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나는 사실

글 입력 2019.03.01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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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 모여 있으면 벽에 곰팡이 필 거 같음;”


어느 날, 친한 동생이 뜬금없이 저런 말을 내뱉었다. 나는 모르는 척 눈을 휘둥그레 뜨고 누굴 두고 그렇게 말하냐는 듯 쳐다봤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누나 친구들” 


감히 그런 말을 내뱉다니. 괘씸한 마음이 들어 분이 풀릴 때까지 친한 동생을 갈궜지만, 그 말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 부인할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셋’은 나를 포함하여 나의 친구들이자 나의 대학 동기들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내뱉은 그 동생도 대학 동기다. 차이점이라면 그는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학과를 사랑하고 높은 목표를 세우는 한편, 우리는 그런 그에게 학과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열변을 토하고, 자기비하와 함께 목표를 가지는 게 두렵다고 징징거린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대기업을 갈 것이라고 확신하는 반면 우리 셋은 지금이라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매일을 벌벌 떨고 있다는 것이다. 정작 수행능력이나 성적이 뒤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가 말한 ‘곰팡이가 필 거 같은 셋’의 단톡방은 매일 카톡 알람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을 다름 아닌 '망했다'다. 물론 정말로 그런 상황을 맞이해서 내뱉는 걸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냥 내뱉는 말이다. 누구 한명이 뜬금없이 '아 인생 망함' 이러면 자연스럽게 다른 친구들도 '너도? 나도' 를 보낸다. 그 뒤를 이어 또다시 우울하게 시작되는 남과의 비교, 자기 능력의 한계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들. 결국은 유머로 승화하여 'ㅋㅋㅋㅋㅋㅋㅋ' 이 남발되면서 끝나긴 하지만 어느새 형성된 인생패배자 같은 찐따 분위기는 찝찝하게 남아있다.


대학교 입학 처음부터 오티를 가지 않고, 술자리에 가지 않아 친해지게 된 우리 셋은 비관적이다. 우리는 항상 사회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먼저 보고, 열정적인 누군가를 보고 그 열정에 고무되기 보다는 그 열정을 부담스러워한다. 누가 뭘 한다고 하면 격려보다는 걱정을, 좋은 결과보다는 부정적인 결과를 먼저 예상한다.


“어차피 우린 안 돼!”


이 말을 너무나도 쉽게 외치는 우리기에, 긍정적이고 이상적인 그 동생이 보기에는 정말로 우리 셋이 벽에 곰팡이가 필 정도로 암울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슬쩍 ‘비관적인 인간’에서 벗어나볼까 싶다.




ART insight가 가져다 준 것들



어렸을 때 일기장을 보면, 내가 사람과 세상에 대해 무척이나 낙관적이었다는 것이 보인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노력해서 좋아하게 만들자고 생각했고, 시련을 겪고 있으면  그 시련이 나를 성장시켜주는 발판이 될 거라고, 무너지지 말자고 생각했다. 또한, 무척이나 감성적이기도 했다. 당시 내가 느끼고 있던 감정들을 하나의 시로 써보고, 그림을 그리곤 했다. 좋은 소재가 생각이 나면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감추지 않고 자랑스럽게 친구들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감성적인 글 아래에 ‘오글거리다’라는 표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는 글 아래에 ‘현실파악 못 한다’라는 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랑스럽게 여겨졌던 나의 생각과 표현들이 상대로 하여금 떨떠름한 표정을 짓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세상물정모르는 철 안든 어린애 마냥 바라보는 시선이 은근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잘 모르긴 했지만, 어찌됐든 그런 시선은 불쾌했다. 게다가 마냥 세상이 아름다운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생각 없이 ‘잘 될 거야! 너도 나도!’를 외치며 헤헤거렸던 게 바보 같았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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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글거리는 사람’ ‘현실파악 못하는 사람’이 되기 싫었다. 최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자 했고, 사람과 거리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감정과 표현을 드러내는 것도 부끄럽게 느껴졌다. 내가 느낀 것들을 과감 없이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어차피 아무에게도 못 보여준다고 생각을 하니 전처럼 글쓰기에 대한 열정도 사라져갔다. 오로지 과제와 시험을 위해서만 글을 쓰곤 했다.


그러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하게 된 것이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활동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예전에 작품을 보고 항상 길게 줄줄 감상평을 남기고, 글쓰기에도 꽤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말이지 시도 때도 없이 글이 막히고 엉망이 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처음 에디터 지원할 때 많은 의미가 담긴 작품이 ‘재밌다’ 혹은 ‘재미없다’ 한마디로 정리되어버리는 게 아쉽다고 지원서에 썼는데, 정작 평소에 내가 어떤 작품이더라도 ‘존잼’ ‘노잼’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차피 혼자만 보는 글을 쓰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이 되어 점차 글을 안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모순점에 스스로 머쓱하기도 했고, 느낀 것들을 논리정연하게 글로 옮기는 작업이 낯설게 느껴지니, 여러모로 에디터 활동이 좀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나는 아트인사이트 활동을 이어가기로 했다. 글쓰기가 힘겨운 점도 많았지만, 아트인사이트 활동을 통해서 얻은 기쁨이 더 컸기 때문이다. 나는 한 작품에서 강렬하게 추동되는 무언가를 받는다면, 그 작품이 나의 어떠한 지점과 연결이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재개봉한 영화 <헤드윅>을 보기위해 상영관에 들어갔을 때의 나와,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에서 나왔을 때의 내가 확실하게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헤드윅>을 통해 나의 정체성에 관해 혼란스러웠던 지점들을 살피게 되고, 위로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낯설게 느껴졌던 ‘성소수자’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기회까지. 그러나 이를 남기지 않으면 그것은 일시적으로만 남을 뿐이다. 내가 어떤 부분을 보고 내가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는 잊히게 된다. 그래서 <헤드윅>은 그저 ‘감동적인 영화’에 한마디에 불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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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헤드윅>


그런데 아트인사이트 활동은 글을 쓰기 위해 강렬하지만 추상적으로 나에게 던져진 ‘무언가’들이 무엇인지 파고들어 구체화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구체화시킨다는 것은 결국 ‘나’를 뒤돌아보게 하고 ‘나’의 이야기를 꺼내게 만든다. 이를 통해 작품을 심도 깊게 이해하게 될 뿐만 아니라. 작품과 내가 연결됨을 느끼고 좀 더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오는 기쁨이 상당했다. ‘아트인사이트’는 감추기 급급했던 ‘나’를 조금이나마 솔직하게 드러내게 만들어 준 것이다.
 

또한, 아트인사이트 활동을 통해서 문화예술과 좀 더 가까워지면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문화예술은 사람과 삶에 대해 말한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인간과 삶의 다양한 면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준다. 종종 삶의 온갖 내밀한 어둠을 끌어온 듯 고통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결국은 사람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사람과 삶은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작품들을 보고, 알아가고, 글로 남길수록 사람과 삶이, 나 자신이 좋아지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위로들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글을 쓰는 활동은 감성을 더욱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참 작품의 여운에 빠져나오지 못할 때, 나는 굉장히 일상적인 것들에서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는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한참 한강작가의 작품들에 빠졌을 때, 만들어진 모든 것, 사람을 맹목적으로 빠지게 만들 수밖에 없는 신념과 같은 것에 회의감을 심하게 느낀 적이 있다. 이는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마치 아주 어렸을 적, 무엇도 자리잡히지 않았을 때로 돌아가는 듯 만드는 그런 현상들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1. 나는 시력이 굉장히 나쁘다. 병원가서 시력을 재봤더니 '-12'라고 했다. 렌즈를 빼거나 안경을 벗으면 매우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이목구비조차 안 보일 정도이다. 그저 아 사람이구나 알아차릴 정도. 그러다 한번, 어두운 밤에 렌즈 낀 눈이 아파서 맨 눈으로 거리를 걸은 적이 있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광경이 흐릿했다. 보이는 모든 사물들과 모든 사람들이 형체없이 형형색색의 빛만을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세상이 모든 균형을 잃고 무너진 것처럼 무질서해보이는 그런 세계. 아무것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 무엇도 알아볼 수가 없기에 모든 것에서 벗어난 느낌. 이상하게도 나는 거기서 위로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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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욕을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온수를 맞는다. 화장실 안의 냉기가 몸에 부딪힐 겨를도 없이 오랫동안 샤워기를 틀어놓았다. 멍하니 서있다가, 욕조에 앉기도 하다가, 쭈그러 앉기도 했다. 쭈그러 앉아 화장실 바닥을 보자, 화장실 바닥 틈에는 물때가 잔뜩 껴있었고, 하수구 틀에는 머리카락들이 엉키고 설켜 끼어있었다. 평소같으면 더럽다며 인상을 찌푸리며 얼른 청소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냥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어렸을 적, 화장실 바닥에 누워 따듯한 물을 틀고 하염없이 그 물을 맞곤 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저  바닥의 서늘하고 딱딱한 촉감과 그 위로 몸을 적시는 따뜻한 물의 온도차가 기분이 좋았던 거 같다. 크면서 그런 행위는 더이상 하지 않았는데, 왜인지 그때의 그 기분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졌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지만,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내가 한참이나 머물 수 있는 오로지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어렸을 적의 행위를 다시 해보는 것은 왜인지 안정감과 함께 위로를 느끼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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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삶에 반영이 되면, 세상의 모든 풍경은 낯설어 보인다.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하며, 그 안에서 위로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런 예술을 계속 접하면 감성은 어쩔 수 없이 부풀러진다.  사람과 삶에서 계속 아름다운 면들을 찾아내려고 한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고 좌절만 안겨주어도, 그럼에도 나아가는 사람이 되게 해준다. 이제는 더이상 '오글거린다'라는 말로 감수성을 감추고 싶지 않다. 비관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 항상 글로는 나 자신과 삶을 사랑하자고 해놓고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괴리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 나는 사실 마음껏 사람과 삶을 사랑하고, 표현하고 싶다.


[김량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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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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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바다녹색고양이곰
    • 여러모로 공감도 가고 흡입력 있는 글이에요 :) 잘 읽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아트인사이트 16기로 처음 활동하게된 사람인데, 이 글을 보니깐 앞으로의 활동이 정말 기대가 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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