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만 더' 읽게 해줘

글 입력 2019.02.1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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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시는 나를 쫄깃하게 한다.



 

나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소개한다. 많은 예술의 분야 중에서 영화나 음악 역시 나에게 큰 감동을 주지만, 나는 글자에서 오는 감동에 상당히 섬세한 감각을 가진 편이다. 글자들이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그것에 내가 투영될 때의 ‘쫄깃한’ 감동을 매우 즐긴다.


문학 중에서도 시(詩)는 상당히 ‘쫄깃하’고 섬세한 장르이다. 시는 비교적 짧은 길이에 감동을 함축해야 한다. 그렇기에 문장 부호 하나, 조사 하나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장르이다. 한 글자 혹은 하나의 문장 부호만 달라지더라도 전체적인 느낌이 바뀔 수 있는 것이 바로 시(詩)이기 때문이다. 시를 읽는 독자로서, 그러한 작가들의 노력을 생각하며 읽는 편이다. 그들이 왜 여기다가 온점이 아니라 반점을 찍었을지, 혹은 왜 하필 이 단어를 선택하였을지 같은 것 말이다. 이런 고민을 이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시는 나에게 들어와 있고는 한다.


잠깐 시와 관련한 필자의 이야기를 하자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영화 동주 보고 영화감상문 쓰기’라는 수행평가를 한 적이 있다. 그 영화를 보고 갑자기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가 서른 살에 본 2루타처럼 말이다. 그렇게 갑자기, 시 습작을 하기로 했다. 매점에서 살 수 있는 600원짜리 노트로 시작된 시작(詩作). 아이들과 선생님에게 꽤 잘 쓴다는 말을 들으며 학교에서 시 쓰는 아이로 불리게 되었다. 그 이후로 쭉 시인을 동경하고, 시인이 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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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애지시선, '아직도 처음이다'>

 


이런 나에게 너무나 큰 응원이 되어주셨던 시인(詩人) 국어 선생님이 있다. 나의 모교인 밀성고등학교에 재직하고 계시는 고증식 시인이시다(이하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시를 쓴다는 나를 교무실까지 불러 나의 습작 시를 봐주시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시를 쓰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주셨다. 그런 선생님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 바로 ‘하루만 더’ 시집이다.




1. 시는 생활과 가까워야 한다.



선생님께 질문을 드렸다. 시를 계속 쓰며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좋은 시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생님께서 나의 노트를 찬찬히 넘겨 보시더니, 덮으시고는 말씀하셨다. ‘시는 붕 떠서는 안 되고, 생활이라는 바닥에 붙어 있어야 한다.’라고. 즉 작가가 생활하면서 느낀 개인적 체험을 보편적인 정서와 맞게끔 버무리는 것이 쫄깃한 시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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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애지시선 '하루만 더'>


이 짧은 내용이 하나의 시가 될 수 있겠다고 선생님께서 생각하신 것은 왜일까. 정말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 내용이 선생님의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질문에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좋은 시는 생활의 바닥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이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즉 누구나가 경험했을 보편적인 정서 혹은 상황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작품으로 만드는 것의 장점도 이러한 점에 있다. 인간은 자신이 겪은 일이 자신에게만 일어난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간이 마주하는 사건들은 모두에게 다르면서도 모두에게 같다. 방금 문장의 역설을 이 시에 대입해보자. 누나가 있고, 이 누나가 결혼을 했고, 이 누나가 밤늦도록 부엌에서 불을 켜고 일을 했고, 자신은 새벽에 첫차를 타고 나오고, 이때 누나가 나오며 물 묻은 손으로 시댁 식구들 몰래 구겨진 지폐 몇 장을 준 경험을 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내 생각에는 고증식 선생님 한 분일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이것을 ‘시’로 쓰신 이유는, 누구든 이 시를 읽고 자신이 사랑한 기억 혹은 사랑받은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시에 나온 ‘누나’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또 돈을 받은 화자의 마음을 생각하면 누구나 가슴 한구석이 찡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것이 바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생활의 바닥일 것이다.
 

누구나 하나씩 마음에 바닥이 있다. 정서든 경험이든 무엇이든 간에 가라앉고 가라앉아 쌓여있는 바닥. 시는 이런 바닥을 건드려야 한다. 이런 바닥에서 건진 따끈따끈한 경험들을 시로 요리하여야 한다. 그 요리를 대접받은 독자가 그것을 찬찬히 음미한다. 그리고 그 음미를 통해 이 요리 역시 작가의 마음의 바닥에서 온 것임을 깨닫는다. 이럴 때라야만 독자는 또 다른 값진 경험을 쌓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생활의 바닥에 붙어 있는 시만이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감탄하는 순간이다.




2. 읽기 쉬운 시의 쫄깃함



선생님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른 특징은 바로 ‘쉽다’라는 것이다. 시에 별로 관심이 없는 친구들에게 ‘시 읽기가 어려운 이유’를 물어보면 가장 많이 꼽는 것이 시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단어와 문법 파괴 등 여러 요소가 그런 친구들을 힘들게 할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시에서는 어려움을 찾아볼 수가 없다. 시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시같다, 라는 말을 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나는 그 의견에 명백히 반대한다. 사실 시에서 시의 독해 난이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어려운 시가 좋은 시이고, 쉬운 시가 나쁜 시이다 와 같은 평가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쉬운 시를 즐긴다. 쉬운 시를 좋아할 뿐이지 가벼운 시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쉽고도 무거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선생님의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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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루만 더'>


위 시는 밭고랑을 살펴보는 할머니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계절적 배경까지 언급해 시적 이미지가 빠르게 그려지게 하는 시이다. 즉, 쉽게 이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생각할 것이 꽤 있다. 그중에 하나는 대조되는 대상 두 가지이다. 굳어 있던 뼈마디가 빨갛게 물들 정도로 열심히 일하시며 ‘봄을 끌어 오시는’ 할머니의 모습과 꽃샘추위에도 금세 샐쭉 돌아앉고 마는 꽃나무들이다.


나는 부끄럽게도, 꽃나무였다. 정말 작은 고통에도 크게 신음하며, 시에 등장하시는 할머니처럼 봄을 끌어오는 가치 있는 일을 해낸 것도 아니었다. 그냥 힘들다고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겪은 고통이 꽃샘추위라는 걸 알게 된 것은 다양한 사람들과 나눈 많은 대화였다. 나는 종종 시(詩)를 읽고 얻은 감동이 내 삶의 복선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곱씹을수록, 삶에 관해 무언가를 더 크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복선. 선생님의 시집에는 이러한 복선들이 가득하다. 그 복선 뒤에 올 깨달음을 찾아 나 역시 시를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밤이다.




3. 또 다른 쫄깃함을 꿈꾸며



문학의 세계는 매우 크고, 넓다. 누군가의 말처럼 문학이 바다라면 나는 그 앞의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는 어린아이이다. 그 어린아이는 바다를 동경하기 시작했고, 어설프게라도 헤엄치고 있다. 문학이라는 바다 깊이에는 알베르 카뮈나, 헤밍웨이, 백석 등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진주를 쥐고 잠들어 있을 것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언젠가 그들의 진주를 얻어 세상에 보여주고, 또 나 역시 그 바다에 잠들고 싶다는 꿈을 가진다.


고증식 선생님의 시를 읽으며 느낀 생각들은, 이러한 나의 꿈을 더욱 눈에 보이게끔 해주었다. 선생님의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그 깊이에 놀라고 또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다른 시인들의 시와는 무언가 다른 담백하고 쫄깃한 맛이 있다. 이상이나 백석과 같은 유명 시인의 시가 푸아그라라면, 고증식 선생님의 시는 집에서 끓인 된장찌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전자를 원하지만, 항상 생각나는 것은 후자다.


엄청나게 깊고 어려운 시와 문학들을 접하고 머리가 아프거나, 책을 보다가 여러 번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이 오면 아마 나는 또 고증식 선생님의 시집을 열고 있을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문학을 정말 좋아한다면, 혹은 좋아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아 포기하려 한다면 나는 선생님의 ‘하루만 더’ 시집을 추천하는 바이다. 그의 시(詩)들은 매우 친숙하게 다가오고, 책장을 다 넘길 때쯤이면 당신에게도 그가 남겨 놓은 삶에 대한 복선이 깃들게 될 테니 말이다. 이 긴 글을 지금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이규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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