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서와, 피아노 리사이틀은 처음이었지? [공연]

임현정 피아노 리사이틀, 클래식 입문기
글 입력 2019.03.0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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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정 피아노 리사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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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임현정 피아노 리사이틀을 다녀왔다. 클래식 피아노 연주회는 난생처음이어서 모든 게 낯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뮤지컬, 콘서트와는 다른 클래식 연주회만의 규칙을 몸소 체험하고 돌아왔다.


클래식의 세계에 온 기분을 느낀 건 공연 좌석에 앉기도 전이었다. 공연에 관한 정보를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보기 위해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소책자를 찾아다녔다. 알고 봤더니, 소책자는 프로그램 북이었고 무료로 배포되는 것이 아닌 소정의 돈으로 줘야 가질 수 있는 상품이었다. 막연히 영화를 보기 전 들여다보는 포스터, 전시회에서 몇 권이고 무료로 가져갈 수 있는 아트북 정도로 생각했던 건 온전히 착각이었다. 이게 클래식 연주회의 당연한 일이라는 걸 나도, 같이 갔던 친구도 그때 처음 알았다. 이 작은 문화충격은 이후에 받게 될 낯섦 속 빙산의 일각이었다.


흑발의 생머리와 검고 긴 로브로 자신을 감싼 임현정은 등장부터 비범했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더니 피아노 앞에 앉았다. 내가 앉은 쪽에선 그의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었지만, 피아노를 치기 전 자신의 손을 소중히 감싸며 영혼을 불어넣는 듯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은 가히 성스러운 의식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드디어 시작했다.

 

넓은 홀에는 피아노 하나와 한 명의 사람뿐이었지만 무대가 꽉 찬 것 같았다. 곧이어 피아노 선율이 임현정의 손끝을 타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적막한 공기에서 흐르는 피아노 가락이 허공을 맴돌았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심장을 때리는 강렬한 드럼 비트, 신경 끝까지 짜릿해질 것 같은 신디사우저에 익숙해진 귀에 청량한 피아노 소리는 심심하게 들렸던 게 사실이다. 큰 홀에 비해 소리도 작은 데다가 옆사람의 기침 소리가 더 잘 들리니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사운드의 빈 곳이 어색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조금의 소음도 허락하지 않는 팽팽한 연주회장 분위기 때문에 긴장감을 달랠 길이 없었다. '이게 클래식 연주회인 걸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길 몇 분, 드디어 한 곡이 끝났고 다들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임현정이 바흐의 프렐류드와 푸가를 연주하면서 나의 긴장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선율이 어떤 곡인지 구분할 수 없으니 미리 공부해갔던 사전 지식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때부터 분석하길 포기하고 그의 연주가 전해주는 느낌을 주관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바흐의 곡이 연주될 땐 뱃속에서 몽글몽글한 기포가 굴러다니는 것 같았고 천장이 높디높은 거대한 교회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이 곡을 연주했을 바흐의 손끝과 그의 오르간 소리를 상상했다.


베토벤의 곡이 시작될 때는 귀가 먹어가는 비극적 운명을 어떤 감정으로 표현하고 연주했을지에 중점을 두었다. 때로는 비참하고 격렬한 고통의 소리처럼 느껴졌고, 조금은 체념한 듯한 잔잔한 소리에도 고뇌에 찬 비통함이 느껴졌다. 정말 그 곡이 슬프고 비극적인지, 베토벤의 심정이 그러했는지 알 수는 없다만, 임현정의 연주는 그러했다. 그의 피아노 소리와 몸짓은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벽 앞에서 작아지는 인간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그 안에서 희망을 찾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내게는 원망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마지막 건반을 누르는 순간까지 들리지 않던 그의 상체가, 떨어지지 않던 페달을 밟은 발이, 허공에서 멈춰버린 한쪽 팔이, 온몸으로 베토벤을 말하는 것 같았다. 건반에서 소리가 나지 않을 때까지, 소리가 끝이 나서도 마치 공기가 진동하는 것마저 연주인 것 같아 침도 삼킬 수 없었다.




클래식 연주회의 A to Z



아무리 프로그램 북이라 한들 내가 궁금했던 연주회의 모든 것을 알려주진 않더라. 1부가 끝났는데 나와 친구는 그 자리에 앉아서 영문도 몰라 주위만 둘러봤다. 하나 둘 가방을 싸서 밖으로 나가길래,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랬다. 사실은 쉬는 시간이었는데, 우리는 연주회가 끝난 줄 알았다. “생각보다 너무 짧은 거 아니냐?”, “그러게. 끝났다는 방송도 안 나오네?” 뭐, 이런 대화를 하면서 주섬주섬 짐을 챙겼는데 우리 주위에 있던 관객은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을지 아직도 창피하다.


클래식 연주회는 중간 쉬는 타임이 있고 그것을 인터미션(Intermission)이라고 프로그램 북에 표기되어 있다. 인터미션은 대략 20분 동안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입장 시간이 지나 들어오지 못한 관객이 입장하기도 하며, 남은 공연을 준비하는 단계이다. 연주 중간에 어떤 이도 움직이거나 입장, 퇴장하지 않는 것이 클래식 연주회의 기본적인 에티켓이기 때문에 인터미션이 중요하다.

 

그것뿐만 아니다. 음악과 음악 사이, 어떤 부분에서 박수를 쳐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눈치껏 주위 관객이 박수를 치면 ‘끝난 건가..?’하고 박수 칠 타이밍을 재는 것이다. 처음 박수를 칠 땐 이제야 음악회 관객 속에 융화된 것 같아 신이 나서 물개박수를 치기도 했다.


클래식 음악회의 앙코르란 가장 낯설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관객을 향해 인사를 하고 퇴장했다가 다시 입장하는 것을 커튼콜이라고 하고, 몇 번의 커튼콜이 이어지다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는 것이 바로 앙코르이다. 이 모든 게 아주 우아하고 성숙한 의식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고전 영화 속 고상한 사교파티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임현정의 연주는 딱딱한 관례에서 오는 허례의식을 느끼지 못할 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함축한 몸짓이었으니. 인터넷의 수많은 자료에 따르면 환호하며 박수치는 관객에게 감사의 표시로 앙코르 연주를 하는데 보통 그날의 연주곡과 관련있는 작품 중에 선택한다고 한다. 이 날, 임현정은 앙코르를 거진 다섯 곡이 넘게 했고 나는 그 수를 세다 포기했다. 이미 선곡된 프로그램과 맞먹을 정도로 많은 곡들을 연주하는 동안 곡명도, 작곡자의 정보도 하나 없지만 내게 들려오는 느낌 하나로 선율을 들었다.


피아노 하나를 두고 교감한 임현정과 나는 마지막 앙코르가 끝나자마자 관객과 함께 일어나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이 공연을 위해 노력한 임현정의 노고와 멋진 연주를 들려준 것에 대한 찬사, 수많은 앙코르로 성의를 표한 것에 대한 감사였다.


집에 가는 길에는 습관처럼 찾아 끼우는 이어폰을 끼우지 않았다. 아무것도 듣지 않으면 그 느낌이 더 오래 간직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임현정의 선율로 점철된 고막이 속세를 만나 오염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같이 간 친구도 그러했는지, 집에 도착해서는 내게 자신의 플레이리스트를 캡처한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둘 다 클래식과는 전혀 무관한 인생이었고 또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이 공연 이후로 클래식 공연을 자주 보러 다닐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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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특별한 기분은 임현정의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와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연주자가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관객들의 매너가 각각 몫을 했다. 그의 연주가 공중에 퍼지고 피부로 와닿을 때 이것이 음악이구나, 지금 우리는 소통하고 있구나, 를 체험하게 해준 임현정에게 다시 한번 찬사를 보낸다.



[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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