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를 돌아보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 <사서-이치를 담은 네 권의 책>

글 입력 2019.02.19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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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서 - 이치를 담은 네 권의 책>. 어려운 책이었다. <논어>, <대학>, <맹자>, <중용>을 모두 포함한 764쪽의 방대한 내용보다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을 하면서 보게 되는 책이라 간만에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좋은 쪽으로. 농담 삼아 지금 태어난 것이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과거시험을 준비한 수많은 과거의 사람은 이 어려운 내용을 매일같이 보았을 것이고 녹봉을 받은 이들 역시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군주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다. 임금을 시켜준다고 해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흔히 유가를 고리타분하고 과거에 얽매인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중요성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의 역사는 사서(논어, 대학, 맹자, 중용)의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수능을 준비하면서 얄팍하게 읽었던 몇 개의 발췌문만 보던 때가 기억났다. 당시 내게 공자와 맹자란 다소 고루하고 이상적인 지식인이었고, 노자와 장자의 멋에 취해 있었다. 리뷰를 쓰는 지금도 지끈지끈하지만 사서를 읽어본 지금, 유가에 대해 편견과 오해가 많았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고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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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골머리 아픈 존재다. 좋아하는 이들도 많지 않다. 그러나 막상 읽고 보면 우리가 고민하는 것과 그리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나 자체로서 나이지만 어떤 이의 무엇이기도 하다. 부모이나 자식이고, 친구인 역할 갈등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는데 왜 그런걸까,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누군가는 잘났는데 나는 이렇게 부족한가. 아무리 피하려 해도 결국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며 그 고민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인생의 큰 방향을 결정한 것이다. 고민을 미뤄둘수록 나중에 와 닿는 허무함과 후회가 클 수도 있고 흘러가는 시간에 정처 없이 방황할 수 있다. 꼭 이 책을 통해서만 그 답을 알 필요는 없다. 적어도 한 번쯤은 읽어봄직하다. 물론 한 번만 보아서는 의미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모든 문장에 구구절절하게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는 인간을 어떻게 보았는지, 삶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면 우리 역시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 지 참고할 수 있다.

멈칫하는 구절이 많았다. 개인적인 기준으로 좋은 글, 좋은 책은 문장이 좋아서, 와닿아서, 멈칫하고 다시 한번 읽어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역시 수많은 문장 속에서도 그런 문장이 있었다. 우선 동의하지 않았던 부분 먼저 다루겠다. 공감하는 부분이 훨씬 많으니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게는 동의할 수 없어서 멈칫했던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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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가의 어머니가 말했다.

"주역에 '집안의 음식을 장만하는 일이지, 달리 이루어야 할 일이 있지 않다.'라고 하였고, '시경'에 '나쁠 것도 없고 좋을 것도 없네. 오로지 술과 음식을 준비하는 일을 맡을 뿐이네.' 라고 했다. 이것은 집안 살림을 하는 여자는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이 없으며, 삼종의 길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려서는 부모를 좇고, 출가해서는 남편을 좇으며,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좇는 것이 기본 예의이다. 이제 자식인 너는 어른이 되었고 어미인 나는 늙었다. 너는 너의 뜻대로 행하고 나는 나의 예의대로 행할 것이니라."

'네 시댁에 가서는 반드시 어른들을 공경하고, 몸가짐에 유의하여 남편과 자식을 거역하지 마라.' 순종하며 도리를 지키는 것을 정도로 삼는 것은 아내들이 지켜야 할 예의입니다.

-p.339 <맹자>/p.459 <맹자> 등문공(하)


여성의 할 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누구보다 중요시했을 공자와 맹자가 여성에 대해서는 제한적이고 편협한 사랑을 보였다면 조금은 실망스러울 것이다. 결국은 여기서 시작된 각종 동양 사상의 철학가의 주장이 조선시대와 현재를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그 때의 방향이 달랐다면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여성의 일이 집안일에만 국한되어있는 것은 물론, 수동적인 역할로써 남편과 자식(이마저도 남성)의 의견을 좇는 것이 덕목이었다는 것. 그로 인해 얼마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재능과 사건을 놓치게 했을지 안타까웠다. 무려 저 부분은 감동적인 부분이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맹자가 자신이 나아갈 길과 어머니 사이에서 고민을 했고, ‘맹모삼천지교’의 그 어머니답게 나는 나의 일을 할테니 너는 너의 일을 하라며 쿨하게 말씀하셨다. 책에서는 이로써 맹자가 학문상 아성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고 말하니 분명 감동적이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감동이 그만큼 미치지 않았다. 맹자는 잘못된 군주도 올바른 사람이 뜻을 가지고 밀어낼 수 있다 말한 바 있다. 뜻이 없는 자가 왕의 자리에서 밀어내면 그것은 찬탈이지만 뜻있는 자의 행위는 용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하다못해 군주가 아니라, 남편과 자식이 잘못된 점이 있다면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예의일까. 거역이라는 말에는 이미 부정적인 의미가 느껴진다. 뜻있는 아내가 있다면 이 역시 순종하지 않아도 용인할 수 있는 부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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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추가 말했다.
"삼년상을 일년 상으로 줄이는 것이 상례를 그만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맹자가 말했다.
"이는 어떤 사람이 형의 팔뚝을 비틀었는데, 그대가 그자에게 좀 천천히 비틀게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p.623


두 번째 부분은 한마디로 ‘삼년상, 일년상 그것이 문제로다.’ 논어 양화편에서도 공자 역시 3년상 대신 1년상을 하겠다는 제자 재아를 보면서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맹자 역시 공자의 직속제자는 아니지만 공자의 뜻을 배우고 익힌 사람이니 이 지점 역시 생각이 비슷한 모양이다. 오늘날의 행태를 보면 공자와 맹자는 ‘오호 통재라’ 내지는 ‘오호 애재라’라면서 탄식과 애통함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삼년상을 하기는커녕 일년상도 잘 하지 않고, 장례만 치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예전보다 현저하게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니 나태하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겠다.그러나 삼년상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효자라거나, 팔뚝을 비트는 잔인한 사람이라고 비판받을 상황도 아니다. 되려 전통을 살려 시도하려는 것 자체가 지금은 큰 결심이자 용기이기 때문이다. 의례나 시간 그 자체보다 부모님을 아끼는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혼자만 지키려고 해서 유지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가족끼리 합의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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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증언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우리 마을에서 말하는 정직한 사람은 이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의 죄를 숨깁니다. 정직함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p.229 <논어> 자로


마지막은 정직함에 대한 입장. 드라마나 현실에서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스스로가 정직하지 못했을 때 그걸 숨기다가 더 큰 일이 벌어질 때가 있다. 서로가 서로의 잘못을 감싸주는 건 애틋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일이지만 그로 인해 잘못인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는 내 사람을 먼저 아낄 수 밖에 없지만 정직함과 법 앞에 있어서는 가족이라고 차등을 두는 것은 득보다 실이 더 크다. 공자가 말하는 정직함은 적어도 서로가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는, 제한적인 경우에만 가능하다. 정직함은 숨김 보다는 드러내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잠시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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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말했다.

"나는 사랑하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을 보지 못했다. 사랑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자를 미워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사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착한 사람은 없다. 살아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자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 이때 사랑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자가 가까이 다가와 영향력을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라도 사랑하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마주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 사람이 있는가? 나는 힘이 모자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지 못했다는 사람을 아직까지는 보지 못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하늘이 준 벼슬이고, 사람이 편안하게 사는 집과 같은데, 그것을 막는 사람도 없는데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으며, 예절도 없고 의리도 없으면 남의 일꾼으로 부림을 당한다. (중략)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활쏘기 하는 것과 같은데, 활을 쏘는 사람은 자기를 바로잡은 뒤에야 화살을 쏘고, 쏜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더라도 자신을 이긴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으며, 돌이켜서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을 뿐이다.'

-p.96 <논어> 이인, p.410


앞선 이야기가 너무 신랄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마음에 드는 문구가 훨씬 많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의 본성, 나를 알고 흔들리지 않는 법에 대한 것들이었다. 공자와 맹자의 말 중에 유독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는 공자의 그 말.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활쏘기와 같다는 맹자의 그 말. 나를 바로잡고 사랑을 보내지만 그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기다리고 나에게서 이유를 찾는다는 것. 마음에 걸렸던 건 내가 아직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내가 공자와 맹자가 너무나 많이 본 그런 사람인 것이다. 사랑을 거창하게 생각해서라기보다는 고운 말을 전하고, 고운 눈길과 손길을 전하는 것마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활쏘기는 제법 자유분방하다. 내가 쏜 화살의 과녁은 사람을 사랑을 느끼는 과녁도, 포근하게 맞은 것이 아니다. 사람을 상처 주는 과녁이었고 후비듯 꽂히는 때가 많았다. 비슷한 일이 반복될 때마다 사람은 변하는데 내가 문제인가 고민에 빠져 괴로워하기도 했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을 비슷하게 만나고 나서는 사람을 피하기도 했다. 아무도 내게 활을 쏘지 못하도록 나는 화살을 나의 과녁 앞에 사정없이 꽂아두었다. 멀리서 보면 가시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를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다. 청개구리 같지만 사랑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으면서도 말이다.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으라는 건 ‘그래서, 내가 문제라는거야?“라는 말은 아니다.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남을 의심하기보다 우선 내가 무엇을 빠뜨리거나 잊어버리거나 잘못하진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를 샅샅이 살펴본 후에 내가 문제가 아니면 적어도 나는 자유로워진다. 내 탓, 내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펴봤으면 됐다. 죄책감도, 후회도 할 필요 없다는 든든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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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인간의 본성. 크게 사람은 본래 선한가 악한가로 나뉘는 단순하지만 깊은 질문. 본성을 표현하는 수많은 방법 중에 하필 ‘선악’으로 나뉜 이유가 궁금해진다. 과거부터 누구는 착하고 누구는 못된 행동을 하는 걸 보면서 나름의 답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늘 사람은 흰 도화지 같다고 생각해왔다. 그렇다고 불특정다수의 사람의 본성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다수의 사람이 그래도 선한 편이라고 믿고 있다. 모순이 생긴다는 걸 알면서도 흰 도화지설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건 사람이 악할 수 있는 범위가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가정했을 때 범접할 수 없이 악한 사람마저 모두 포함해 설명하기 적합하지 않다.


사람에게 보존된 본성이 어찌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의 도리를 실천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사람의 착한 본성도 밤낮으로 성숙되고, 새벽의 맑은 기운을 받아 맑고 깨끗한 기운이 있지만,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대할 때, 양심을 잃지 않고 보존하는 사람이 드물어졌다. 낮에 일어나는 세속적 물욕에 찌들어 쓰러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짐승 같은 행실만 보고는 본래부터 훌륭한 자질이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것이 어찌 사람의 성정이었겠는가. 

​고자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마음에서 억지로 알려고 하지 마라. 마음에서 알지 못하거든 기운에 호소하여 도움을 구하지 마라. 앞부분은 괜찮다. 다른 사람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마음에서 억지로 알려고 하지 말라는 부분은 옳지 않다. 의지는 기운을 이끄는 작용을 하는데, 기운은 우리 몸에 꽉 차 있는 것이다. 의지가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기운이 그것을 따라간다. 

-p.575 <맹자> 고자(상)/ p.397 <맹자> 공손추(상)


맹자 역시 고자와 이 대화를 나눈다. 고자가 ‘인간은 흰 도화지와 같다’고 본성 역시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고 말할 때, 맹자는 선한 본성을 잘 다스리지 않아 양심을 보존하지 않고 욕망이 넘쳐서 좋은 자질을 잃었다고 설명한다. 글쎄, 예전보다는 맹자의 의견이 설득력 있었다. 욕망이 큰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나도 악하지 않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후회스러울 정도로 나쁘게 변할 수도 있다는 걸 느끼고 나서였다. 욕망만이 변수는 아닐 것이다. 공포와 분노 때문일 수도 있다. 나를 너무나 궁지에 모는 순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분노가 주어졌을 때, 사람이 한꺼풀 탈바꿈할 수도 있다. 그건 반드시 노력만으로는 지킬 수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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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때리고 죽이는 모습은 놀라울 만큼 익숙하게 일상이 되었다. 현재는 문제의 원인을 사회 시스템으로 진단하곤 한다. 우리에게 자조적인 말로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고 불리는 ‘피라미드’. 절대적인 부와 명예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잘나야 하는 부와 명예. 비교가 만들어 낸 경쟁에서 허우적거리는 일상. 바로 얼마전까지도 드라마 <SKY캐슬>에서 비판했고 열광적으로 수긍했던 부분이다. 그러나 공맹의 시대 역시 군주와 제후, 하위 관리, 백성 같이 피라미드식으로 서열을 나누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기준의 부와 명예를, 더 넓은 영토를 원했을 것이다. 사회시스템을 원인으로 돌리는 것은 성선설이든 성무선악설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 사회 시스템이 정해지지 않은 본성을 결정지어주거나, 선하던 본성을 다소 팍팍하게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내심 사람이 그래도 선한 것에 끌리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어차피 자기 몸에 좋고 마음에 드는 것을좋아하겠지만 그래도 선한 것도 놓치지 않았으면 하고 있었구나, 내 마음을 오랜만에 확인할 수 있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내버려 두고 홀홀 벗어나도 상관없다는 고자와 달리 맹자는 그래도 의지는 가지고 가야 한다고 하는 게 신기했다. 어떤 느낌이냐면, 내가 고민하고 해결방법이라고 해보았던 방법과 다르지 않았다. 며칠씩 , 몇 달씩, 몇 년씩 이따금 생각하는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이해해보려고 애를 쓴 적이 있었다. 납득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신기하게도 내가 그러겠다는 생각은 들지는 않지만 결국은 수많은 가능성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결국의 그 중에 그의 입장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물론 나에겐 소모적이다. 내가 그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가 나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스럽지만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을 알아가게 되고 원하지 않아도 사람을 보는 눈은 넓어진다. 그렇게까지 골몰해서 할 필요는 없다. 무조건 이해를 포기하려는 것보다는 이해하려고 도전해보는 게 좋고, 그렇다고 과도하게 애를 쓰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정도로 시작한다면 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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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나로 사는 방법. 그 중에선 부동심, 용기를 기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 모든 무섭고 두려운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역치를 높이는 경우다. 가장 혹독하고 잔인한 것들을 경험하고 남이 나를 흔든다면 나 역시 반드시 보복을 하는 북궁유의 방법. 반면에 두려운 것을 앞에 두고도 마음으로 헤아리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맹시사의 방법. 몸으로 체험해서 한계를 넘기는 것과 마음으로 한계를 넘기는 방법의 차이다. '스스려 돌이켜보아 옳다면, 천만 명의 사람 앞일지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참 멋지고 울림이 깊었다. 나의 마음을, 내 안의 두려움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둘러봐야겠다.


원하는 것이 삶보다 중요한 것이 있고 싫어하는 것이 죽음보다 심한 것이 있으며, 훌륭한 덕망과 똑똑한 재능을 지닌 사람만이 이러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러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데, 현명한 사람은 이것을 잃지 않을 뿐이다.

​맹자가 말했다.
"구하면 얻게 되고 버려두면 잃게 되는데, 구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구하는 데는 방법이 있고 얻는 데는 천명이 있는데, 구하기만 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내 밖에 있기 떄문이다."

​맹자가 말했다.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말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말아야 하니, 이와 같이 할 뿐이다."

-p.581/613/616


그 다음으론 일을 찾고 일을 하는 법.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염두에 두지 못하고 눈 앞에만 급급해 살다보면 가장 쉬운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한다. 내가 평범하거나 바보같아서 모르는 것이 아니다. 잊었거나 잃어버린 것 뿐이다. 죽기보다 싫은 것, 삶을 걸만큼 하고 싶은 것은 결국 내 안에 있다.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게 되는, 답을 알고 싶고 구하고 싶은 대부분의 질문은 나는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사람을 대할까, 같은 것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구할 수 없는 것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나 명예나 존경받는 것은 많은 이들이 꿈꾸지만 마음대로는 구할 수 없는 것이라 본다. 우리는 내가 보다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이미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나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지만 내가 구하는 존경은 내가 나에게 줄 수 없는 것이다. 떄와 장소, 사람에 맞춰 내가 사람을 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때와 장소, 사람에 맞춰 나를 송두리째 바꾼다면 내가 사라질 수도 있다. 공자와 맹자가 알려준 답은 간단하다. 할 일은 하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은 하지 않는 것. 나를 구하고 나를 잃지 않는 것.


성문을 열어주는 문지기가 말했다.
"어디에서 오는 겁니까?"
자로가 말했다.
"공자 문하에서 왔습니다."
문지기가 말했다.
"안 될 줄 알면서도 하려는 사람이지요?"


맹자가 말했다.
"왕의 신하 가운데 친구가 자기의 처자식을 추위에 떨며 굶주리게 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를 버릴 것입니다."
"옥사나 소송을 맡아보는 중요한 관직에 있는 관리가 부하를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파면할 것입니다."
"나라 전체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이 좌우를 돌아보면서 딴청을 부리며 다른 말을 했다.

-p.256 379 <맹자> 양혜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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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인간과 사랑을 고민하는 진지한 와중에도 재밌는 부분도 많았다. 공자와 맹자의 성격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을 사랑하고 이를 놓지 않으려는 공자와 맹자의 의지가 신기할 정도로 끈질겼다. 공자는 순하게 함축적으로 핵심을 전하려 하다 보니 어려울 수 있겠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한탄하고, 잘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계속 각 나라를 돌았다. 그러니 저렇게 문지기가 ‘안 될 줄 알면서도 하려는 사람’이라고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반면 맹자는 당돌한 구석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상대방을 농락하듯 주장을 관철시키는 방법처럼 아무렇지 않는 질문을 하다가 왕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특성이 있었다. 왕은 어차피 노하겠지만 또 잘 설명하는 바람에 미운털은 박히지 않은 모양이다. 입바른 소리가 매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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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간간히 등장인물도 많고 대화 비중이 많았던 <논어>, <대학>, <맹자>에 비해 <중용>은 독백처럼 문장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와닿기도 했다. 중용이 무척 좋다는 하지만 정확하게 무엇인지 드러나 있지는 않아서 너무 좋은데 도통 말할 방법이 없네는 광고가 생각나서 혼자 재미있었다. 자연스럽고, 앞에서 말했던 인간을 사랑하는 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만 하기로 했다. <사서>를 사람들이 잘 읽지 않았던 건 오래되어서라기 보다는 함축적으로 드문드문 핵심만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는 사람이 보면 무릎을 탁 치겠지만 모르는 사람이 배워가기 위해 읽기에는 친절한 책은 아니다. 공자와 맹자의 의도가 완전히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더 쉽지 않은 것이다. 책을 읽다가도 중간중간 고비가 있었다. 소설도 아니고, 자기계발서도, 에세이도 아닌 묵직한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고 났을 때 사서를 한번에 모아 사람들이 읽었으면 했던 신창호 작가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가 있었다. <사서-이치를 담은 네 권의 책>을 덮었을 때 힘들고 괴롭기보다는 뿌듯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이 고비였다기 보다는 나라는 고비를 작게나마 넘은 기분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유가에선 500년마다 성인이 나온다는데 지금은 누굴까 물어보았다.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고 세상이 말세라 한탄할 필요는 없다. 우리 중 누군가가 또 그런 이가 될 수도 있을테니까.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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