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바로크와 고전, 그리고 하나의 심장 : 2019 임현정 피아노 리사이틀

글 입력 2019.02.27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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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정 피아노 리사이틀 포스터(최종).jpg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평일 저녁에 무언가를 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친구를 만나더라도, 학원을 다니며 뭔가를 배우더라도, 운동을 하더라도 다음 날 업무에 전념할 컨디션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지를 미리부터 생각하며 움직여야 하다보니 평일 저녁에는 가급적 뭔가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싶어지는 때가 분명 있다. 수면시간과 다음 날의 완벽한 컨디션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내 에너지를 할애하고 싶어지는 순간은 부지불식 간에 나를 휘어잡곤 한다. 이번 2월 26일, 아트인사이트의 초대로 간 2019 임현정 피아노 리사이틀이 나에게는 또 다시 찾아온 그 불꽃 같은 순간이었다.




프로그램


베토벤 | L.v.Beethoven
피아노 소나타 No.1 Op.2  Piano Sonata No.1 Op.2


바흐  | J.S.Bach
프렐류드와 푸가 BWV 846 Preludes and Fugues BWV 846
프렐류드와 푸가 BWV 848 Preludes and Fugues BWV 848
프렐류드와 푸가 BWV 850 Preludes and Fugues BWV 850
프렐류드와 푸가 BWV 852 Preludes and Fugues BWV 852
프렐류드와 푸가 BWV 854 Preludes and Fugues BWV 854
프렐류드와 푸가 BWV 856 Preludes and Fugues BWV 856
프렐류드와 푸가 BWV 858 Preludes and Fugues BWV 858
프렐류드와 푸가 BWV 860 Preludes and Fugues BWV 860
프렐류드와 푸가 BWV 862 Preludes and Fugues BWV 862
프렐류드와 푸가 BWV 864 Preludes and Fugues BWV 864
프렐류드와 푸가 BWV 866 Preludes and Fugues BWV 866
프렐류드와 푸가 BWV 868 Preludes and Fugues BWV 868

Intermission


베토벤 | L.v.Beethoven
피아노 소나타 No.32 Op.111  Piano Sonata No.32 Op.111





피아니스트 임현정은 이번에도 광택이 나는 로브 같은 것을 걸치고 바지로 된 복장을 하고 무대 위에 섰다. 그가 처음으로 연주한 곡은 프로그램 상에도 나와있던 것처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번이었다. 운명적인 느낌이 드는 리듬이 임현정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되자마자 직감했다. 아, 확고하구나. 소나타 1번에서 느껴지는 확고함, 긴박감, 선포하는 듯한 그 일련의 느낌들이 아주 명확하게 와닿았다. 베토벤의 삶이 한창 탄탄대로를 달리며 쭉쭉 뻗어 나가던 그 시기의 그 당당한 포부가 잘 그려지는 연주였다. 그렇지만 압도적인 임팩트를 느낄 만한 곡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이 선곡이 베토벤으로 시작하여 끝나며, 동시에 베토벤 소나타의 알파와 오메가를 보여주려는 뜻이라고 짐작하면서도 막상 첫 곡으로서의 임팩트는 덜하다는 게 조금은 무난하면서도 싱거운 듯한 느낌도 들었다.


*


이어지는 바흐는, 처음의 계획과는 다소 달랐다. 최초에는 바흐 프렐류드와 푸가를 반씩 나눠 1, 2부에 걸쳐 연주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실제 연주회에서는 프렐류드와 푸가 12곡을 모두 1부에 한꺼번에 연주했다.


1부의 묘미는 베토벤 소나타 1번이 아니라 바로 이 바흐 프렐류드에 있었다. 실로 바흐와 임현정이 온전히 하나를 이루기 위한, 싸움 아닌 싸움이었다. 개성으로는 둘 다 빠지지 않는 느낌인지라, 바흐 프렐류드를 연주하는 1부의 시간은 마치 바흐와 임현정의 심장이 합일을 이루는 그 과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중 첫번째 곡인 바흐 프렐류드와 푸가 BWV846의 경우는 이 곡이 바흐의 작품인 것을 모르더라도 그 선율을 들어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익숙한 선율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 곡은 지난 2019년 1월 29일 KBS Classic FM 중 오전 11시에 방송되는 KBS 음악실의 '살롱 드 피아노' 코너에서 임현정이 라이브로 연주했던 곡이기도 하다. 유명하기도 하고, 임현정의 라이브 연주를 라디오로 들었던 곡이기도 하고, 또 선율 자체가 청아해서 생각날 때면 곧잘 듣는 곡이기도 해서 바흐 작품의 시작이 이 곡이었던 게 내심 좋았다. 다만 임현정의 연주는 내가 익숙하게 듣는 것보다 템포가 빨랐다. 조금은 한 숨 돌리는 듯한 템포였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세번째 곡이었던 BWV850, 여덟번째 곡인 BWV860, 열한번째 곡 BWV866에서는 바흐와 임현정 중 임현정이 더욱 강했던 곡들이었다. 페달링이 깊었고 표현이 극적이어서 바흐라기보다는 오히려 낭만 시기의 작품들을 듣고 있는 것 같다고 착각해도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이 들렸다. 그만큼 임현정의 개성과 스타일이 강하게 드러났던 순간들이었다.


반면에 다섯번째 곡인 BWV854, 아홉번째 곡이었던 BWV862와 열번째였던 BWV864에서는 임현정보다 바흐의 개성이 더 잘 느껴졌던 곡들이었다. 물론 임현정의 개성도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러나 연주자의 개성도 그렇지만 푸가의 그 선율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고 임현정 본인도 이를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 연주하는 것이 느껴졌다.


바흐와 임현정의 심장이 맞닿아 완전한 합일을 이룬 순간은, 바흐 작품 중 마지막 곡이었던 BWV868에서였다고 느꼈다. 누구나 들었을 때 '아 바흐답다'하고 받아들이는 그 느낌과, 딱 들었을 때 '임현정이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그 개성이 온전히 조화를 이루었다. 그 조화로움의 끝에 남았던 여운은 가히 1부의 끝을 화려하게 장식함과 동시에 객석에 큰 울림이 되어 와닿았다. 그래서인지 피아니스트 임현정은 아마도 곡이 끝나고 인사를 한 뒤 바로 들어가 인터미션을 가지려 했던 것 같은데, 객석의 뜨거운 박수가 지속되자 한 번 더 나와서 인사했다.


*


인터미션 이후 2부는,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바흐 작품을 1부에서 끝내게 되어 온전히 베토벤 소나타 32번에 할애되어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이 대곡. 악장은 2악장으로 압축되어 있지만 그 속은 어마어마하게 넓고 깊은 이 곡을 임현정이 어떻게 그려내줄 지, 공연을 기다리면서 가장 궁금했었다.


베토벤 소나타의 끝을 장식하는 이 곡은, 이번 공연에서 임현정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내 귀에는 베토벤 1번이나 바흐 프렐류드를 연주할 때보다도 임현정의 손끝이 가장 자유롭게 노니는 것처럼 들렸다. 자유분방하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1악장의 무겁고 두꺼운 소리가 임현정의 손끝에서 퍼져나오기 시작하자 1부에 남았던 그 모든 여운이 싹 가시고 콘서트홀의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똑같은 마이너 곡인데도 1부 첫곡이었던 소나타 1번과 더욱 극명하게 대비되어 듣는 재미가 더했다. 1번에서 느껴지던 것보다도 훨씬 더 극적이고 무겁게 와닿는 운명이 느껴지자 그제서야 1번이 첫 곡으로 배치된 이유가 피부로 와닿았다. 그렇게 임현정은 1악장에서 극에 달하는 긴장감을 최고조까지 쌓아 나갔다.


그러나 32번의 매력은 1악장과 또다시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2악장에 있다. 1악장에서 그 험난하고 어려운 운명에 맞서던 첨예한 분위기는 2악장에서는 아득하게 확장되고 높아져간다. 임현정은 아리에타를 아주 우아하고 고결하게 전달했다. 변주가 시작되면서 그 고양감은 한층 더 상승했다. 그리고 베토벤이 그려내는 인외의 경지에까지 임현정의 손끝이 잇닿는 그 순간 모든 것이 승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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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무대가 다 끝나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래서 임현정의 연주를 듣게 된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개성을 드러내면서 작곡가의 세계 역시 함께 그려내는데, 그 해석에 동의하게 되는 순간도 있고 내가 원하던 것과 궤를 달리 하는 순간도 있지만 그마저도 매력적인 것이 임현정의 연주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임현정의 연주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어떤 연주를 하더라도 마치 낭만시기의 작품을 듣는 것처럼 들리게 하는 게 있다. 그래서인지 새삼 <침묵의 소리> 공연 때와는 달리 낭만 시기의 작품이 프로그램에 한 곡도 없었던 게 아쉬웠다. 특히 이번에 베토벤 소나타를 듣고 나니 임현정이 라흐마니노프 소나타도 연주해줬으면 하는 욕심이 들었다. 2년 전 그 때 라벨을 연주했던 것처럼 또다른 라벨 작품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이렇게 나처럼 낭만시기 작품도 연주해줬으면 하고 아쉬워 할 관객들이 있을 거라는 걸 임현정은 이미 예측했던 걸까. 놀랍게도 내가 원했던 라흐마니노프와 라벨의 작품 모두 앵콜 무대에 올라왔다.


이번 공연에서 임현정은 총 8곡의 앵콜곡을 연이어 연주했다. 라흐마니노프가 두 곡, 라벨이 한 곡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풀랑이 두 곡, 바흐와 드뷔시가 각각 한 곡이었고 아리랑 변주곡까지 연주했다. (순서는 각각 바흐 피아노 협주곡 5번 2악장,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풀랑 즉흥곡 바장조, 드뷔시 비오는 날의 정원, 라흐마니노프 에튀드 Op.39-5, 풀랑 즉흥곡 다장조, 임현정의 아리랑 변주곡, 라벨 라 발스였다.)


그 중에서도 내심 고대했던 라흐마니노프와 라벨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공통적인 것은, 라흐마니노프도 라벨도 모두 임현정의 개성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연주였다는 것이다. 임현정과 정말 잘 어울리는 선곡이었고 그래서 더 자유로워보였다. 라흐마니노프의 광시곡은 조금 더 템포를 늦춰서 연주했어도 좋았을 것 같았다.


라벨의 라 발스의 경우는, 라벨 작품 중에서도 여러 연주자들의 연주를 두루 들어봤던 곡이라 더욱 더 재미있게 들었다. 개인적인 취향에 가장 부합하는 연주는 조성진의 라 발스였는데, 익숙하게 듣던 연주와는 또 다른 포인트들을 임현정이 살리는 게 유독 귀에 꽂혔다. 그래서 굉장히 흥미롭게 들었다. 다만 라 발스의 최고 절정부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터져나오지는 않아서 그게 아쉬웠다. 오히려 2년 전 공연의 본 무대에 포함되어 있었던 라벨의 거울은 정말 임현정과 찰떡궁합이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풍성했다. 정말 원없이 들은 앵콜 무대였다.


*


개인적으로 2월은 한 달동안 정말 시달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 가뭄 같았던 나에게 임현정의 연주는 간만에 만난 단비 같았다. 임현정의 바흐도, 임현정의 베토벤도 정말 즐겁게 들었다. 바흐 때문에 즐겁기도 했고, 베토벤 때문에 흥미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임현정이었기 때문에 그 즐거움과 흥미로움이 배가되었던 것 같다. 임현정은 언제나 자신만의 색깔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연주자니까.


이 다음에는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그 때에는 또 어떤 레퍼토리를 들려줄까.

2년 전 그 때의 슈만, 브람스, 라벨, 프랑크 같은 낭만주의가 주를 이루는 레퍼토리로 꾸며줄까.

아니면 이번처럼 바로크와 고전을 아우르는 프로그램들을 들려줄까.

어느 쪽이든 임현정의 연주라면 또 다른 즐거움으로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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