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 루시!> : 우리 모두 비극의 보편성으로 위로 받기를 바라며

글 입력 2019.02.22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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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루시 포스터.jpg
 


영화 [오, 루시!]는 주인공인 세츠코에게 ‘잘 살아.’라고 속삭이며 자살하는 남자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보통의 영화라면 자살이라는 자극적인 사건이 발단의 요소가 되어 주인공의 인생에 변화가 찾아온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자살 장면은 세츠코의 인생이 얼마나 무미건조한지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 죽기 직전의 사람이 자신에게 말을 하고 선로에 몸을 내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츠코는 멀뚱하게 보고만 있을 뿐이다. 세츠코는 회사에서도 내내 시종일관 무표정 그대로이다. 모든 사람은 똑같다는 듯, 다 안다는 듯 혹은 모른대도 상관없다는 듯 회사 사람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감기가 심해져 기침을 하니 회사의 상사가 “이봐, 세츠코! 감기가 심해지는 것 같은데 담배를 끊는 건 어때? 단 것이 (담배보단) 나을 때가 많지”’ 라고 이야기할 때 세츠코는 어물쩡 대답하곤 넘어간다. 그리고 그녀가 연 회사 서랍엔 단 간식들이 쌓여있다. 세츠코에게 단 간식은 담배이상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나는 세츠코 그녀가 겪어온 인생은 단 음식들로 결코 달달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이라 느꼈다. 물론 처음에 세츠코라고 달디 단 간식들로 담배를 끊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서랍에 쌓여있는 것들은 그녀가 쓴 담배를 끊으려는, 단 것으로 새롭게 시작해 보려는 노력을 반증한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에는 옛 애인을 뺏어간 친언니가 있었고, 은근히 없는 사람 취급하는 회사 동료들이 있고, 자신에게 살갑게 굴지만 자신을 은근히 얕잡아보는 조카 미카가 있다. 외롭다는 자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씁쓸한 그녀의 인생을 말해주듯 방은 어지럽고 음침하다.


조카인 미카가 소개시켜 준 영어학원에 반신반의하며 들어갔을 때 세츠코가 수강신청을 마음먹도록 만든 존재는 미국에서 날아온 원어민 강사 존이다. ‘허그가 필요해 보이네요.’라며 다짜고짜 미국식 인사 방법이라며 안아주며 ‘루시’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존에게 마음을 뺏긴 세츠코는 거울을 보며 존이라는 이름을 연신 외쳐본다. 영화 속 세츠코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첫 장면이다. 사실 세츠코의 모습에는 일본 현대인들의 모습뿐 아니라 한국사회 속 현대인들의 모습 또한 찾아볼 수 있다. 혼자 지내는 게 편하고 지쳐가지만 더 이상 스스로 지치고 외로운 것인지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의 현대인들의 모습, 인생이 달아졌으면 하는 시도들조차 이제는 지치는 현실들이 곧 세츠코의 인생에 투영되어 있다. 그런 세츠코의 인생에 포옹으로 온기를 전해준 존을 찾아 LA로 떠난 그녀지만 출발의 설렘과 반대로 애처롭고 처절하고 가끔은 저렇게까지 하는가 싶을 정도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그렇게 찾아간 LA의 존은 유부남이었고 바람둥이였으며 월세나 밀리는 신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의 허그를 잊지 못해 매달리고 사랑한다 외치는 세츠코의 모습에서 나는 자신이 사무치게 외로운 존재를 자각하고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나의 모습 나아가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들은 모두 어느 부분에서든 일명 ‘눈 가리고 아웅’을 한다. 그 이유는 궁극적으로 나를 위함이며 상처받는 것이 두려운 방어기제에 기인한다. 사실 ‘눈 가리고 아웅’을 해도 결국엔 상처받을 것임을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다. 그렇지만 그 순간의 상처는 어리석게도 너무나 두렵고 무섭다. 혹은 혹시나 달라질지도 모르고 내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어리석은 희망을 가져본다.


영화는 세츠코가 더 이상 예전의 세츠코가 아님을 후반부에서 계속 보여준다. 무(無)의 상태에선 아무것도 몰랐지만 한번이라도 유(有)의 상태를 겪은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세츠코는 존의 허그가 있기 전까진 자신이 외로운지도 몰랐으나 이제는 전과 다르게 처절하게 외롭고 속상하다. 낙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바라고 ‘루시’로서 떠난 미국에서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세츠코의 인생을 후반부까지 냉담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결말 속 ‘톰’이라는 일본인 남자의 짧지만 강한 존재를 각인시키며 미지근한 희망을 보여준다. 마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계속된다.”라는 말을 길게 늘어뜨려 만든 영화가 바로 ‘오, 루시!’인 듯 느껴지도록 말이다.


인간은 비극의 보편성을 느낄 때 가장 위로를 받는다고 백영옥 작가의 책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에서 그랬다. 외로움은 숙명이며 무언가의 시도조차 이제는 피곤한 현대인들에게 인생을 조금이나마 달아지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존재는 달기만 한, 마치 간식들과 같은 존의 ‘허그’가 아니라, 비극의 보편성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영화 속 ‘톰’과 같은 존재이다. 너만이 아닌 나 또한, 다른 이들 또한 아프고 외롭고 지쳐있다. 온기가 필요하다. 아프지만 아픔에 마주하고 비극의 보편성을 느끼고 공유한다면 비로소 인생이 따뜻해지고 달아질 것이다. 영화의 결말처럼 말이다.



[이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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