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버나움', 그 씁쓸한 맛을 느끼며 [영화]

글 입력 2019.02.22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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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용이 포함된 글입니다.


따분한 일상 속, 내게 즐거움을 주는 소소한 행복이 있다. 요즘 말 그대로 ‘소확행’인 그것은 영화를 보며 먹는 ‘팝콘’이다. 원래 영화를 보며 무언가 먹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오로지 영화에 집중을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비싼 팝콘 값에 있었다. 한 줌의 옥수수 알갱이들이 뜨거운 열을 받아 몇 배로 부풀어 올라, 몇 십 배의 가격으로 뻥튀기 되어 팔리는 것이 탐탁치 않았다.

그러다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매점 이용료 50% 할인이라는 혜택을 받게 됐다. 그전까진 사치스럽게 느껴졌던 영화관 팝콘이 이젠 영화 볼 때 옆에 없으면 허전한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그 날도 어김없이 내 오른 편엔 큰 사이즈의 캬라멜 팝콘이 놓여있었다. 그러나 영화 시작 이후 나는 더 이상 팝콘을 먹을 수 없었다. 아니, 팝콘을 아예 바닥에 내려놓았다. 은근히 풍겨오던 팝콘의 달콤한 냄새가 계속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달콤한 냄새는 이 영화와 어울리지 않았다. 영화 ‘가버나움’은 내게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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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되기 전부터 기다린 영화였다. 엄청난 상들을 휩쓴 것도 모자라 칸 영화제에서 최장 15분간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는 예고를 봤기 때문이다.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길래’하는 궁금증을 지닌 채 영화를 예매했다.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었다. 나중에 영화 엔딩을 보고 알게 된 내용이지만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은 직업 배우가 아닌 실제 난민이다. ‘자인’ 역의 ‘자인 알 라피아’는 베이루트 지역에서 배달일을 했다. 자인의 여동생 ‘사하르’역인 ‘하이타 아이잠’은 자인과 마찬가지로 베이루트 지역에서 껌을 팔다 캐스팅됐다. 이 밖에도 자인을 돌봐 줬던 라힐 역의 ‘요르다노스 시프로우’는 불법 체류자이다. 자인과 라힐 역의 배우는 칸 영화제 참석 일주일 전까지 출생신고서가 없어 법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전문 배우가 아닌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담은 이야기를 꾸밈없이 연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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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자인은 자신의 부모님을 고소한다. 이유는 “이 끔찍한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자인에겐 많은 형제자매들이 있다. 흡사 우리나라 전래동화 ‘흥부와 놀부’에서의 흥부처럼 많은 자식들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작은 집에 모여 산다. 부모는 그런 아이들에게 무관심하다. 부모의 손길이 닿지 못한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것은 온전히 자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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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자인에게 한 살 터울인 여동생 사하르는 더욱 애틋한 존재이다. 자인은 사하르가 초경을 하자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도록 애를 쓴다. 자신의 옷을 벗어 생리대로 대신 쓰게 하고 슈퍼에서 생리대를 몰래 훔치기도 한다. 그러나 자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하르는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동네 슈퍼주인에게 닭 몇 마리를 받고 팔린다. 소중한 존재를 눈 앞에서 무참히 뺏겨버린 자인은 그렇게 집을 나오게 된다.

이후 자인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간다. ‘라힐’이란 좋은 인연을 만나기도 하지만 평화는 그리 길지 않다. 단지 하루를 더 살기 위해 자인이 견뎌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라힐은 어디론가 끌려간다. 라힐의 아이인 ‘로하스’를 돌보기엔 자인 혼자 역부족이다. 결국 자인은 돈 때문에 로하스를 팔아 넘긴다. 그 돈으로 이민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 집으로 가지만 그 곳엔 자인에게 필요한 출생증명서 대신 동생의 죽음이라는 소식만이 놓여 있다.

이 많은 것들이 12살 남자아이가 홀로 견뎌내야 하는 것들이었다.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를 가는 친구들을 보며, 알록달록한 놀이동산을 보며 자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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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며 가장 답답한 점은 여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라는 점이다. 자인은 법정에서 부모님을 고소했지만 자인의 부모도 실은 자인이 겪은 고통의 본질적인 원인은 아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책임을 지지 않은 모습을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기엔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다. 자인도 요나스를 끝까지 책임지려 했지만 결국 팔아버리는 모습에서 이들의 현실을 알 수 있다. 자인이 겪은 고통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고통의 원인은 선명히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범인은 영화 속이 아닌 스크린 밖에서 편하게 의자에 기대 앉아 자인의 고통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제목인 가버나움(Carpernaum)은 성경 속 신이 멸망을 예고한 지명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 마지막, 법정내 자인의 발언이 마치 이 끔직한 가버나움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을 알아 달라는 외침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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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남은 팝콘을 한 줌 집어먹었다. 기계 안에 오래 들어 있었는지 탄 팝콘이 들어 있었다. 달콤함 사이에 있던 그 씁쓸한 맛이 꽤 오랫동안 입안에서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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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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