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음에 대하여 [기타]

글 입력 2019.02.13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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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하여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삼단논법하면 바로 떠오르는 예시이다. 이 예시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죽음이 숙명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끝은 죽음이다. 나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죽을 것이다. 심지어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도 모른다. 당장 내일 불운의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어떤 병에 걸려서 죽을 수도 있으며, 늙어서 죽을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나는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삶의 끝이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면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할 필요가 있을까?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음과 나는 만날 수가 없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만난 적이 없다. 또는 죽음이 이미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때에는 나는 이미 거기에 없기 때문에 죽음을 알 수가 없다"


몽테뉴는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의 삶과 관계가 없으며 우리가 죽을 때에는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의 죽음과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나는 에피쿠로스와 몽테뉴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죽음을 부정하게 만든다. 죽음의 부정은 불사에 대한 욕망으로 직결된다. 육체가 불사할 수 없으니, 영혼의 불사를 희망한다. 자손을 낳아 자신의 피가 이어지길 희망하고, 제사와 장래문화라는 것을 만들어 인간의 죽음에 의식과 관행을 부여한다. 또한, 사후세계를 그리며 그 세계에서 잘 살기 위하여, 사후세계가 부여한 가치들을 현실의 삶에서 복종한다. 불안정하고 변화하는 삶보다는 불멸하고 영원한 이데아에 더 가치를 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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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치들에 도를 넘어 집착하는 것은 현실의 삶을 망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후손을 통해 불멸을 원하는 것은 지독하고 기묘한 혈연관계를 만들어낸다. 남성에게 집중된 모성애와 그에 따라 비롯된 차별들, 자식에 대한 헌신으로 버려진 주체적 삶. 결국 부모는 자신의 행복과 슬픔을 자식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자식은 그런 부모에게 책임감을 넘어 죄책감을 느끼는 그런 관계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끈덕지게 얽힌 채 죽음의 순간까지 따라간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헌신했음에도 결국은 혼자 남아 쓸쓸하게 여생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감히 그들을 안타까워하곤 했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에 가치를 매길 수는 없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자식이 더 이상 부모의 헌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 혼자 남아 붕 떠버린 시간에 갈피를 못 잡고 정체되어 그저 시간만 보내는 그들은 남은생애에 대한 체념만이 짙게 깔린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지독하게 공허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런 양상들을 보며 나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삶에 대한 회의감과 허무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모든 사유의 버팀대는 다름 아닌 연약한 우리자신이었다. 죽음에 대한 나의 태도를 정했어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런 태도는 쉽게 흔들렸다. 어느 순간,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해서 잊을 수 있어도 타자의 죽음, 소중한 존재들의 죽음은 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소중한 존재들의 죽음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과연 이들의 죽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안 죽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내가 먼저 죽는 게 더 나을 거 같아.’


어리석다고 치부했던 일련의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죽음 후의 시간과 공간은 현재의 삶과 무관하다고 단호하게 생각했지만 죽음 후의 세계들을 생각하며 소중한 존재들의 영생을 바라게 되었다. 애초에 죽음은 나와 무관할 수가 없었다. 매일 사람은 죽고 있으며, 매일 타자의 죽음과 대면하기 때문이다. 또한, 죽음을 망각한다는 것은 시간과 미래에 대한 의식 또한 망각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시간과 미래에 대한 의식은 결코 망각될 수 없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항상 우리들 자신의 앞에 있고 의식은 항상 미래를 향하여 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죽음은 우리들의 최소한의 투영 속에, 의식의 최소한의 목표 속에 반드시 나타나 있다. 즉, 우리가 현실의 시간을 의식하는 이상 죽음을 삶과 무관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이 결코 삶과 분리될 수 없음에, 한동안 죽음에 대한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어떻게 소중한 존재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존재의 죽음 뒤에 남아있는 흔적들과 다시는 소중한 존재를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다는 사실은 나를 너무 고통스럽게 할 거 같았다. 거기서 비롯된 후회들. 더 사랑하고, 더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감당할 수 없을 거 같았다. 죽음에 대한 사색은 우울함을 불러일으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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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죽음에 대한 사고는 비로소 심리학자인 융의 한 말을 봤을 때 귀결됐다.

 

"죽음의 순간이 닥쳐와도 가장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가장 충만하고 가장 행복한 실존을 향유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시간이 조직될 수 있기 때문에, 삶에는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결국 후회가 없도록 삶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이는 에피쿠로스의 주장과 다를 거 없이 보이지만. 죽음을 삶과 상호보완적관계로 봄으로써 나온 말이므로 엄연히 다르다. 죽음을 아예 생각하지 않으면 현재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져 자칫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현재의 쾌락만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면 사람의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된다. 이 제한된 시간을 가지고 잘 살아보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죽음은 생애의 종점이며 나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종말이기에, 평온한 상태로 죽음에 동의하려면 나의 생애는 행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소중한 존재들에 대한 나의 후회도 없어야 하며, 그들의 죽음 역시 평온해야 함을 알려준다. 한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이며 나의 자유와 행복에만 치중해야 행복한 삶인 줄 알았다. 그때에는 소중한사람들이 나에게 주는 애정과 관심이 나에게 부담감을 심어주는 짐처럼 느꼈다. 언젠간 갚아야 된다는 생각에, 자유와 행복이 그들에게 발목을 잡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척이나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죽음을 생각하면, 행복한 삶이란 결국 나의 삶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의 삶도 같이 행복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에 대한 생각과 함께 공존되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결국 주체성과 이타성을 놓지 않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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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죽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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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인간학, 철학, 형이상학 1



[김량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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