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껍데기는 가고, 사랑의 알맹이만 남다. [영화]

영화, 콜드 워
글 입력 2019.03.07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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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의 썸머가 설탕이고 라라랜드가 사카린이라면 여기, 사탕수수가 있다. 정제되지 않은 극한의 담백함은 오로지 사랑이라는 알맹이만을 남겨 놓았다. 이 세상 그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껍데기를 벗어던져 버린 알맹이는 불쾌하도록 아름답다.

     

영화는 나치즘의 상흔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폴란드 시골 한 귀퉁이에서 시작한다. 1952년, 마주르카라는 악단의 스타 줄라(요안나 쿨릭 분)와 지휘자인 빅토르(토마즈 코트 분)는 악단의 성공적인 첫 공연 이후 사랑에 빠지고 자유주의자인 빅토르는 폴란드 공산당의 감시를 피해 파리로 도망치자고 제안한다. 줄라는 약속 장소에 끝내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고 빅토르는 파리의 한 재즈클럽에서 피아니스트로 살아간다. 1955년, 빅토르를 잊지 못한 줄라는 이탈리아 남자와의 위장 결혼을 통해 파리에 오게 되고 둘은 다시 재회한다. 향긋한 사랑의 달콤함도 잠시, 서로에게 켜켜이 쌓인 불신의 먼지로 인해 줄라는 다시 폴란드로 돌아가고 빅토르는 그녀를 좇는다. 1959년, 밀입국 및 간첩 혐의로 빅토르는 수용소에 갇히고 줄라가 그를 면회하기 위해 찾아온다. 1964년, 공산당원과 결혼해 아이까지 가진 줄라는 빅토르를 수용소에서 꺼내는 데 성공하고 둘은 폐허가 된 교회에서 사랑을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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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 워>(2018)는 2015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이다>(2013)로 순식간에 젊은 거장의 반열에 오른 파베우 파블리코프스키의 차기작이다. <이다>와 마찬가지로 1.33:1의 Academy Format의 고풍스러운 흑백 화면을 통해 냉전 시대 가슴 절절한 사랑을 담백하게 표현한다. 부모님의 사랑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절대 끝나지 않는 재난의 관계'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인터뷰처럼, 줄라와 빅토르가 보여주는 사랑 이야기는 아름다운 재앙 그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냉전이라는 시대 상황이 낳은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를 기대한 사람에게 콜드 워의 불친절한 서사구조와 날 것과도 연출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름답게 포장된 사랑 이야기가 아닌, 껍데기를 벗어던진 사랑, 그 자체다. 그러니 영화가 그러한 것처럼, 관객도 모든 허례허식을 벗어던지고 오로지 진실한 태도로 영화를 바라보아야 한다.


<콜드 워>는 한 폭의 동양화처럼, 오로지 인물들의 꾸밈없는 감정에 집중하기 위해 여백을 사용한다. 동양화에서 여백은 서양의 공백이나 배경과는 달리, 특정 공간을 비워둠으로써 대상을 강조하고 관객의 마음을 확장한다. 역설적으로, 여백은 '채우기 위해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이다>로 제87회 아카데미 촬영상 후보에 올랐던 루카스 잘 감독은 정적인 카메라 워킹으로 사진작가의 그것처럼 시적이고 에로틱한 이미지를 화면에 담아낸다. 인물의 주름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보일 만큼 과도한 클로즈업을 사용하여, 배경에 초점이 분산되는 것을 막고 인물의 감정을 강조한다. 그러나 한 편으론 인물을 하나의 피사체처럼 배치하고 배경을 여백으로 남겨둠으로써, 순간을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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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추가 시간을 죽였네."



여백의 미가 오로지 미장센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콜드 워>의 서사구조는 마치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친 것처럼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걸 메우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이 오로지 사랑이라는 알맹이에만 집중한다. 영화에서 시간의 도약은 암전이라는 기교 없는 편집을 통해 이루어지고 이미 예전의 회포는 다 풀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줄라와 빅토르는 재회한다.


1955년, 파리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줄라에게 파리의 생활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거북하다. 폴란드 민요 '심장'을 재즈풍으로 편곡한 노래가 파리의 클럽에서 히트하자 줄라는 곧 음반을 발매하게 된다. 그러나 불어로 번역한 가사는 온갖 은유로 점철되어 있다. "시계추가 시간을 죽였네." 줄라는 번역을 한 프랑스 시인에게 자신은 이런 은유를 이해할 수 없다며 불만을 토한다. 시적인 문장은 아름답지만 진실하지 못하다. 심지어 빅토르는 그녀의 인기를 위해 파티에 온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빅토르는 오로지 줄라를 위해 이런 자리를 준비했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순식간에 아버지를 칼로 찌르고 도망 나와 스탈린을 위해 춤춘, 폴란드 산골 소녀로 낙인찍힌다. 이해할 수 없는 은유와 공허한 감정만이 부유하는 공간, 파리에서 그녀는 껍데기다.

    

사랑의 알맹이는 오직 순간의 진실한 감정으로만 이루어지므로 <콜드 워>에서 그들이 다시 재회하기 위해 이겨내야만 했던 모든 고난과 장애물들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콜드 워>는 기존의 영화 공식을 완전히 파괴한다. 1959년, 영화는 수척한 모습의 빅토르를 잠시 비출 뿐, 그가 줄라를 다시 만나기 위해 감수해야만 했던 참혹한 수용소 생활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사랑에서 중요한 건, 사랑에 도달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들이 아니라 5분에 불과할지라도 함께 하는 그 순간이다. 1964년, 껍데기가 되기 싫어 파리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줄라는 가발과 짙은 화장, 술로 자신을 감추고 다시 껍데기가 된다. 그리고 줄라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빅토르를 보자마자 자신의 금발과는 대조적인 검은색 가발을 벗어 던지고 외친다. '나 좀 구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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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영화는 처음 줄라와 빅토르가 만났던 장소로 돌아가 알맹이만 남은 그들을 비춘다. 이제 그들에게는 그 어떤 껍데기도 남아있지 않다. 이념의 대립도, 공산당원들도, 가식도, 위선도 그리고 질투와 불신까지도. 그들은 완전히 폐허가 된 교회에서 겸허한 자세로 사랑의 맹세를 한다. 여기에는 웨딩드레스도, 하객도 없지만, 그들이 치르는 혼례는 그 어떤 결혼식보다 아름답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약을 집어삼킨 연인은 말없이 화면을 떠나가고 그 자리에는 빛바랜 억새만이 쓸쓸히 바람에 나린다. 하나의 세계를 위해 다른 세계를 포기한 그들의 모습은 흡사 <데미안>의 경구와도 같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이미지 출처 : FILM SCHOOL REJECTS, the JC, Pinterest


[김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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