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름 없는 개인을 만드는 사회에 대하여 [문화 전반]

마르쿠제로 보는 한국 사회의 교육
글 입력 2019.02.20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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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학생들에겐 이름이 없다. 학생이라는 정의 속에 ‘나’라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적과 등수가 개인의 자리를 대신하고, 얼마나 큰 효율을 낼 수 있는지가 학생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된다. 즉, 학생은 곧 생산성을 내는 사회적 대상이다. 생산성이란 말에는 생산을 하는 주체가 따로 있다는 뜻이 담겨있다. 학생들은 자기 삶의 주체가 되기보다 보이지 않는 다른 주체를 위해 살아가게 된다.

생산성이 기준이 되어버린 교육현장에서는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학생을 인적자원으로 보고 효율을 추구하다 보니 최대의 효율성을 내기 위해 학교는 학생을 통제하게 된다. 교복, 두발 검사, 등교시간 검사, 강제적 야간 자율학습 등으로 학생을 규제한다. 또한 효율성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능력을 계량화해야 한다. 때문에 채점에 어려움이 있는 사고 하거나 토론하는 수업은 지양된다. 암기가 목적이 되는 지식 전달 위주의 수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시험에서는 비정상적인 암기 문제와 오지선다형으로 구성된 치졸한 문제들로 학생들을 걸러낸다. 학생들은 지식을 주입받고 암기하고 정리하여 시험에 주입받은 지식을 그대로 쏟아내야 한다. 더 완벽하고 정확한 정답률을 위해 문제를 이해하고 푸는 것을 넘어서 빠른 시간 내에 정확히 푸는 기술들을 연마해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의 결과물을 등급화 하여 1등급부터 9등급까지 나누고 그에 따른 차등 혜택과 차별적 대우를 제공한다.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협력이 아닌 경쟁을, 평등이 아닌 차별을 당연시하도록 교육받으며 그것을 내면화하게 된다. 이는 개인의 성장을 위한 공부가 아닌 시험을 위한 공부이며, 학생들의 자유로운 생각과 질문은 교사의 권위와 학생들의 눈초리에 의해 묵살되기도 한다. 효율성이 떨어지는 철학적 사유와 자율적 행동들은 철저히 배제된다. 효율성을 내지 못하는 학생은 무시당하며, 스스로도 존재 이유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이 사회에서 생산성이 없는 ‘기계’는 폐기된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일례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대학의 입시 시험 성적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범주로 묶여 있던 그들의 존재감은 안타깝게도 그제야 드러난다.

어떤 학생들은 이런 현실에 대항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2015년 4월 진주여자고등학교의 김다운 양은 학교를 자퇴하고, ‘경쟁만 남은 배움 없는 학교에서 1등급 생산품이 되기를 거부한다며’ 1인 피켓시위를 했다. ‘내가 누군지, 왜 사는지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다’는 김다운 양의 말은 ‘내’가 거부되고 학생의 생산성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한국의 학교 교육 제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다. 김다운 양이 지적했듯이 학교는 흡사 경쟁이 난무하는 전쟁터이다. 견디지 못한 자는 낙오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열과 성을 다한다. 설사 입시에 성공하여 대학생이 되었다고 해도, 학생을 생산성의 대상으로 보는 사회의 시선은 달라지지 않는다. 학생들은 대학의 서열에 따라 다시 구분되고,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는다. 단지 ‘**대학생’으로 불릴 뿐, 사회 속에서 여전히 그들의 이름은 주목받지 못한다. 학생의 공부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교육은 학생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왜 한국 사회 교육의 목적은 생산성을 위한 기계 양성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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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운 양의 시위 모습
<출처 : 김다운 양의 페이스북>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란 재화의 사적 소유권을 기본권으로 인정하고, 생산 수단을 가진 자본가와 기업가 계급이 이익 추구를 위해 생산 활동을 하도록 보장하는 경제 체제를 가진 사회를 뜻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여기서는 노동력조차도 상품이 되어버린다. 이윤을 창출하는 생산력이 최대의 가치가 되고, 기계 발달에 의한 분업화로 인해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자에게 노동의 소외를 불러일으킨다.

노동에는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이 있는데, 필요 노동은 생존에 필요한 노동을 말하고, 잉여 노동은 자본가의 이윤으로 전환되는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을 말한다. 잉여 노동이 바로 소외된 노동이며, 이것이 가능하도록 욕망의 만족을 금지하는 행위를 마르쿠제는 과잉 억압이라고 정의한다. 과잉 억압은 사회적인 지배를 위해 필요한 억제로, 문명에서 인류의 영속을 위해 필요한 기본 억압과는 구별된다.

마르쿠제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재해석하여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는데, 프로이트의 인간 심리를 분석하는 기본 개념은 이드, 자아, 초자아로 구분된다. 이드는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며 쾌락 원칙을 추구한다. 자아는 이드가 현실을 파악하고 받아들인 후 나타나는, 현실원칙의 지배를 받는 합리적인 요소이다. 초자아는 자아가 역사적으로 전승된 기존 억압들을 받아들여 나타나는 무의식의 측면으로 도덕적 성격을 뜻한다.

후에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능을 리비도라는 성 본능과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본능으로 나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따르면 문명은 에로스와 죽음 사이의 투쟁이고, 문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성의 억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문명은 즉각적이고 완전한 만족에 대한 억압의 산물이며 이는 자원의 희소성 때문에 발생한다. 개인적 차원의 억압은 가정과 학교에 의해 이루어지고, 사회인으로 성장하면서 억압에 대한 개인의 순응은 계속된다.

이런 사회화 과정을 마르쿠제는 억압의 과정으로 본다. 마르크스에게도 사회화는 특수한 계급 이익을 보편적 일반 이익인 것처럼 장식하는 허위의식의 전파과정과 같았다고 한다. 알튀세르는 이런 마르크스의 생각을 이어받아 사회화를 담당하는 학교, 종교, 국가 기구 등을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문명에 의한 에로스의 억압이, 인류의 생존을 위한 기본 억압 단계에 그쳤다면 문명과 억압 사이에서는 아무런 갈등이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사회화 과정을 담당하는 학교의 탄생은 시작부터가 나라의 고급 관료를 양성하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전성은의 「왜 학교는 불행한가」에서는 학교의 출발을 ‘국가를 위해 전쟁에 필요한 전사 양성이 목적이었고, 그다음이 세금을 걷기 위해 글을 쓸 줄 아는 관리의 양성과 왕실을 지탱해줄 종교에 필요한 사제를 양성하는 일이었다.’라고 말한다. 또한 ‘학교는 필요와 목적, 운영에 있어 그 출발부터 철저하게 통치 집단에 의한, 통치 집단을 위한, 통치 집단의 기관이었을 뿐 아이들을 위한 기관이 아니었다.’라고 한다.

한국 교육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조선시대 존재했던 향교는 양반의 자제들만 다닐 수 있었고, 성균관은 고급 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였다. 조선 이후의 일제 시대에는 조선의 일제 식민지화를 목적으로 일제의 통치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서구 학교 교육 제도를 적용하였다고 한다. 국가가 만들어낸 학교 교육의 목적은 처음부터 학생 개인의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근대의 학교는 중세에서 산업사회로 넘어오며 종교기관을 대체해 국가를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근대 문물이었으며, 여기서 일어나는 교육은 진리탐구라는 목표를 표방할 뿐 실제로는 국가적 인재 양성이라는 목표를 따르고 있었다.

따라서 자본의 논리가 팽배하고 이윤 창출을 통한 경제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한국의 사회에서는, 최대의 효율성을 창출하여 국가의 경제성장에 이바지하는 학생만을 ‘인재’로 보고, 사회적 생산성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교육은 이러한 국가의 목적에 맞추어 1등급 상품을 배출하는 기관이 된다. 이러한 상품들은 비판적이거나 창의적인 사고로 통치 체계의 기반을 흔들어서는 안 되며, 마치 커다란 시계의 부품처럼 늘 그래 왔듯 주어진 일에 순응하여 맡은 일을 잘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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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제 <출처>


이는 마르쿠제가 이야기한 일차원적 인간의 개념과 부합하는 듯하다.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일차원적’이란 ‘기존 사고와 행동에 순응하고, 비판적인 차원과 기성 사회를 초월할 가능성의 차원이 부족한 상태이며, 기존의 구조와 규범, 행동에 순응하는 관행’이며, ‘일차원적 인간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 스스로의 의견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며, 통제되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대중의 행동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존재하는 힘에 복종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즉, 교육을 통해 일차원적 사고를 하게 된 학생들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고민해볼 기회를 갖기 힘들고, 생산성의 주체인 자본가 계급에게 납품되기 위해 최상의 기계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교육 체계에서 대한민국 학생 개인의 이름은 그들이 가진 가능성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교육의 문제는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학생만의 문제도, 교사만의 문제도 아니다. 분명 사람들은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합의하고 있는 국가 교육의 근본적 목표가 생산성 있는 학생의 양성이라면 어떤 제도이든 간에 그것은 결국 효율성 추구라는 본래의 목표로 귀결될 것이다. 일례로 학생의 창의적 수행능력을 향상하겠다는 수행평가 제도는 또 다른 점수 평가 항목으로 전락해버렸고, 학교 수업 시간에 추가한 창의적 체험 활동 시간은 다른 교과목을 위한 자습시간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교육의 근본적 목표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사람들은 학생을 생산성의 대상이 아닌 성장의 주체로 보고, 행복을 스스로 추구하는 개인으로서 존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들의 다양성을 수용하려는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이러한 학생들의 다양성을 수용하려는 교육적 움직임은 곳곳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실시되고 있는 자유학기제[1], 경기도에서 발행하는 청소년을 위한 철학 교과서, 대안학교의 설립과 대학생들의 지역 봉사 등이 작은 물꼬가 되어 교육과 학생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모여 사람들의 인식이 계속해서 바뀌어 나간다면 학생들은 숫자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히 자립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 자유학기제 : 한 학기 동안 중간, 기말고사 등 시험 부담에서 벗어나 토론과 실습 등 직접 참여하는 수업을 받고 꿈과 끼를 찾는 다양한 체험 활동을 하게 된다.





참고 문헌

[1] 허버트 마르쿠제, 「에로스와 문명」, (나남출판)
[2] 허버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한마음사)
[3] 손철성, 「허버트 마르쿠제」, (살림) 
[4] 박홍규, 「이반 일리히, 소박한 자율의 삶」, (텍스트)
[5] 이득재, 「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 (철수와 영희)
[6] 김덕영, 「입시 공화국의 종말」, (인물과 사상사)
[7] 전성은, 「왜 학교는 불행한가」, (메디치)
[8] 남인숙, “학력사회와 한국교육의 모순”, 「사회 이론」
[9] 김성민, “마르쿠제의 사회이론에서 해방의 문제”, 「철학논총」, 제27집 2002 제 1권
[10] 위키피디아


[황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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