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공허와 존엄의 싸움 [도서]

글 입력 2019.02.22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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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를 읽고,

헤밍웨이의 공허와 존엄의 싸움을 엿보다.




본질은 실존에 선행하지 않는다. 이탈로 칼비노는 헤밍웨이의 특징을 ‘실존주의 특유의 공허함에 대한 날선 감각’으로 꼽았다. 사람이 탄생하고 각자 삶의 목적을 선택해 책임감을 갖고 살아간다는 실존주의로 헤밍웨이는 소설 속에서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주인공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자신의 행동 안에서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지만 그 이외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를 둘러싼 모호한 불안과 억압, 공허함, 실존에 대한 위협이 강렬하게 나타난다. 이는 그의 유명한 작품에서도 드러나며 특히 내가 다루려는 소설 <불이 밝은 깨끗한 카페에서>에 잘 나타난다.


이 소설은 단편 소설로 깊은 밤, 조용한 카페에서의 이야기다. 밤늦게까지 카페에서 술을 마시는 청각 장애를 지닌 노인과 두 웨이터가 등장하는데 주인공이 뚜렷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이 서사 없는 소설의 구성 자체가 나에겐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카페에 대한 자세한 묘사 없이 일상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고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지나고 보니 이러한 구성도 칼비노가 말한 공허함에 대한 날선 감각을 나타낸 헤밍웨이의 의도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소설 속에서는 카페 문을 닫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젊은 웨이터와 그렇지 않은 늙은 웨이터가 말다툼을 벌인다. 여기서 늙은 웨이터는 젊은 웨이터에게 당신은 젊음, 자신감, 직업 모두를 가졌지만 자신이 가진 것은 직업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칼비노가 헤밍웨이 소설 속 주인공은 실리적 기술을 통해 자기가 하는 일을 자신과 일치시킨다고 한 것처럼 ‘자신 - 직업 = nothing’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며 그의 주변에는 모두 부정적인, 항상 도피하고 싶어 하는 감정들만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이 공허함과 허무에 대해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


칼비노가 고전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고전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며 그 고전작품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나도 고전을 통해 현 시대를 이해하고 우리의 문제점을 되돌아볼 수 있는 경험을 했다. 사실 ‘고전’에서 풍기는 느낌은 굉장히 현시대와는 다르다. 나도 고전소설을 떠올리면 심청전 같은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환상이 생각났기에 쉽게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왜 고전을 읽는가> 속 다양한 외국 고전을 만나보면서 <불이 밝은 깨끗한 카페에서>처럼 정말 내 옆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한 이야기들도 있음을 깨닫고 고전과 현실은 관계를 맺어 조화 혹은 충돌이 일어남을 느꼈다.


특히 내가 이 소설을 읽고 느낀 연결 지점은 바로 ‘공허와 존엄성의 싸움’이다. 원서의 단어를 가져오자면 ‘Nothingness'와 ’Dignity’다. 소설에서 카페 손님인 청각 장애를 지닌 노인은 일주일 전 자살을 하려고 했다. 그는 공허에 사로잡혀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한 후, 다시 존엄성을 찾고자 다짐한다. 그래서 주변의 공허함을 없애고 세상에서 잘 살아보려고 깨끗하고 환한 곳, 카페를 찾아와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결국 카페에서 젊은 웨이터로 인해 쫓겨난다. 나는 그의 청각장애가 세상과 소통이 끊긴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장애를 얻고 싶어서 얻는 사람이 없듯, 세상과 소통을 하고 싶었지만 거절당한, 공허에 굴복한 처지임을 나타낸 것이다. 지금은 어떨까? 이 싸움은 다른 방식이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노인들은 요양병원, 중환자실 등을 전전하며 자신의 병을 견디면서도 삶에 대한 절망을 느낀다. 헤밍웨이의 시대보다 훨씬 긴 삶을 살 수 있지만 죽음까지의 과정이 카페 손님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독한 치료제로 죽음을 늦추려고 하지만 그 과정이 더 괴로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헤밍웨이의 시대에서도, 현실에서도 ‘공허와 존엄성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이 소설은 늙은 웨이터가 ‘It all was nada.’라고 하면서 결국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간다며 허무함으로 결말을 맺는다. 칼비노는 이러한 결론을 통해 헤밍웨이의 범박한 실존주의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허무의 끝에서도 역설적으로 헤밍웨이는 존엄을 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의 늙은 웨이터는 헤밍웨이를 나타낸다. 늙은 웨이터는 어둠에 대항하는 것이 자신의 카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웨이터는 밤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고 현실이 버겁고 힘든 사람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노력한다. 나는 아무리 헤밍웨이가 허무주의를 나타낸다고 하지만 ‘공허와 존엄성의 싸움’에서의 대책을 세우고 싶어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싸움에서 이기려면 존엄성을 지킬 불빛, 깨끗함, 질서와 같은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이 소설에 담았고 자신도 늙은 웨이터처럼 힘든 삶을 살고 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가 허무의 끝인 죽음이 아닌 존엄성과 함께하는 죽음을 원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 방법을 찾고 있다. 그 예로 안락사. 존엄사가 있다. 그러한 방법들이 그 뜻대로 존엄을 지킨 결정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고전이 남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임은 틀림없다.


이렇게 고전은 현재와 계속해서 소통하고, 고전에서의 치열한 고민과 갈등이 현재에 해결될 수도 있으며 아직도 힘들게 대책을 찾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고전이 남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뜻깊기에 고전의 가치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빛난다고 생각한다. <불이 밝은 깨끗한 카페에서>를 17살에 처음 읽었을 때는 문자 그대로의 뜻에 집중하다 보니 늙은 웨이터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왜 고전을 읽는가>를 통해 헤밍웨이를 자세히 알고 칼비노의 시선에서 원서를 읽었더니 번역본에서 느끼지 못했던 색다른 감정을 느끼며 늙은 웨이터의 감정에 대해서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더 나아가 칼비노와는 다른 의견이 생기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고전을 읽는 이유와 현대를 살아가는 20대와 고전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책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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