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머니는 대지(大地)라는 위로에 대한 반박 [도서]

글 입력 2019.03.02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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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와 어머니


대자연 속 넓고 큰 땅을 이르는 대지는 종종 어머니에 비유되곤 한다. 거센 풍파가 닥쳐도, 그 어떤 재해가 일어나도 모두 넓은 품으로 포용한다는 점이 사회가 요구하는 자비로운 어머니상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말 역시 가부장적 가치관이 아닌 남자와 여자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상생하는 관계에 놓여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구색을 맞춘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기존의 전형적인 여성상을 요구하는 랑그(langue)에 불과함에 틀림없다.

여성을 대지에 준하는 존재로 ‘숭배’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대상화에서 기인한 인습이기 때문에 ‘존중’으로 읽히기 어렵다. 오히려 성 역할에 맞는 규범과 의무를 부과하며 부담을 가중시키는 가부장제 사회구조를 그대로 답습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여성에게는 모든 존재를 인자하게 안아줘야 하는 의무가 없다. 언제든 거절할 수 있고, 저항할 수 있다. 자연이 인간에게 그럴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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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눈으로 새로운 가치를 읽어내고 여성의 언어로 풀어내는 문화 잡지 《우먼카인드》는 이번 6호에서 역사상 여섯 번째 대멸종의 위기를 맞은 ‘지구’를 주제 삼아 소설과 인터뷰 등 다양한 콘텐츠로 독자와 만난다. 개인에서 개인이 살고 있는 지구로, 더 나아가 지구를 품는 우주로 차례차례 확장되는 주제의 구성은 일관되게 ‘환경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논한다. 주체로서 스스로 약동하는 지구의 자연적 변화를 무시한 채 인간이 주도한 변화는 결국 지구가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설을 체감하게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행성의 환경을 변화시킬 요량으로 우주 개척을 준비하고 있는 인간의 이기주의가 얼마나 가부장적이며 폭력적인 것인지 지적한다.


"지구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할 거야. 필요하다면 인간을 모조리 쓸어내고 새로 시작할 수도 있겠지."

"난 이미 지구의 선택으로 사라진 문명이 몇 개 있을 걸로 생각해."

「이게 바로 지구야」, 재클린 윈스피어


때문에 이번 호에 관련하여 ‘에코 페미니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해방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을 접목시킨 에코 페미니즘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주장하며 자연과 여성의 파괴 주체가 모두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지배적 문화로 서로 공통됨을 역설한다. 자연과 여성은 타인에 의해 동일화되어 신성시되고 추앙되지만 동시에 대상화되며 유용성을 기반으로 한 역할 수행이 강제된다. 여성과 남성, 자연과 인간 간의 이분법적 계급 구조를 근본부터 파기하여 다자화를 추구하는 에코 페미니즘은 대지에 여성을 빗대는 가부장적 위안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비인간적 인간이 만들어낸 인류세


초파리나 모기 등 평소에 미물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벌레들의 일러스트가 지면 곳곳에 그려져 있는 것이 괄목할 만한 부분이다. 호주판 《우먼카인드》 편집장인 안토니아 케이스는 머리말에서 초파리와 인간의 유사성에 대해 언급하는데, 초파리든 인간이든 모두 ‘궤도를 도는 이 커다란 행성에 매여 있다는 사실’이 갖는 힘을 강조한다. 초파리는 미물이 아니라는 것, 여성은 사회라는 기계를 이루는 부품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말이다. 커다랗게, 반복적으로 그려 넣어진 벌레 일러스트들은 그들이 인간의 통제 속에 있는 타자가 아닌 인간과 ‘지구라는 우주선’에 함께 탑승한 동등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환경 파괴에 따른 빈곤에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보통 사회에서 소외되고 연약한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 강인함과 인내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역시 여성들이었다.”

「인류세를 살아가는 나의 여정」, 가이아 빈스

인류세라는 생소한 개념이 등장하는데, 인간이 이익을 위해 생태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초래한 새로운 양상의 지구를 이르는 이 개념을 통해 환경 기자 가이아 빈스는 야생을 재구성하기 위해 도리어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의 추악한 모순을 지적한다. 인위적인 계급 구조를 재생산하며 자연을 타자화하는 인류의 악습은 악화되면 악화됐지 나아지지 않는다. ‘동물은 원래 먹으라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런 역할은 누가 정한 것인가? 인간과 동물의 역할을 간편하게 분리하며 인간의 권리를 규정하면서도 동물들이 잔인하게 학대되고 도축 당하는 모습은 ‘비인간적인’ 행위라며 비판받는다. 과연 그럴까? 인류세는 비인간적인 행위가 아니라 한없이 ‘인간적인’ 행위가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지구를 초월하는 여성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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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역할을 마음대로 규정하고 틀에 맞추는 가부장적 사고방식 역시 인간이 인위적으로 자연적 생태계를 재구성하여 만들어낸 인류세의 한 양상이다. 여성은 자연이 인간에게 받는 취급 그 비슷한 것을 일평생 경험한다. 따라서 환경 이슈에 능숙하게 공감할 가능성을 풍부하게 갖는다. 《우먼카인드》는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매일의 실천」 섹션을 통해 생활 속 작은 부분에서 실천하는 여성들을 소개한다. 면 생리대, 출퇴근 보행, 휴지 대신 손수건, 종이컵 대신 텀블러…. 단순히 자연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닌 ‘공생’하기 위한 실천이다. 인류세 지구에 침투한 오염 물질들을 단호하게 배제하는 이들의 실천은 운동이며 개혁이다. 포용을 넘어 무비판적 수용을 강제하는 대지-여성상과는 한참 거리가 먼, 용기 있고 강인한 모습이다.

《우먼카인드》는 또한 인터뷰를 통해 우주와 천문학에 대해 공부하고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소개한다. 천체 망원경을 연구 중인 물리학자 리사 하비스미스, 우주비행사 제니퍼 시디, 인공위성을 만드는 물리학자 황정아 박사가 그 예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유능하게 빛나고 있는 그들이 위대하게 남기고 있는 족적은 얼마나 많은 유능한 여성들이 유리천장 사회에서 배격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당연이 이 또한 인류세의 양상이다. 여성의 능력을 생태계에서 지워 버리는 인류세는 지구와 자연의 본질을 파악하고 우주로 나아갈 가능성을 파괴시키며 후퇴를 야기한다. 이는 또 하나의 환경오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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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여성은 더는 인간 중심적인, 그리고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이 요구하는 대로 끌려가지 않음을 선포한다. 인간 그리고 가부장제라는 기득권이 만들어낸 인류세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법에서 벗어난 스스로의 가치를 목도하며 진보를 거듭한다는 점에서라면 대지와 여성은 무리 없이 서로 빗대어질 수 있다. 지구의 멸종이 후퇴가 아닌 진보이며 주체적 선택에 따른 발전일 수도 있다는 새로운 선언의 등장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보호가 아닌 공생이며, 자연 그리고 여성이라는 관념의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주체적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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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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