사를 내뱉을 만해 보이는 어떤 것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쁜 것을 추구하는 것은 그들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아니었다. 그들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 모든 사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매번 전시회에서 느끼지만, 나는 얼마나 좁은 사고방식으로 사물들을 바라보고, 얼마나 예쁜 것만을 바라보며 개성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를 깨닫는다. 또, 그래서 내가 갇혀버리는 굴레라는 것이 더욱 단단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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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들로네, 에펠탑
1926, 170 x 104cm, 캔버스에 유화

©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하나의 큰 주제를 가진 미술 전시회는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나누는 편인데, 그 이유는 시대가 지나면서 미술 사조가 조금씩 성격이 다르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붓 하나로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잔뜩 의미를 부여했다고 치자. 그 첫 작품은 큰 의미가 있고 큰 반향을 가져오겠지만, 그 그림을 너도나도 따라 하다 보면 특출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그 정체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가는 점점 다른 시도를 하게 된다.

선으로 화면을 나누거나 원형을 찾아서 분해해 조합하는 방식의 작품 말고도, 색깔로 화면을 나눈 작품도 있었다. 에펠탑 하나에 여러 가지 색을 칠해서 음지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화면을 분해했다. 이 역시 이런 해체와 조합을 통해서 로베르 들로네가 재해석한 에펠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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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들로네, 리듬 n°2, 튈르리 살롱전 장식화
1938, 538 x 396 cm, 캔버스에 유화

©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그래서 다시 이 작품을 보았을 때, 누가 봐도 난해하고 이해 불가능하지만 지금까지 잘 따라왔다면, 원으로, 색채로 화면을 나누고 뭔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재해석하고 다시 그린 거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이름은 리듬이고, <피카소와 큐비즘> 전을 관람하러 가면 이것과 유사한 작품을 4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리듬이지만, No·1부터 No·4로 다 다른 모양을 갖고 있다. 어떤 것을 표현하더라도 시간에 따라서, 표현하고 싶은 것에 따라서 작품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만약 피카소나 로베르 들로네에게, 이때까지의 작품과 같은 이름의 작품을 다시 그리라고 한다면 분명 세상에 같은 작품은 절대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전시장에는 수많은 <구성> 작품이 있었다. 입체주의 화가들은 저마다 각자의 구성을 만들었고, 이미 자신의 구성이 있음에도 새로운 구성을 만들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그림을 그런 것이다. 애초에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은 자들, 자신을 감성적으로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은 자들에게서 감성을 느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그림을 그린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입체파 화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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튈르리 살롱 장식 초대형 작품 설치장면


짐짓 겁을 먹고 전시회를 보지 않거나, 전시회를 한 두 번 다녀왔는데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흥미를 잃어가는 이들에게.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무언가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평생 진심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들의 작품이 세상에 나오고 읽히는 이유는 사람이란 자기가 공감하지 못하는 것에 끊임없이 매력을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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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브라크, 여인의 두상
1909, 41x33cm, 캔버스에 유화

© Georges Braque /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피카소와 큐비즘
- 파리시립미술관 소장 걸작선 -


일자 : 2018.12.28 ~ 2019.03.31

시간
11:00~19:00 (18:20 입장마감)

*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월 31일, 1월 28일
2월 25일, 3월 25일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티켓가격
성인 15,000원
청소년 12,000원
어린이 10,000원

주최
서울센터뮤지엄, 뉴스웍스

관람연령
전체관람가


[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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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김즌
    • 정말 쉽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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