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편한 책을 만나다 [도서]

글 입력 2019.02.15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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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 욕심이 많다. 옷 쇼핑보다 책 쇼핑을 하는 때가 더 많고,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려 신간 책 훑는 시간을 즐긴다. 지인의 생일 땐 굳이 책을 선물한다. 내 생일도 마찬가지다. 인상 깊게 읽었거나 특별한 사연이 있는 책은 죄다 구매하여 책장에 꽂아둔다. 시간이 흘러 나의 집이 생긴다면 커다란 서재를 만드는 꿈도 가지고 있다.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런 성격에 비해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괴팍한 고집 덕에 책 한 권을 쥐면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순서대로 다 봐야만 하는데, 엉덩이가 가벼워 오래 자리에 앉아 있질 못한다. 기억력은 또 왜 이리 나쁜지 중간에 책을 덮으면 앞 부분이 기억이 안 나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다. 심지어 읽는 속도조차 느릿느릿하여 책 하나 읽기 위해선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모된다.

이런 나에게도 그나마 빠르게 읽히는 책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설 연휴를 앞두고 편안히 읽을 책을 고르기 위해 도서관에서 하루키를 검색했다. 어떤 것을 빌려볼까 고민하던 중 옆의 긴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나도 모르게 책을 뽑아 들었다. 빵과 고양이, 좋아하는 단어가 두 개나 들어가서인지 제목만 봤는데도 기분이 좋아졌다.  갓 만든 빵과 수프 그리고 따스한 햇살이 올려진 주말 아침의 식탁이 떠올랐다. 표지에 '읽든가 말든가'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의 고양이 사진도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을 읽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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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말에 후후 웃으면서도 시마 씨의 눈은 냄비 속을 향하고 있었다. 수프를 만들기 위해 양파를 오래 볶을 때도 시마 씨의 힘이 큰 역할을 했다. 시판되는 볶음 양파를 사용하거나 전자레인지에 돌려 수분을 없애는 방법도 있지만, 아키코는 일일이 직접 만들었다.


p66



아키코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문 열기 전, 깔끔하게 청소하고 난 다음 재료 준비까지 다 끝냈을 때의 가게 분위기다. 수도원의 고요한 식당 같은 실내에 꽃만 피어 있다. 그때 가게를 휘 돌아보면, 이제 열심히 일해야지, 하고 힘이 솟는다.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좋아하고 기뻐해야 마땅한데, 그런 때가 가장 좋다면 가게를 하지 말고 자신의 방을 취향에 맞게 꾸며놓고 그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될 일이다.

"내 가게를 찾아주는 손님이 이랬으면 좋겠다, 이래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건 대체 뭐지?"

p211


소설은 제목과도 같이 편안하고 담담하다. 주인공 아키코는 어머니의 식당을 물려받아 장사를 시작한다. 사랑스러운 고양이, 마음 맞는 종업원 등이 그녀의 곁에 함께한다. 누구나 해봤을 봄직한 사소한 고민들, 단출하지만 특색 있는 식당, 성격 좋은 종업원 시마 등을 보면 영화 <카모메 식당>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일본 특유의 잔잔함이 소설 전반을 어우른다. 물론 소설 내에서 출생의 비밀, 친구와의 이별 등의 선 굵은 사건들이 생기지만, 이 또한 크게 보면 일상의 일부인 것 마냥 덤덤하게 읽힌다.

앞서 말했듯 나는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잡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샌가 잡생각이 사정없이 가지를 치기 시작한다.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하염없이 머릿속의 샛길을 떠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읽던 글로 돌아왔을 땐 내가 뭘 읽고 있었는지 다시 몇 장 앞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런 방해가 거의 없었다. 평범한 일상, 일상의 생각들을 다루기 때문이었는지 그저 끄덕이며 읽어 나갔다.

이렇게 부담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 꼭 좋은 책이라고는 단정할 수는 없다. 혹자는 남는 게 없잖아,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기는 것, 쌓아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가끔은 모든 걸 내려놓고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는 법이다. 한가한 오후에 카페에서, 공원에서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넘기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그러니까, 즐거웠던 일만 생각하면서 고마웠다고 말해주는 게 그쪽에게도 타로에게도 좋지 않을까요? 자신을 책망하면 타로 마음도 아프니까요. 하지만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우는 것도 좋아요. 몸에서 나오고 싶어 하는 것은 내보내는 게 좋거든요."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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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동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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