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의 시작과 끝, 맛과 소리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와 <중경삼림> [영화]

글 입력 2019.03.01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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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제목에도 들어간 블루베리. 블루베리는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카페에서 블루베리 파이는 그렇게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는 사장 제레미의 말 때문이었다. 오기처럼 엘리자베스가 맛 보겠다고 하기 전까지 그 파이는 만들어진 그대로 아무 때도 묻지 않은 채 쓰레기통과 만나야 할 뻔 했다. 블루베리가 그런 존재로 나온다.

왜 블루베리 파이가 그렇게나 인기가 없는걸까. 영화에선 우리 블루베리 파이 잘못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다른 것들을 고르다 보니 이렇게 덩그라니 남는다고 답한다. 글쎄, 나에게 묻는다면 답은 블루베리의 짙은 보랏빛 색깔, 맛, 파이로 만들어졌을 때도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적이진 않고 취향을 타니까. 관심을 가질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다음에 먹어보지 하면서 넘기는 것들은 결국 처음 마음을 빼앗는 것들은 아니다. 장사란 마음을 사야하고 블루베리는 그들의 마음을 사지 못하니 제레미는 어쩌면 블루베리 파이를 메뉴에서 뺄지 고민해야 할 수도 있다. 다행히 매일 블루베리 파이는 메뉴판에도 진열대에도 나와 있다.

색깔. 빨강과 파랑을 섞어야만 만들어지는 보라색. 그래서인지 아름답긴 하지만 소화하기 힘들다는 부담이 가는 색. 멀리서 지켜보기 좋은 색이다. 팬톤에서 올 해의 색깔로 뽑지 않으면 보라색의 옷은 눈에 자주 띄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입어서 알게 되지 않고는 도전하지 못할 법한 색. 무난한 파랑색 계열과 아예 기분 전환을 내는 빨간색과도 보라색은 다르다. 달콤한 딸기는 늘 사랑받지만 시금털털한 블루베리는 2순위로 밀린다. 수없이 많은 케이크와 타르트가 진열되어 있지만 고전적인 스테디셀러도 아니다. 딸기와 크림치즈가 섞인 딸기 타르트, 치즈케이크, 티라미수, 하다 못해 자몽이나 청포도 타르트에게도 밀려버릴 만하다. 인기도 없는 바에 가격도 저렴한 편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블루베리 파이를 파는 카페를 별로 본 적이 없다. 건강을 위해 요거트 스무디로 파는 건 조금 봤지만. 다른 과일처럼 달콤하지도, 느끼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으니까. 그러게, 사람들이, 우리가, 블루베리에겐 좀 야박한 것도 같다. 막상 우리의 현실은 블루베리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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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모두 본 건 아니지만 유독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중경삼림>이 많이 떠올랐다. 같은 감독이 만들어서겠지만 공통점이 멈칫하면서 느껴졌다. 고급진 음식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영화에서 음식이 빠지지 않는 것도, 음악이 귀를 사로잡는 것도. 무심하게 던진 독백으로 나오는 대사가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마음이 움찔하기도 하는 것도. 느릿하게 장면을 잡아 여운을 주는 것도. 여자 주인공이 노래를 잘하는 것도. 대사가 많지도 않고 확실히 촘촘하지는 않다.

영화의 호불호가 갈리는 건 아마 짜임새에 있을 것이다. 퍼즐이나 큐브처럼 빽빽하게 설명하거나 맞물리는 스릴은 없다. 뜬금없는 경우가 많다. 시간을 할애했다면 이해가 됐을 법한 부분을 영화에선 뭉터기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치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영화는 꿈처럼 갑자기 시작되고 이성보다는 감성을 따라서 움직인다. 이야기 역시 소설보다는 시에 가까울 것이다. 소설에 비유한다 해도 단편이고 설명은 별로 없을테니 추리소설 같은 걸 좋아한다면 도통 좋아할 수가 없을 것이다. 분위기가 다 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은 영화다. <중경삼림>을 보면 홍콩이 아름다워 보이고,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보면 미국도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빈틈이 보이고 불편해지는 순간 분위기가 깨져버릴 수 있다. 그건 당연히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영화도 꽤나 블루베리 파이 같다. 그래도 조금 다른 건 왕가위 감독이 만든 블루베리 파이는 그렇게 인기가 없지는 않다. 아무도 손대지 않아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블루베리를 좋아한다. 남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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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인 파인애플 통조림 쟁여두고 먹기


<중경삼림>을 요약해볼까.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세 사람이 나온다. 첫 번째, 여자친구 메이와 헤어지고선 그녀를 잊지 못해 그녀와 헤어진 지 1달, 5월 1일인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고 먹어치우는 경찰 223. 곱상한 이 남자는 이상한 버릇이 참 많다. 일단 그 많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먹었다는 데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223이 유통기한보다 긴 소비기한이 있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어쩌면 통조림을 더 많이 먹었을 수도 있겠더라. 이별은 파인애플 많이 먹기 기네스 신기록을 눈앞에 두게 한다. 눈물이 날 것 같으면 조깅을 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여자친구 가족에게도 안부 전화를 걸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알던 여자들에게도 뜬금없이 전화를 거는 뻔뻔함도 있다. 술집에 처음 들어온 여자와 사랑하겠다면서 구질구질하게 파인애플 좋아하냐면서 헤어진 티를 팍팍 내며 귀찮게 군다. 둘은 같이 호텔방에서 밤을 보내는데 방에서 미친듯이 음식을 시켜 먹지만 여자가 잘 잘 수 있도록 건드리지 않고 구두도 잘 모셔주는 건전한 모습도 있다. 덕분에 잘 숙면한 그 여자는 마침 5월 1일이 생일이라는 이상한 남자의 말을 기억하곤 생일을 축하한다며 훈훈한 마무리. 간만에 그에게 연락이란게 왔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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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장애의 패션화(선글라스*레인코트)


두 번째, 금발로 된 가발과 올리브색 레인코트, 선글라스를 낀 채 마약 밀수를 돕다가 실패하고 기한이 다가오자 그 일을 맡긴 남자를 죽이는 여자. 아마도 여자를 이 업계(?)에 들인 건 그 남자의 사랑을 가장한 유혹이었던 모양. 다른 여자 분도 같은 금발 가발을 쓰고 있다. 이 여자도 첫번째 남자 못지 않게 이상한 습관이 있다. 비가 올지 해가 날지 몰라서 레인코트와 선글라스를 동시 착용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결정장애를 패션화했는데 제법 잘 어울린다. 무척이나 프로같아 보이지만 마약밀수 브로커 치고는 좀 허술한 것 같기도. 아, 그리고 이 분이 첫번째 이상한 습관을 두루 갖춘 남자와 술을 마셨던 그 분이다. 센 언니 같지만 생일축하 정도는 해드립니다. 가발과는 이제 이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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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스튜어디스인 전 여자친구를 잊지 못하는 경찰 663과 그의 집에 몰래 무단침입해서 집안을 슬그머니 바꿔두는 단골 패스트푸드점 점원 페이. 눈빛과 목소리가 멋진 이 남자는 둔해빠져서 집안에 뭐가 바뀌었는지도 잘 모른다.(업무시간에 관찰력을 다 썼다고 생각하는게 마음이 편하겠다) 가게에 들어설 때는 멋지지만 늘 샐러드만 시킨다. 배가 고플 것 같은데 말이야. 여자친구 취향이었나 보다. 집에서는 수건, 인형, 비누 같은 물건을 인격화해서 대화 같은 잔소리를 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태산이 높다 하되 오지랖이 더 한 페이는 전 여친이 남기고 간 663의 집 열쇠로 마구 드나든다. 샐러드 말고 핫도그나 피자도 추천할 줄 아는 점원이다. 사장님께는 다른 일 하러 간다고 거짓말도 천연덕스럽게 한다.처음엔 청소만 해줄 땐 우렁각시 같았는데 물건도 막 바꿔놓고 옷도 바꿔놓고 자기 사진 가져다 놓을 땐 좀 소름돋는다. (마음이 편하려면 집은 비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하자. 그래야만 한다.) 훗날 페이를 자신의 집에서 발견까지 했고 어영부영 집이 물바다가 됐는데도 화를 내기는 커녕 663은 페이가 좋아진 모양이다. 그 쯤 그녀는 홀연히 떠나 스튜어디스가 되어 돌아 왔다. 그의 전 여자친구 역시 스튜어디스였는데 그걸 조금은 의식한 진로일까. 663은 경찰 대신 가게를 인수했다. 썸이라기엔 유효기간이 꽤 지난듯 하지만 그 시간에도 불구하고 둘은 여전히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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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그보다는 덜 이상한 사람들이 나온다. 첫번째, 바람피운 전남친을 찾으러 왔던 엘리자베스. 당사자에겐 제대로 뭐라 말도 못하고 애꿎은 식당 주인 제레미에게 찾아가 친분을 다진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중경삼림>의 경찰 223씨나 경찰 663씨 못지 않다. 대면할 자신은 없고 자신의 마음 아파하며 기다리는 친구들이다. 이별은 홍콩에선 파인애플 통조림을, 미국에선 버려지기 직전인 아련한 블루베리 파이를 먹게 만들었다. 통조림은 질리지만 블루베리 파이는 수제라 그런지 내처 좋아하게 되었다는 게 차이.

전 남자친구에게 줄 열쇠를 맡기고선 홀연히 차를 살거라면서 미국 여기저기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번다. 사실은 남친을 잊으려고 바쁘게 살았던 모양이지만. 이상한 면이라면 블루베리 파이를 먹다가 살짝 묻히고 엎드려 자는 것, 큰 돈을 잘 거는 면. 아이스크림과 파이, 블루베리가 흐르는 그 장면이 왜 들어갔나 생각해봤더니 그게 그녀의 입술에 묻는 블루베리 파이 맛이었겠더라. 몰래 뽀뽀를 했다고 생각한 제레미도, 엘리자베스도 똑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배짱 좋은 도박쟁이 레슬리에게 영혼을 갈아넣은 돈을 맡길 줄 아는 통큰 모습도 가지고 있다.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라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 2200달러를 빌려주다니 그거야 말로 도박이다. 제레미씨에겐 엽서로 근황을 업데이트했고 차를 결국 사서 1년만에 돌아왔다. 아주 불편해보이지만 아름다운 키스신을 선보인다. <중경삼림>처럼 커플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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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골목식당에 나올법한 동네 맛집 사장 제레미. 블루베리 파이만 고대로 남았다는 얘기를 마침 실연한 엘리자베스에게 하는 걸 보니 그거 빼곤 다 잘나간다고 보면 된다. 그런 사연있는 이야기로 엘리자베스가 블루베리 파이를 먹게 만들었으니 의도는 모르겠지만 현명한 사업가다. 전 여자친구 파트야와 이름하야 '열쇠론' 대화를 나누고선 헤어진 사람들이 남긴 열쇠를 고이고이 담아두는 버릇이 있다. 열쇠가 있어야 그 문을 딸 수 있지 않겠냐면서. 맡기고 간 열쇠를 버릴지 말지를 자신이 선택할 수는 없다고.

원래는 마라톤 주자로 미국 전역을 돌겠다는 꿈이 있었는데 떠나간 그녀가 헷갈리지 않게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한 자리에서 식당을 하는 순정파. 엘리자베스의 엽서 근황에 감명을 받고 같은 이름을 가진 90개의 식당에 전화를 하는 단순무모하지만 열정적인 모습도 있다. 그런 걸 보면 경찰223같은 구석이 있다. 이상한 버릇은 CCTV가 일기장같다면서 컬렉션을 만드는 점. 내 가게에서 일어난 걸 보니 사생활 침해는 아니지만 찜찜한 구석이 있다. 기다리던 전 여자친구가 뜬금없이 찾아와 '열쇠론' 대화를 마무리한다. 열쇠가 있어도 문이 꼭 열리는 게 아니라고, 문이 열려도 기다리는 사람이 꼭 있는 건 아니라고. 블루베이 파이를 묻힌 그녀를 깨끗하게 해주는 방법으로 뽀뽀를 하는 점도 독특하다. 처음엔 몰래 하더니 엔딩에서는 대놓고 하신다. 목 결리지 않게 조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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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커플. 경찰 어니와 아내였던 수 린. 엘리자베스가 차 살 돈을 버느라 아침엔 식당, 저녁엔 술집에서 일하다가 만난 커플이다. 어니는 바람난 아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알콜 중독이다. 엘리자베스가 '의지' 운운하자 알콜 중독 모임에서 90일 동안 금주해서 얻은 칩과 술을 마셨을 때 받은 칩을 또 보여준다. 내가 의지가 없었으면 90일을 참고, 모임에 꾸준히 나갔겠지 하는 말이 숨겨진 것처럼. 의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몸이 따로 노는 건 인정해야할 부분. 알고 보면 술이 그녀와의 사랑에서 큰 부분을 차지기 떄문에 단순한 중독자로만 볼 순 없다.

수 린은 바람난 아내라 욕하고 싶지만 집착하는 남편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제대로 바람 피우는 스타일도 아닌 모양. '사랑과 전쟁'처럼 날 버리고 가면 널 총으로 쏘겠다는 어니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아내가 그를 떠나자, 그는 사고처럼 목숨을 저버리고 만다. 자살이라 봐야겠다. 그가 죽어야만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가 죽어버리니 너무 고통스럽다는 그녀.

술은 그들에게 사랑의 촉매였다. 음주운전으로 걸린 아내와 그걸 잡은 남편의 첫 만남. 술과 함께 불타오르던 사랑, 나중엔 술이 깨면 사랑이 식은 게 너무 확연하게 느껴지기까지. 염장지르듯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 그녀를 보고도 절절한 남편과,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며 떠나고서도 사실 그를 미워한 적은 없었다는 독한 감성의 커플. 제일 이상한 건 그들의 사랑 방식. 사소하게 이상한 건 경찰 어니의 술집 외상값이 상당하다는 것. 팁을 과하게 줄 돈으로 외상값을 갚았어야 한다. 수 린은 그 외상값을 결국 갚으며 어니의 영수증을 가게에 걸어달라고 한다. 좀 더 오래 기억했으면 해서. 그동안은 그를 떠나곤 싶었지 동네를 떠나고 싶진 않았던 모양. 자유를 찾고 싶었다면 오히려 다른 동네로 가서 새 시작을 하는 게 좋았을텐데. 지금에서야 그녀는 떠난다. 나고 자란 곳을 떠나는 두려움, 미워하진 않지만 누가 봐도 미워하는 것처럼 매몰차게 구는 점이 묘하다. 커플은 그렇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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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람의 심리를 잘 알고 포커의 달인이라고 자칭하는 '타짜' 레슬리. 아버지가 날 때부터 포커를 가르쳐서 그런지 잘 치는데 잘 치는 것 치곤 질 때도 좀 있다. 승승장구하더니 올인으로 잘 잃으신다. 이번엔 카지노에서 알바하고 있는 엘리자베스의 피같은 2200달러를 냉큼 꿔간다. 이기면 원금+ 이익 1/3, 지면 신형 재규어를 주겠다면서 설득을 성공했다. 대망의 포커를 하는데 이기고도 졌다고 거짓말한다. 혼자 가기가 외로웠다나. 이상한 점은 아버지가 포커로 딴 돈으로 따끈따끈하게 산 신형 재규어를 무단으로 훔친 것. 아버지도 위독하다는 핑계로 잘 불러서인지 어지간해선 위독하단 말을 믿지 않는다. 아버지따윈 상관없다면서 이번엔 정말 돌아가신 아버지를 두고 울어버린다. 가족 컴플렉스 및 신뢰의 문제라 하자. 엘리자베스와 '신뢰' 문제에서 입장이 확연히 다르다. 이 쪽 업계에선 사람을 믿으면 안되니 직업병일 수도 있고. 레슬리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사람을 잘 믿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고, 더불어 원하던 차도 몰 수 있게 됐다. 그 정도 배짱이면 공들여 모은 돈을 걸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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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어오는 중입니다(무서워마세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와 <중경삼림>. 법적으로 들어가자면 이상한 사람들이지만, 영화로, 그리고 사람으로만 생각하면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다. 사람들이 이상한 특성을 갖고 있어서인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중경삼림>이 더 생각난다면 그건 더 이상해서 강렬한 걸 수도 있다. 신기하지 않나. 파인애플 통조림과 특히 가택침입.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는 열쇠와 블루베리 파이정도만 기억나니까 상대적으로 약하긴 하다.

결국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같은 맥락이다. 그렇게 사랑이 오고 간다고. 몰래 스며든 변화를 알아차리면서 사랑이 시작되고, 붙잡으려 애를 써도 유통기한처럼 다가오는 이별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 영원한 사랑이란 걸 믿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죽을 것처럼 아픈 사랑도, 그리운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사라진다. 영원히 변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오히려 대단해 보일 정도로. 우리의 사랑은 누군가 찍어낸 것이 아니니 유통기한이 적혀 있던 적도 없고 동시에 유통기한을 알 수도 없다. 수많은 외로움이 영화처럼 조금은 짠하고 찡한 수많은 혼잣말을 남긴다. 진심이었겠지만 나의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이 지속되는 시간 역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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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 다 알면서도 오늘도,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사랑 혹은 이별의 유통기한을 걱정할 것이다. 사랑과 이별은 여기서 하나다. 시작과 끝이니까. 이별의 아픔이 이대로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아 또 걱정할 것이며 혹은 그 아픔으로 겁이 나서 다른 누군가를 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사람을 뒤흔들 수 있으니 무섭고 매혹적이면서도 포근하겠지. 사랑은 비우게 한다. 나를 비우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끼게 하니까. 내가 비어도 괜찮다. 상대방이 또 그렇게 스며들고 사랑으로 나를 채워줄테니까. 물론 완벽하게 나를 채워주는 건 기대하기 어렵지만. 이별을 할 때쯤에야 상대를 담느라 비워놓은 내 빈 공간을 알아차려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를 아무리 비웠다고 해도 내가 영영 없어진 것은 아니다. 나는 여기, 이 자리에 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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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블루베리 파이( with 아이스크림)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중경삼림>에 비해 돋보이는 건 이별에 대해 더 솔직한 설명을 자세히 해준다는 것이다. 블루베리 파이나 열쇠가 꼭 기억나지 않아도 여기서는 대사가 기억난다. 때로는 이별이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그저 다른 것들에 밀려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이라는 말.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탓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거라지 않나.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고. 아픔이 가시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어리석거나 잘못해서는 아니라고.

'열쇠론' 역시 마찬가지다. 가택침입의 얌전한 버전이라고 같다. 열쇠가 있다고 떠난 사람이 돌아올지는 알 수가 없다. 남기는 건 나의 마음이다. 잊지 않고 있으니 돌아와 달라고. 막상 기다리던 이가 돌아왔을 때 그 열쇠를 열었을 때 어떤 마음일지는 알 수 없다. 원망스러울 수도, 행복할 수도, 아무 느낌 없어서 당황스러울 수도. 그렇게 한 자리에서 기다린 제레미의 마음이 그녀를 늘 기다린 게 아니라는 걸 보지 않았나. 그제서야 그들은 공식적으로 이별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석양처럼 떠났을 땐 말할 수 없었던 이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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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나 제레미, 수많은 이가 남긴 열쇠, 어니의 빼지 않은 결혼반지, 수 린이 부탁한 어니의 영수증, 아버지의 유품인 재규어, 이제는 아마 엘리자베스와 제레미에게 기억으로 남을 블루베리 파이까지, 상대방을 기억할 것이 남아있든 그렇지 않든 생각보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오래 기억하고 싶다면 계속 곁에 두는 더 좋겠지만 기억은 우리의 마음에 가장 깊게 남아있다. 언제 어디에서든 그 기억을 불러올 수 있다. 블루베리 파이를 보면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떠올리고, 파인애플 통조림 혹은 샐러드를 떠올리면 <중경삼림>이 떠오를 수 있듯이 맛과 소리가 입과 귀에 맴돌 것이다. 사랑이 아프고도 다행스러운 건 시작되고 끝나더라도 그 기억을 지워가진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아예 그 곳에만 멈춰있지도 않으면서. 블루베리처럼 어둡고 푸른 밤, 중경삼림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빌딩 근처마다 사람이 지나가고, 사랑도 오가고, 기억은 남을 것이다.






* 다양한 음식이 나와서 기억에 남는다. 우리도 모르게 그 사람을 뭘 좋아해, 하면서 기억하게 만든다. 막상 그들은 허전한 마음으로 그걸 찾았을지도 모르지만.

* , <몽중인>, 처럼 수록된 노래 때문에 또 기억에 오래 남는다. 눈보다 귀가 오래 남는 걸 알고 있는 걸까. 영화를 모르고 들을 땐 그냥 좋은 노래였는데, 이젠 노래를 들으면 영화 생각이 난다.

* 주드 로가 바람둥이로 나오는 <알피>를 보고,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 순정파로 만나니 신기했다. 연기를 하는 노라 존스, 조금은 못된 여자로 나오는 레이첼 와이즈, 이름과 눈빛이 특이하고 마음이 아팠던 역의 데이빗 스트라탄. 그 와중에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나오는 나탈리 포트만.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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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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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즌
    • 왕가위 감독은 노래를 반복해서 계속 삽입하는 걸로 유명하죠 ㅎㅎㅎ 그래서 노래를 생각하면 영화가, 영화룰 생각하면 노래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거 같아요! 아직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못 봤는데 보고 싶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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