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도서]

글 입력 2019.02.22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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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20년이 넘도록 일면식 없이 지내온 타인의 삶에 공감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생각보다 말이 먼저 입 밖으로 튀어 나온다.


“내가 네 마음을 알아. 너를 이해해.”


하지만 내가 이야기를 듣고 떠올린 감정이 정말로 그 사람이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일까?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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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총 아홉 개의 단편을 엮은 단편소설집이다.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소설 속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외로움을 느끼지만, 결국 그 어리석음으로 위로 받고 희망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나의 통역으로 고용됐는데도 내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내가 왜 ‘시체의 수영’이라고 말하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어. 당신은 내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몰라.”


 –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中



소설 속에서 외로움은 대화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향한 관심이 부족해서 소외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인물들은 서로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지만, 끝내 그들은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 아무리 애써도 내가 하는 말을 누구도 알아 듣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나 또한 누구의 말도 알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외로움을 낳는다.



두 사람은 내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봤으나, 내가 무엇을 봤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순간만은 그 누구라도 내가 바라본 노을을, 그러니까 엄마가 죽던 날의 노을을 바라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엄마의 고통을 오직 진통제만이 이해했듯이 내 슬픔은 그 노을만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고통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슬픔을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中



저는 외롭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는 고독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저는 쓸쓸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치 눈이 내리는 밤에 짖지 않는 개와 마찬가지로 저는···


–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中


고통과 슬픔은 철저하게 개인의 몫으로 남겨지는 감정이다. 자신의 고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타인의 고통 또한 겨우 어림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면의 시련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두고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비밀은 내밀한 사실을 발설할 것인지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시도조차 무의미하다는 무력감에서 오기 때문이다.



처음 사진을 봤을 때는 엄마가 얼마나 괴로워하다가 죽어갔는지가 떠올라 힘들었지만, 곧 나는 삶의 어느 특정한 순간에 나만이 느꼈다고 생각했던 뭔가를 또다른 누군가도 봤으리라고 짐작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기이하면서도 따뜻한 경험인지 깨닫게 됐다.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中



위안이라고는 말했지만, 그건 이해하기 어려운 삶의 순간들, 예컨대 엄마의 죽음과 같은 특정한 순간들을 그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체념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 탓에 누군가 내가 본 것과 같은 노을을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온 존재가 떨릴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中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고독한 고통과 슬픔의 순간을 또다른 누군가도 겪은 적이 있다는 기대를 품게 되는 때가 찾아온다. 어쩌면 당신도 나와 같은 감정으로 살아본 적이 있으리라는 어림짐작, 또 그렇기 때문에 당신도 나와 비슷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오해는 이해보다 쉽고 따뜻하고 달콤하고 유혹적이며, 우리는 오해한 채로 이해 받고 있다고 착각해버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nak’이 케이케이의 젖은 몸 같은 걸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뭐 어떤가. 그래도 나는 해피가 죽은 아들 때문에 두고두고 미안해했다는 사실을, 하여 극지 탐험가처럼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걸. 해피도 이젠 알겠지. 케이케이의 젖은 몸이 있어서 내가 살아갈 수 있었다는 걸.


–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中


그러나 이 책이 ‘이해 받았다는 기분은 그저 기분탓에 지나지 않으니 이제 꿈에서 깨어나’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회의와 소통수단으로서 언어의 한계를 뜻하는 문장을 계속해서 읽을 수 있지만,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위로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서로의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소통하고, 함부로 위로하지 않으면서도 무사해진다.



그게 왜 나인지, 그리고 왜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건지 나는 몰라요. 분명한 건 마음이 아프다는 거죠. 정말 마음이 아파요. 듣는 사람이 없으면 말하는 사람도 없어. 세계는 침묵이야. 암흑이고.


– 달로 간 코미디언 中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 세계의 끝 여자친구 中


김연수 작가가 들려주는 아홉 편의 이야기가 끝나고 책장을 덮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타인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은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던 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내 세계 속에서 무사히 잘 있을 것이라는 따뜻한 생각.



[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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