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워지거나, 선명해지거나, - 현대의 균형과 소통에 대하여 [도서]

김소연의 시, 그래서 를 읽고
글 입력 2019.03.09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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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김소연 - 그래서 中



이전에 어느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뽑아 성분 분석을 하면 그 사람의 직업과 일상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결과는 놀랍도록 잘 들어맞았다. 페인트칠을 하는 일을 본업으로 삼던 사람은 머리카락에서 페인트와 같은 종류의 성분이 검출되었다. 실험 대상으로 등장한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그들의 머리카락은 말하자면 잘려나가기 전까지 그들의 한 시기를 전시하는 박물관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는 그걸 보고 어떤 기분을 느꼈던가. 신기하다는 말에 앞서서, 계속 머리를 잘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서 무얼 했는지, 누굴 만나고 무얼 먹었는지, 어떤 기분으로 며칠을 망쳤으며 밥을 걸렀는지, 나도 기억나지 않는 내가 지은 죄들. 그런 것들을 계속 안고 살아가는게 무섭게 느껴졌다. 누가 나에게 관심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반드시 한 명은 그 사실들을 알고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의 역사들이 내 머리에 메달려 나의 뒤통수를 지켜본다는 것. 이것만큼 소름끼치고 무서운 것은 없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김소연 - 그래서 中



언어가 시대의 문화를 대변한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언어를 분석해 보았을 때 그들이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인지도 알 수 있다. 목소리를 통해 출신 지역을 알 수 있고, 성별과 나이를 알 수 있으며, 건강 상태와 심리 상태까지 분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통해서는, 감각과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말하자면 목소리는 옷이고 언어는 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변하지 않는 속성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목소리를 몸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우리의 속성은 시시각각 끊임없이 변한다.

반면 언어는, 가장 내밀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하나의 메아리다. 크고 분명하게 발화할수록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되풀이된다. 그 돌아오는 목소리는 나의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비롯된 파장의 소리이다. 언어는 그렇다. 괴로울 만큼 솔직하고 분명하게 다시 나에게 전해져 온다. ‘말의 책임’이라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말이 다시 돌아오지 않길 바라지만 오산이다. 그것들은 부메랑처럼 전환점을 거쳐 반드시 돌아온다. 그걸 바라지 않으면서 기다려야만 하는 시간들, 그 시간들이 발화자의 괴로움이다.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김소연 - 그래서 中



누군가의 입에서 내가 분명하게 발음되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그걸 원하고 있을까. 나는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구분짓는 것이 요즘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내가 무슨 사람인지, 무얼 하는 사람이고, 나에게 어울리는 색깔은 무엇이고, 나의 성격은 어떤 유형인지, 나는 탐색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색가인지 혹은 머무르기를 좋아하는 언변가인지, 나의 직업과 상태와 내가 있을 곳은?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요즘 시대에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세계와 자아가 충돌하며 진정한 자신을 찾는 일은 소설이 소비되어온 시대만큼 긴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나 요즘은 누군가의 정체성을 찾아 명명해주는 것이 하나의 직업이 되기도 한다. ‘당신이 누구인지 내가 말해주면 당신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바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신뢰할 수 없기에 그들 또한 신뢰할 수 없었다. 당신들이 정해준 내 정체성이 사실 정말 내가 아니라면?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당신에게 무언가를 잘못 귀띔해 준 것이라면? 혹은 자꾸만 변하는 내가 당신과 이야기 하는 사이에 변해버린다면? 당신이 말해준 ‘나’가 비대해져서 희미하게 존재하던 나머지의 ‘나’를 없애버린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단일된 나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김소연 - 그래서 中



나는 어디에서 지워지고 있나,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남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시절을 마냥 두려워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 때만큼 내가 선명하게 언어로 남겨진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았을 때, 이건 균형의 문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편의 내가 선명해진 만큼 다른 편의 나는 계속 흐릿해지고 있었다. 나는 뭘 하는 사람이었더라, 내가 누구였는지 생각해 보았는데 그걸 알려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전부 나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외로워졌고, 이제 내가 뭘 하는 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지워지는 동시에 누군가를 지우고 있었다. 사람들과 모여 누군가를 욕할 때 그 사람이 유독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런데 내가 그려낸 사람은 그의 얼마만큼이었을까. 그는 그 자리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인 동시에 가장 흐릿한 사람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균형의 문제다.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마싯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김소연 - 그래서 中


왜 단물이 아니라 진물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베어무는 사람은 나니까, 상처내지 않고서는 단 물을 느끼지 못할 만큼 멀리 간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맛있다, 라고 말했을 때 그걸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나 혼자라는 게 문득 외로웠다. 그러다가 너무 외로워서 괴로운 표정을 지을 때,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나 혼자 뿐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정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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