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사랑한 단편 [도서]

독서의 시작은 단편으로
글 입력 2019.02.2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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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고등학교를 지나면서 책과 나의 관계는 조금씩 소원해졌다. 소설책보다는 문학 교과서를, 인문학 책보다는 윤리 교과서를 더 자주 보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권씩은 읽었던 중학교 시절의 나는 사라지고, 한 달에 한 권도 채 읽지 않는 내가 되어버렸다.

독서도 운동과 같아서, 한동안 책을 멀리하다보면 ‘일전에 내가 얼마나 다독을 했는가’와는 상관없이 독서 체력은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법이다. 마치 한때는 스쿼트를 스무 개씩 쉬지 않고 할 수 있었던 내가 한 달 동안 운동을 좀 멀리 했더니 이젠 스쿼트 다섯 개만 해도 다리가 욱신거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입시를 치르고 나서도 좀처럼 책과 가까워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작년 여름, 우연히 단편 소설집을 하나 접한 후, 나의 독서 습관이 조금씩 예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장편 소설을 위주로 읽었다면 이제는 단편 소설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는 점 정도가 바뀐 것 같다. 만약 당신이 독서 체력도 없고, 그냥 체력도 없어서 매년 일기장에 ‘책 많이 읽기’를 버릇처럼 써 두는 사람이라면, 장편보다 단편으로 독서를 시작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다.



김애란, <바깥은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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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작가는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으로 유명한 작가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 작가의 단편소설을 상당히 좋아한다. 특히 <바깥은 여름>은 김애란 작가 특유의 유려한 문체와 섬세한 감각, 그리고 일상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줄거리가 돋보이는 단편집이다. 작년 여름에 이 책을 접한 후, 글을 읽기가 아까워서 일부러 2~3주 동안 느리게 읽어 내렸던 기억이 있다.

<바깥은 여름>에는 총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입동’, ‘노찬성과 에반’, ‘건너편’, ‘침묵의 미래’, ‘풍경의 쓸모’, ‘가리는 손’, 그리고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이다. 이중 나는 ‘입동’, ‘침묵의 미래’, ‘풍경의 쓸모’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특히 ‘침묵의 미래’는 도대체 이 글의 화자가 누구인지 곰곰 생각해보며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통통 튀고 상상력이 넘치는 소재와 전개였기에 단숨에 읽었다.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풍경의 쓸모’


사실 내가 김애란 작가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작가의 문장 때문이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이 한 문장 때문에 이 책을 샀고, 저 문장 때문에 이 책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이나 <비행운>도 이 작가 특유의 아름답고 섬세한 문체에 홀리듯이 읽었는데, <바깥은 여름> 속 단편들은 어투가 담담하기까지 해서 더 내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다. <비행운>이 우리 일상 속 소시민들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파헤쳐서 그 속에 담긴 우울을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이라면, <바깥은 여름>은 우울보다는 씁쓸함을 더 짙게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느꼈다. 누구나 한 번쯤 꼭 접해봤으면 하는 작품이다.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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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기도 하다. 여성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이 작가의 작품 속에는 대부분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각자 개성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다. 최은영 작가는 중편 ‘쇼코의 미소’가 2013년 작가세계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등단했고, 2014년에는 제5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내게 무해한 사람>에도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 여름’, ‘601, 602’, ‘지나가는 밤’, ‘모래로 지은 집’, ‘고백’, ‘손길’, 그리고 ‘아치디에서’까지. 나는 특히 ‘그 여름’과 ‘모래로 지은 집’을 좋아한다. ‘그 여름’은 이경과 수이, 그리고 은지의 사랑 이야기다.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단순히 비극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그들이 겪는 갈등과 고민, 애정, 후회 등을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점이 나에게 강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일단 상당히 재미있었다. 사실 이 단편들은 각 이야기가 가진 개성도 참 좋지만, 하나같이 다 ‘재미있어서’ 좋아한다.


왜 이해해야 하는 쪽은 언제나 정해져 있을까.

고등학생 공무는 천리안 동호회에 그렇게 썼었다. 그 문장은 며칠이고 내 안에서 구르면서 마음에 상처를 냈다. 나는 늘 이해하려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모래로 지은 집’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을 꼽으라면 단연 저 문장을 꼽을 터다. 이해해야 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것도, 그 문장이 마음속을 구르며 상처를 냈다는 것도 모두 절절히 공감 가는 내용이었다. 모든 상황에는 ‘어쩔 수 없음’이 있고, 그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하는 사람은 관계에 절실한 사람이다. 이 책이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를 상당히 입체적으로 그렸다는 점 때문에 더 좋아하게 되었다. 주인공에게 이입해서 줄거리를 따라가다가도 어느 순간 다른 인물의 상황을 알게 된 후 주인공을 탓하면서 오는 갈등을 굉장히 많이 경험했다.

*

장편 소설은 작품 속에 더 푹 빠진 채 오랜 시간을 헤맬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지만, 단편 소설은 짧고 굵게 임팩트를 남긴다는 점이 장점이다. 그리고 이런 장점을 따지기 전에, 시간도 여유도 없는 우리 일상이 먼저가 아닐까 생각한다. 출퇴근길, 통학길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읽기 좋은 단편으로 독서를 시작하면 어떨까. 단편을 넘어 중편, 중편을 넘어 장편까지 도달하는 길은 그다지 길지 않지만 단편으로 시작하는 출발선에 서는 길은 조금 길다. 봄이 오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매년 활자로만 남겼던 ‘책 많이 읽기’ 목표를 슬슬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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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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